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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세규 Dec 18. 2021

장보고, 전남 완도군 장좌리의 장도에 남은 흔적 청해진

초급 6번. 한국사 기출문제, 활을 잘 쏴서 '활보'라 불린 사람

< 이런 분께 추천합니다>


1. 역사에 대해 관심 있으신 분

2. 한국사 시험을 준비하시는 분

3. 누군가를 기다릴 때, 출. 퇴근 시간

지하철에서  잠깐, 부담 없이 읽을 글이

필요하신 분.


<이글에 나오는 내용 요약 >


* 활보는 활을 잘 쏘는 사람이란 뜻이다. 궁복(弓福) 또는 궁파(弓把)라 하기도 한다. 청해진을 설치한 해상왕 장보고의 별칭이다.


*칠지도의 뒷면에 새겨진 글자를 보고 하사를 했느냐, 바쳤느냐, 우리나라와 일본의 해석이 다르다.


*삼국사기는 김부식이 국가의 주도로, 삼국유사는 일연스님이 개인적으로 쓴 역사서이다.


*북한산 순수비 = 진흥왕 순수비, 순수 (巡狩)란  임금이 나라 안을 두루 살피며 돌아다니던 일을 말한다. 조선시대 김정희가 비석의 옆면에 글자를 새겨 넣고 진흥왕 순수비라 이름 지었다.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서 >


2021 도쿄올림픽 양궁에 걸린 5개의 금메달 중 4개를 따낸 우리나라는 이번에도 세계 최고의 실력임을 증명했습니다.


양궁 (洋弓)은 한자에서 보듯 서양식으로 만든 활쏘기 경기를 말합니다. 예부터 활을 잘 다뤘던 우리 선조들의 기운이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듯합니다.


신라시대에 활을 잘 쏘기로 유명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궁복(弓福) 또는 궁파(弓把)라는 이름으로 불렸지요. 훗날 이 아이가 자라서

해상왕이라 알려진 장보고입니다. 이름이 특이해서 어린 시절, 어머니가 장 보고 오시다로 국사 공부를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9세기 신라시대 우리나라, 중국과 일본 해상의 국제 무역을 주도했던 장보고를 알아봅니다.


역사에 기록될 정도로 어떤 분야에 뛰어난 실력을 가진 이들은 파란만장한 삶 속에서 일어나는 온갖 역경을 마침내 극복하고 새로운 길을 만들어가곤 하죠. 그의 발자취를 따라 출발합니다.


정답은 맨 끝에 있습니다.


드라마로도 제작되고 워낙 잘 알려진 인물인 장보고에 대한 문제다. 의 일대기를 여러 자료를 통해 알아보자. 시험공부뿐 아니라 미처 알지 못했던 역사 지식을 쌓는데 도움이 된다.


그가 어떻게, 왜 그런 삶을 살게 되었는지를 곰곰이 생각하다 보면 오늘날, 세상을 바라보는 통찰력을 기를 수 있다.


* 1번 청해진을 설치하였다.


청해진 (淸海鎭)의 한자는 다음과 같다.

(맑을 청), 海 (바다 해), 鎭 (진압할 진)

오늘날 전라남도 완도 지역을 말한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신라의 흥덕왕 때 장보고가 군사 1만 명을 데리고 내려가 해적을 소탕하고 중국과 일본의 해상권을 장악하고 중계무역으로 경제적, 군사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곳이다.


유적지로 완도읍 장좌리의 장도가 있다.

청해진이 있던 곳인데 1991년부터 발굴 작업이 계속되고 있다.


썰물 때 섬 (청해진)을 방어하기 위해 섬 둘레에 박아 놓은 굵은 통나무의 흔적을 지금도 볼 수 있다.

삼국사기 (김부식 저)와 삼국유사 (일연)를 바탕으로 장보고에 대해 살펴본다.


삼국사기

권 제44 열전 제4


가계


장보고 (張保皐)와 정연(鄭年)은 혹은 모두 신라 사람이다. 다만 그들의 고향과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알 수 없다.


