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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백이 Apr 30. 2021

배 고파 마신 막걸리

말랭이 동네가 싫었던 어린 소녀

배 고파 마신 막걸리    

 “서영기는 술만 안 먹으면 법 없어도 살 사람인디~”

동네 사람들이 아빠를 칭하는 소리를 듣고 가끔은 아빠를 답답하게 생각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어릴 때 살던 말랭이 동네를 나이 마흔이 넘어서 가 보았더니 나의 살던 집은 사라지고 길이 되어 있었다. 집이 있었던 것을 기억하면서 그 뛰놀던 골목을 가름해보니. 그 좁은 골목에서 우린 많은 놀이를 하였다.

팅팅 튕기는 고무줄놀이며, 지금은 사방치기 그때는 팔방 놀이라 했던 놀이. 부자가 아닌 집은 돌멩이를 주워서 했던 공깃돌 놀이 등 형사 놀이 오징어 놀이 등등. 많은 놀이를 했던 필름이 스쳐 지나가는 어릴 적 놀이터 골목길이다.


우리 집은 끝 집이었다. 공중변소가 있고 그 바로 아래에 우리 집이 첫 집이었다.

사람들은 공중변소를 가려면 그 작은 골목을 지나가야 했다. 양다리가 다쳐서 없던 아빠의 똥을 신문지에 차곡차곡 싸서 버리러 오는 세 남매도 있었고, 화장실이 너무 멀어서 궁둥이를 오므리고 달려오는 사람들도 있고 급하게 달려와서 변소를 가려던 사춘기 수줍은 소녀는 변소(화장실) 앞 사춘기 소년들이 모여 있으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막상 변소에 들어갔어도 맘 편히 싸지도 못 했을 것 같다.

그 사춘기 소년 소녀들은 다 어디 있을까?

어떻게 살고 있을까?


난 그 골목을 가기 싫었다. 14살 어린 나이에 떠나오면서 절대 가고 싶지 않은 동네이고 골목이었다. 다시는 오지 않을 거라고 떠난 골목을 어릴 때 남자 친구의 안내로 찾아가서 여기가 너희 집 자리 여기가 누구 집 여기가 국숫집. 찌릿한 가슴에 통증이 오게 되었고 나이 먹어 찾은 골목은 추억의 한 장 한 장이었다.

     


난 그 골목길에 아빠의 막걸리 심부름을 다녔다. 물렁물렁한 막걸리 병을 들고 올 땐

“니 아빠 또 술 마시냐” 아줌마들의 아는 척해 주는 게 정말 싫었다. 다른 아이들은 막걸리 사 오라 하면 막걸리 뚜껑의 가스 새는 작은 구멍으로 쭉쭉 빨아먹고 오던 아이들이 있었다. 달달하니 맛이 있다나 하면서 난 아빠가 즐겨 먹었던 막걸리는 정말 싫어한다.


큰 고모가 설탕 넣고 폭폭 끓여 주어서 맛보았던 막걸리 말고는 입도 안 대고 살았는데, 남편과 마흔 넘어서 한 잔 마셨던 막걸 리가 비 오는 날에는 가끔 기름진 음식과 생각나는 별미가 되었다.

       

 아빠는 술을 드시기 시작하면 식사를 안 하셨다. 안주라고는 김치쪼가리에 마시는 막걸리는 아빠의 양을 채워 주는 양곡이었다.

늘 배고파서 마신다는 막걸리 어린 마음에 배고프면 밥을 먹을 것이지 핑계는 그랬을 것이다. 혼자 아이들을 건사해야 하는 아빠에게도 허한 마음을 달래는 위안이었던 것 같다.


아빠는 대포 집에서 남은 안주 땅콩이나 삶은 콩 등을 주머니에 넣었다가 꺼내 주며 기뻐하시는 아빠의 얼굴이 지금도 가끔 생각난다.


 산소에 갈 때 아빠가 좋아하는 막걸리 한 병 사들고 가서 묘 똥이 흠뻑 젖을 만큼 다 부어준다. ‘아빠 배부르지’

어린아이는 아빠에게 늘

“아빠 한 잔만 머” 하면서 손가락 하나를 폈다고 한다.  


아빠가 이제는 내가 아닌 우리 아이들을 보고 웃고 있는 것 같다.

늘 외할아버지 산소 갈 때는 막걸리 한 병 사가서 아이들 세명에게 한 잔씩 묘 똥에 부어주라고 한다.

돌아가신 분이 무엇을 알겠나  그래도 난 아이들 보는 앞에서 창피한 줄도 모르고 아빠 우리 아이들 잘 챙겨줘, 아빠 오빠도 잘 되게 해 주고 , 아빠 나도 잘 되게 해 주고 , 나 잘 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아~

큰 딸이 그런다 할아버지가 해달라고 하는 것도 많다고 하겠다고 하면서 우리는 산을 내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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