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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처니 Aug 24. 2022

조금 덜 치열했더라면 조금 더 사랑했을까(2)

내가 만난 새로운 세계(5)

육아를 함에 있어 남편이 도와준다는 표현은 하지 않는다같이 한다는 개념만 있을뿐이다.     

하지만 당시에 남편이 도와주지 않아 힘들다는 말을 다른 누구도 아닌 시어머니께 푸념을 괜히 했다가 굳이 듣지 않아도 될 상처의 말을 들었다그때의 나는 왜 그렇게 바보같은 짓을 한걸까

아들을 혼줄 내고 가르쳐 주기를 바랬던 나는 그때 나 참 바보같은 생각을 했구나’ 두고 두고 후회했다.

시어머니는 내게 너도 아들이 둘이야라고 말씀하셨지만 나는 그 뜻을 알 수 없다설마 나도 시어머니와 같이 이중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이 된다는 뜻이라면 몸서리가 절로 쳐진다끊임없이 깨닳아가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배워 깨닳기를 게을리 하지 않겠다고 더 굳게 다짐하게 된다.


우리집에서 가까운 거리에 대학병원이 있었다.

큰 아이에게 잦은 감기에 이어 폐렴이 찾아와 5일간 병원에 입원했던 때다.

당시 나는 둘째 임신 6~7개월쯤 지나고 있었다.

출근할 때 시어머니가 오서서 아이를 봐주시고 내가 퇴근해 도착하면 돌아가셨다당시 어머니는 매일 오전 운동을 하러 다니셨고 같이 운동하시는 아주머니들과 점심을 드신 후 우리집으로 매일 오시는 일정을 보내셨다나와 약속된 것도 상의 된 것도 아닌 어머니 혼자 그렇게 코스를 정해 놓으셨다그리고는 아버님이 퇴근해서 오시기 전에 불이나케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셨다

시어머니께서 5일동안 병원에서 아이를 돌보는 일은 여간 답답한 일이 아니셨을 것이다     

퇴근해 병원에 도착해서 아이를 보았다한 두 시간 후 퇴근한 남편도 병원에 도착했다나는 작은 침대에서 18개월쯤 되었던 아이와 함께 잠을 자고 다시 출근을 했다     

나는 코피가 나는 것과는 거리가 멀게 살았다살면서 서 너 번 나봤을까그런 나는 아이가 입원해 있는 5일동안에 코피를 이틀간 보았다

병원에 둘 다 있으면 뭐하니아들이라도 집에 가서 편히 자라” 시어머니는 말씀하셨다.

 

상처를 겪고 낫고를 반복하면서 제법 굳은살이 생겼다조금은 딱딱하게 굳은 살은 자연스럽게 마음에 철벽을 치고 있었다.     

화나고 분노하고 미워하고 싫어하는 마음이 서서히 희미해져 갔다굳은 마음은 지쳐 나가 떨어져 더 이상 내 감정을 크게 흔들지 않도록 막았다두려움이라는 감정도 서서히 내 안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대기를 걸어 두었던 건강가정지원센터의 상담이 내 차례가 되었을때에는 이사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였다.

상담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오후만 남아 있었기에 일주일에 한 번 유모차에 아이들을 태우고 길동에서 명일동까지 걸어다녔다그 곳에는 작은 방이 하나 있었는데 직원분께서는 내가 상담을 진행하는 시간동안 아이를 볼 봐 주셨다그렇게 나를 좀 도와달라고 몸부림 치던 상담이 5회기까지 진행 되던 중 이사를 하게 되었다내가 이사를 온 지역으로 연계를 해주실 수 있다고 하셨다이사 후 바쁜 일들을 정리하고 일정을 다시 잡아 보겠다고 했다아이들이 새로운 유치원에 적응하고 새로운 사람들과 어울리느라 다시 예약을 잡아보겠다고 한 일은 그렇게 흐지부지 되었다.

 

어느정도 새로운 곳에 적응을 한 후에는 심리적 상처흔히 말하는 트라우마로 남아 있던 내 기억이 다시 나를 뒤흔들었다난생처음 신경정신과를 찾아갔다머리와 발 끝에 주렁주렁 줄을 달아놓고 검사를 시작했다곧이어 결과지를 함께 보며 상담을 하면서는 펑펑 울기만 했다집에 돌아와보니 언제 정신없이 처방 받아 들고 온건지도 모를 약이 식탁위에 놓여 있다

신경정신과에 내 발로 걸어간 것은 큰 용기를 낸 것이고그 안으로 들어가기까지 병원 문 앞에서 한참을 망설였다막상 약이라고 받아 온 것은 무서워서 먹지 못했다당시에 내게는 신경정신과라는 곳에 대한 편견이 많았던 것 같다약에 내성이 생기고 중독이 될까봐 겁이 났다.