*정연은 장보고의 어린 시절 벗이다.


유년시절


두 사람 모두 싸움을 잘하였는데, 정년은 또 바닷속에서 잠수하여 50리를 다녀도 숨이 막히지 않았다. 그 용맹과 씩씩함을 비교하면, 장보고가 정년에게 조금 미치지 못하였다. 그러나 정년이 장보고를 형으로 불렀다. 장보고는 나이로, 정년은 기예로 항상 서로 맞지 않아 서로 아래에 들지 않으려 하였다.


당 무령군 소장 시절


두 사람은 당나라에 가서 무령군 소장(武寧軍小將)이 되어 말을 타고 창을 사용하는데, 대적할 자가 없었다.


청해진을 지키다.


후에 장보고가 귀국하여 흥덕 대왕을 뵙고,


“중국을 두루 돌아보니, 우리나라 사람들을 노비로 삼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청해(淸海)에 진영을 설치하여 도적들이 우리나라 사람을 붙잡아 서쪽으로 데려가지 못하게 하십시오.”

라고 아뢰었다.


청해는 신라 해로의 요충지로, 지금 [고려]은 그곳을 완도(莞島)라 부른다.


흥덕왕이 군사를 내어주다.


흥덕왕이 장보고에게 군사 만 명을 주었다. 이후 해상(海上)에서 우리나라 사람을 파는 자가 없었다.


정년이 장보고에 투탁하다.


보고가 이미 귀하게 되었을 때, 정년은 [당나라] 관직에서 떨어져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며 사수(泗水)의 연수현에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수비하는 장수 풍원규(馮元規)에게,


“내가 동으로 돌아가서 장보고에게 걸식하려고 한다.”라고 말하였다.


원규가, 

“그대와 [장] 보고의 사이가 어떠한가? 어찌하여 가서 그 손에 죽으려 하는가?”라고 하였다.


년은,

“굶주림과 추위로 죽는 것은 전쟁에서 깨끗하게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물며 고향에 가서 죽는 것이랴?”라고 말하였다.


마침내 그곳을 떠나 장보고를 찾아뵈었다. 장보고가 그에게 술을 대접하여 극히 환대하였다.


장보고와 정년이 정변을 일으키다.


술자리가 끝나기 전에 희강왕이 시해되어 나라가 어지럽고 임금의 자리가 비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장보고가 군사를 나누어 5천 명을 정년에게 주며, 정년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그대가 아니면 환란을 평정할 수 없다.”라고 말하였다. 정년이 왕경에 들어가 반역자를 죽이고, 신무왕을 세웠다.


신무왕이 장보고를 불러 재상으로 삼고, 정년으로 대신 청해를 지키게 하였다


삼국유사

권 제2  >   제2 기이(紀異第二)  >  

신무 대왕(神武大王) 염장(閻長) 궁파(弓巴)


제45대 신무 대왕(神武大王)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궁파(弓巴)에게 말하기를,


“나는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원수가 있다. 네가 나를 위해 능히 그를 제거해 준다면 왕위를 차지한 후에 그대의 딸을 취하여 왕비로 삼겠다”라고 하였다.


궁파 (장보고)는 이를 허락하고, 마음과 힘을 같이 하여 군대를 일으켜 경사(京師)로 쳐들어가서 그 일을 이루었다.


이미 왕위를 빼앗고 쿵파의 딸을 왕비로 삼으려고 했으나 여러 신하들이 극히 간하여 말하기를,


 “궁 파는 미천한 출신이니 왕께서 그 딸을 왕비로 삼는 것은 불가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왕이 그 말을 따랐다.


이 무렵 궁 파는 청해진(淸海鎭)에 있으면서 군진을 지키고 있었는데, 왕이 약속을 어긴 것을 원망하여 반란을 모의하려 하였다.


