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어가는 것들의 품격


가스레인지 위에서 검은 구멍이 숭숭 뚫린 냄비가 달궈진다. 아내가 주문했다는 '직화 구이 냄비'다. 반신반의하며 고구마를 넣고 불을 붙였다. 잠시 후, 주방의 공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달큰한, 껍질이 타들어 가며 내는 특유의 노란 향기가 온 집안을 채웠다.

냄비 구멍 사이로 넘나드는 불꽃은 고구마의 살결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문득 궁금해졌다. 쇠붙이 하나를 사이에 두고 불길을 가두었을 뿐인데, 어째서 이토록 익숙하고도 낯선 냄새가 나는 걸까. 직화(直火). 중간 단계 없이 불꽃이 식재료에 직접 닿는 이 방식은 어쩌면 가장 무례하면서도 가장 정직한 조리법일지 모른다. 과정을 생략하고 결과만을 탐닉하는 우리의 조급함을 닮은 이 열기는, 기다림이라는 단어를 구식으로 몰아세우며 빠르게 익어갔다.

코끝을 스치는 탄내를 따라 기억은 40년 전의 겨울 길목으로 달려간다. 그 시절, 골목 어귀에는 커다란 드럼통이 서 있었다. 아버지는 퇴근길, 그 뜨거운 통에서 갓 꺼낸 고구마 봉투를 품속에 넣고 자전거 페달을 밟으셨다.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의 코끝은 늘 발그레했고, 외투 깃 사이로는 가슴의 온기를 머금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누나와 내가 손을 호호 불며 노란 속살을 베어 물 때, 아버지는 정작 당신의 찬 손을 비비며 그저 웃기만 하셨다. 아버지의 찬 손과 고구마의 뜨거운 김이 교차하던 그 짧은 순간, 겨울의 추위는 비로소 안방 문턱을 넘지 못했다.

오늘 구운 고구마의 맛은 그때와 놀라울 정도로 비슷했다. 겉은 파삭하게 탔고 속은 꿀처럼 녹아내렸다. 하지만 입안을 맴도는 무언가가 부족했다. 편리한 직화 냄비는 불의 온도를 정밀하게 재현했지만, 아버지가 찬 바람 속을 가로질러 품고 오셨던 '기다림의 온도'까지는 복제하지 못한 듯했다.

어쩌면 우리가 기억하는 가장 맛있는 음식은 혀끝이 아니라 마음의 층위에서 완성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자전거를 타고 오시던 그 길 위에서, 고구마는 식어가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체온과 섞이며 비로소 '가족의 맛'으로 익어갔던 것이다. 효율이 지배하는 세상은 단 20분 만에 군고구마를 만들어내지만, 사랑은 늘 휘둘러 가는 법이다. 때로는 식어가는 것을 온몸으로 막아내며, 내 체온을 나누어 주어야 하는 숭고한 수고로움을 동반한다.

고구마 하나를 반으로 갈랐다. 뜨거운 김이 얼굴을 훅 끼치고 지나간다. 세상은 더 정밀한 알고리즘과 압도적인 속도로 편리를 증명하겠지만, 나는 가끔 그 투박한 드럼통 앞의 지루한 기다림이 사무치게 그립다. 20분 만에 완성되는 직화의 열기에는 결코 담길 수 없는 것, 그것은 목적지에 닿기까지 찬 바람을 견뎌내며 체온으로 지켜낸 '식어가는 것들의 품격'이었다.

효율은 최단 거리를 말하지만, 사랑은 기꺼이 먼 길을 돌아온다. 아버지가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품었던 것은 단순한 허기가 아니라, 당신의 심장박동과 노란 고구마의 온기가 섞여 하나의 리듬이 되는 '시간' 그 자체였을지도 모른다. 그 눅진한 기다림 속에서 고구마는 비로소 생존의 허기를 넘어, 누군가의 헌신이 깃든 위로가 되었다.

이제 나는 나에게 묻는다. 빛의 속도로 배달되는 풍요의 시대에, 나는 내 아이들에게 무엇을 품어다 줄 수 있을까. 즉각적인 만족 뒤에 숨은 공허 대신, 조금 느리더라도 내 온기가 고스란히 배어 있는 '품 안의 기억'을 전하고 싶다.

직화 냄비의 뚜껑을 닫는다. 잘 익은 고구마의 온기를 가두려는 듯, '챙-' 하는 소리가 고요를 깨우고 이내 잦아든다. 생의 가장 깊은 맛은 맹렬한 불꽃이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 기꺼이 내어준 품 안에서 서서히 완성되는 식어가는 것들의 품격에 있음을, 나는 이제야 묵직한 속살을 베어 물며 배운다. 그리고 다짐한다. 나 또한 아이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게 식어가는 품이 되어주겠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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