이사를 와서도 처음에는 남편과 정말 많이 치열하게 싸웠다.

명절이나 가족 행사 날이 다가오면 집안 분위기가 싸해졌다그 여파가 친정으로까지 향했다내 가정일에 제대로 말 한마디 못하시던 친정이었음에도 무언가 챙기는 일이 불편했다시집에 왕래를 안하게 되니 그 피해가 친정에까지 미치고 있었다

그래서 조금은 소극적으로 친정행사에 참여했다하지만 어느때부터인가 그럴 이유가 없잖아” 당당해 지기로 마음 먹었다.     

남편은 아이들을 데리고 본가의 행사에 간다고 했다.

나는 참을 수 없는 분노와 배신감에 치열하게 대항했다.

아이들은 소중하고 보고싶으시대그 아이들을 낳은 며느리에게는 막말과 상처를 주고 아이들은 보고 싶어 하신다고?”     

천륜을 막을 생각은 없다내가 관여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하지만 아이들을 보고 싶어 하는 그 마음을 충족시켜 드리고 싶지 않았다

남편은 몇 번 본가의 행사에 참여 하고는 이내 가지 않았다불편했으리라

그것 또한 스스로 감당해 내도록 두었다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몇 번 의 가족 행사를 그렇게 보냈다무슨 날이 다가오면 어김없이 불편한 날을 보냈다우리 가족이 행복할 수 없음에 억울했다내키지 않았지만 어느때부터 남편에게 아이들의 의사를 묻고 시집에 데려가는 것에 대해 알아서 하도록 얘기했다     

내 가정이 제 3자로 인해 부정적 영향을 받는 것을 막고 싶었다내 삶이 제 3자로 인해 휘청거리는 일을 더이상 겪고 싶지 않았다온전히 나를 위해서 그렇게 했다그리고 앞으로는 나를 위해 조금 더 이기적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2017년 어느날 시집 어른들을 마주하게 되는 일이 있었다어쩌다 식사까지도 함께 하게 되었다시아버님은 내게 지나간 일은 덮자” 하셨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왜 대답하지 않느냐시는 물음에도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너무 간단해서 허무하기까지 했다.

덮자” 이렇게 간단한 일이 내게는 지난 세월 그리도 몸부림을 치고 치를 떨며 괴로워했던 일이었던가 허무했다.

 

남편과 아이들은 시집의 행사에 함께 간다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온전히 나 위해서 더 이상 다투지 않는다     

시간이 지났다는 이유로세월이 흘렀다는 이유로자연스럽게 나이가 들고 힘이 약해졌다는 이유로 가여운 마음이 드는 것에 스스로 화가 났다

가끔 남편이 가엾게 느껴질때가 있는데 그러면 그 감정을 느끼는 내가 너무 싫었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가정을 지켜나가고 싶었다그리고 어차피 지켜나가기로 마음 먹었다면 잘 지켜내고 싶었다


나를우리 가정을 뒤 흔드는 것이 무엇이든 제 3자에 의해 부정적 영향을 받으며 살기를 그냥 두고 보지 않아야 한다그것을 차단하고 잘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결국에는 주변의 제 3자들과 잘 지낼 수 있는 길임을 알아야 한다     


많은 일들을 겪어내고 결혼 16년차가 되니 남편에게 농담을 던지기도 한다. “70퍼센트 바뀌었어~ 80퍼센트 바뀌었어~” 마냥 농담은 아니었다남편은 실제로 많이 바뀌었고 그도 역시 노력하고 있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지난 상처가 건드려지는 어떤 순간에는 주체 할 수 없는 감정에 압도되고 만다아직도 이렇게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을 때가 불쑥 찾아오는것에 여전히 좌절감을 느낄 때도 있다

그러나 이제는 이 감정들을 빠르게 알아채고 해소하는 방법을 제법 알고 있다.

조금 더 편안할 수 있고 그것이 내 가족에게 안정을 가져다 줄 수 있다면 그 방법을 끊임없이 찾아가려고 한다     

8년전건강가정지원센터의 상담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 점점 맞다.

내가 바뀌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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