 이때 장군 염장(閻長)이 이 말을 듣고 아뢰기를,


 “궁파가 장차 충성스럽지 않은 일을 하려 하니 소신이 청하건대 그를 없애겠습니다”라고 하니, 왕이 기뻐하여 이를 허락하였다.


*궁파(弓巴) : 장보고


한 편의 단편 소설을 읽은 느낌이다. 장보고의 스토리를 요약해본다.


무예가 뛰어났지만 신분의 한계로 장수가 될 수 없었던 장보고는 중국으로 건너가 실력을 인정받고 신라로 돌아온다.


왕에게 중국에서 경험했던 일(노비, 인신매매)을 말하며 청해진을 설치하자고 건의한다. 왕은 군사를 내주며 허락하고 이후 그런 일은 없어졌다.

서남해 바다를 장보고가 꽉 잡고 중국과 일본의 해상 무역을 주도한다.


장보고가 활약할 당시의 왕은 흥덕왕이었다. 그가 후계자 없이 죽자 신라는 왕권을 두고 권력 다툼이 일어났다. 장보고의 도움을 받은 신무왕은 왕이 되기 전에 자신을 도와주면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신무왕은 약속을 어기고 장보고의 부하 염장을 시켜 그를 죽였다.


능력이 뛰어난 인물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시기와 모함으로 견제를 받는다. 1000여 년 전 역사의 흔적이 오늘날 우리 사회와 비슷하다.


노비의 인신매매 현장을 보고 이를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장보고가 해적들을 소탕하고 바다를 주름잡는 장면을 떠올려본다.  사람의 생각이 수많은 사람들을 살릴 수 있었다.


삼국사기 장보고에 대한 기록의 마지막 줄이다. 그에 대한 평가가 있다.


‘나라에 한 사람만 있어도, 그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대체로 나라가 망하는 것은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다. 그 망할 때를 당하여 어진 사람이 쓰이지 않아서이다. 진실로 어진 사람을 쓴다면 한 사람으로 족할 것이다.”


* 2번 왜에 칠지도를 보냈다.


칠지도 (七支刀)란 말 그대로 일곱 개의 칼날이 있는 검이다. 실용적이기보단 의례나 어떤 상징적 의미라고 보인다.


1600여 년쯤 백 제과 일본과의 외교 관계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유물이다.


칠지도의 뒷면에 새겨진 글자를 보고 한국과 일본이 해석하는 입장이 다르다.


' 백제 왕세자가 왜 왕을 위해 만들었으니 후세에 전하여 보아라. '


우리는 일본에게 하사를 했다 하고 일본은 우리가 칠지도를 바쳤다고 주장한다.


*3번 삼국사기를 저술하였다.


고려 인종 23년(1145), 김부식이 저술했다. 삼국유사(일연)는 개인이 썼지만 삼국사기는 국가 주도로 편찬한 역사책이다.


* 4번 북한산 순수비를 세웠다.


 1817년 김정희가 비문의 68자를 해석했고 신라 진흥왕이 한강유역을 순수(巡狩) 했다는 기록이 있어 이름을 진흥왕 순수비라 정했다고 한다. 북한산에 있어 북한산 순수비라고도 불린다.


순수 (巡狩) : 임금이 나라 안을 두루 살피며 돌아다니던 일.


김정희가 비의 옆면에 글자를 새겨 넣었다.

‘此新羅眞興大王巡狩之碑 丙子七月 金正喜 金敬淵來讀(이것은 신라 진흥 대왕 순수비이다.)


          탁본.                                김정희가 새긴 글자


<마무리 글>


정답은 1번 청해진을 설치하였다가 된다. 시험에 출제 빈도가 높아 장보고 하면 청해진 (완도)라는 공식이 성립된다.


좀 더 디테일하게 장보고에 대해 알아봤다. 활을 잘 쏴서 활보, 궁복(弓福) 또는 궁파(弓把)라는 별칭이 있었다는 점. 완도 옆에 장도라는 섬이 있는데 이곳에 아직도 청해진의 흔적이 남아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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