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뼘의 보온(保溫)

2026. 01.15

발가락 사이로 매서운 찬바람이 불어오는 새벽이었다.

부천역 광장의 공기는 면도날처럼 날카롭게 온몸을 파고들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두툼한 외투 속에 몸을 구겨 넣은 채, 목적지를 향해 경보하듯 스쳐 지나갔다. 그 풍경 한복판에, 시간이 정지된 듯한 뒷모습 하나가 있었다. 허름한 잠바 차림에 얇은 양말을 신은 발, 그리고 뒤축이 다 닳은 슬리퍼. 그녀는 고개를 무릎에 묻은 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슬리퍼는 본래 '안'을 위한 사물이다. 거실의 매끄러운 바닥이나 안방의 온기 위를 경쾌하게 미끄러져야 할 그것이, 지금은 영하의 콘크리트라는 혹독한 '밖'에 내던져져 있었다. 슬리퍼 밖으로 밀려 나온 그녀의 위태위태한 발은 시련의 증거라기보다, 삶의 의지가 잠시 가동을 멈춘 ‘절대 영도’의 상태에 가까웠다.

나는 조심스레 다가가 그녀의 발치에 내 손을 뻗어 보았다. 직접 말을 걸기엔 내 용기가 부족했고, 사연을 묻기엔 그녀의 침묵이 너무 깊었다. 그저 어림짐작으로 발 크기를 가늠해 보는 것. 한 뼘, 그리고 마디 하나만큼의 길이. 타인의 고통을 다 안다고 자만하지 않는 것, 그저 그녀가 딛고 선 시린 바닥의 면적만큼이라도 정직하게 가늠해 보는 것.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인사이자 비언어적인 연대였다.

퇴근길, 나는 신발 가게로 향했다. 매대 위 수많은 구두 사이에서 가장 털이 많고 푹신한 털신 하나를 골랐다. 신발은 이동을 위한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세상의 딱딱한 시선으로부터 존재를 보호하는 완충지대이며, 다시 대지를 딛고 일어설 수 있게 하는 최소한의 지지대다.

회복이란 거창한 구호에서 오지 않는다. 그것은 외부에서 열기를 빌려오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남은 마지막 온기가 밖으로 새 나가지 않게 막아주는 ‘보온’에서 시작된다. 나는 그녀의 얼어붙은 일상의 균열 사이에 이 포근한 온기를 끼워 넣어주고 싶었다.

이튿날 새벽, 어제처럼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모습 그대로 슬리퍼를 신고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발 옆에 털 신발을 가만히 내려놓았다. 누군가에게는 사소한 물건이 당사자에게는 무례한 동정으로 읽히지는 않을까, 놓아두는 손끝이 잠시 망설임으로 떨렸다. 나의 선의가 혹여 그녀의 마지막 자존감을 건드리는 비겁한 위안은 아닐지 자문했다. 하지만 나는 믿기로 했다. 0도의 대지 위로 36.5도의 체온이 머물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이 생긴다면, 그녀는 다시금 땅을 밀어내며 다음 발자국을 뗄 용기를 얻을지도 모른다고.

어쩌면 우리 모두는 각자의 슬리퍼를 신고 생의 겨울을 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겉으로는 멀쩡한 코트를 입었을지언정, 마음의 발치는 늘 시린 바람에 노출된 채 위태롭게 서 있는 단독자들 말이다.

광장을 빠져나오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가 신발을 신었는지, 아니면 여전히 고개를 묻고 있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다만 확실한 건, 이제 내 마음속에도 그녀의 발치만큼이나 따뜻한 온기가 한 뼘 생겼다는 사실이다. 회복은 그렇게, 타인의 뒷모습에 가닿으려 애쓰는 사소한 ‘한 뼘’의 면적에서부터 조용히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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