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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세규 Dec 28. 2021

관창 ! 너는 죽기에 너무 어리다. 어서 돌아가거라.

초급 7번. 한국사 기출문제, 그 옛날 우리와 당나라의 전투들

< 이런 분께 추천합니다>


1. 역사에 대해 관심 있으신 분

2. 한국사 시험을 준비하시는 분

3. 누군가를 기다릴 때, 출. 퇴근 시간

지하철에서  잠깐, 부담 없이 읽을 글이

필요하신 분.


<이글에 나오는 내용 요약 >


*안시성 전투 > 오늘날 중국 랴오닝성 지역에서 일어난 고구려와 당나라의 싸움이다. 고구려 장군 양만춘은 백성들과 함께 당태종이 이끄는 중국 최강의 군대를 이겨냈다.


중국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황제라고 인정받는 당태종은 ' 전쟁의 신 '이라 불렸다고 한다. 이런 황제가 직접 달려온 전투에서 고구려가 승리했다니 오늘날까지 우리가 자부심을 가질만하다.


*황산벌 전투 > 계백 (백제 병사 5000)과 김유신  (신라 병사 50000)의 대결이었다. 10배가 넘는 적군을 맞아 계백은 잘 싸웠다. 고전하고 있는 신라는 화랑들이 선두에 나섰다.


그중 관창과 계백의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삼국사기를 근거로 잠시 생각해본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그는 단기필마로 백제를 향해 돌진했을까.. 역사는 보는 관점에 따라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매소성, 기벌포 전투 > 백제, 고구려의 멸망 이후 신라와 당나라 간의 싸움이다. 나. 당 연합으로 신라는  삼국을 통일을 했지만 완전한 통일은 아니었다. 신라는 두 전투를 통해 당나라를 몰아내고 마침내 통일 신라 시대가 열린다.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서 >


인류의 역사는 전투와 전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현대전은 과학기술과 함께 적은 수의  병사로도 적을 제압할 수 있도록 발전해 가고 있습니다.


얼마 전 육군 과학화전투훈련단 (KCTC)에서는 미래 전투 체계의 실험을 공개했습니다.


K2 소총을 탑재한 드론이 적을 정찰, 타격한 후 장갑차가 진입, 그 속에서 영상을 보며 기관총으로 적을 제압하는 전투 실험이었습니다. 영화에서 본듯한 전투 장면이 실제 현장에 적용된 거지요.


현대전이 최첨단 과학으로 무장된 무인 기술의 싸움이라면 1300여 년 전 삼국시대의 전투는 어땠을까요?


일단 많은 수의 병력이 필요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 당시 전투는 전략과 군대의 사기가 매우 중요한 할을 했습니다.


16세의 앳된 화랑의 용기가 신라군 전체를 움직였습니다. 백제 멸망 전 신라와의 최후 전투로 가보도록 하지요.


정답은 맨 끝에 있습니다.


이번 문제는 사건과 시간의 흐름으로 공부를 하면 각 전투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우선 시험 문제로 제시된 4가지 전투를 도 별 흐름으로 나누면


안시성 (645)  > 황산벌 (660) > 백제 멸망 (660) > 고구려 멸망 (668) > 매소성 (675) 기벌포 (676) > 신라의 삼국통일 (676)로 이어진다.


모두 당나라와 관련된 전투다. 안시성 전투는 고구려와 당나라와의 싸움이다. 

산벌 전투에서 신라의 승리로

나. 당 연합군이 백제를 멸망까지 이르게 했다. 매소성과 기벌포 전투 신라의 자주적 통일 과정에서 당과 일어난 전투다.



첫 번째 안시성 전투부터 살펴보자.


고구려와 당나라 간의 전투다. 오늘날 중국의 랴오닝성 지역에서 일어났다.

2018년. 9월 개봉된 영화 안시성이 있다. 주연 배우로 조인성, 남주혁, 박성웅 등이 출연했다. 얼마나 치열한 전투였는지 영화 속 대사가 말해준다.


" 나는 물러서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그리고 무릎 꿇는 법도 배우지 못했다. 고구려의 신이 우릴 버리지 않았다면 함께 당겨주실 것이다. "


당태종과 고구려 장수 양만춘과의 싸움이기도 하다. 결사 항전으로 성을 함락하지 못하자 당태종은 성 높이만큼 토성을 쌓았지만 무너져 결국 안시성 전투에서 패한 채 돌아가야 했다.


양만춘 장군은 드라마나 영화에서 알려져 익히 알고 있지만 공식적인 사료에서는 그의 이름이 없고 야사에서 언급된다고 한다.


당시 중국 최강의 군대를 맞아 이겨낸 안시성 전투는 고려, 조선시대를 거쳐 오늘날까지 우리 전쟁 역사에 큰 자부심으로 남아있다.


두 번째 황산벌 전투백제와 신라간의 전투다.


오늘날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지역이다.


자신의 가족까지 스스로 죽이고 결연한 의지로 전쟁에 임한 백제의 계백장군이 5천의 결사대를 이끌고 신라 5만의 김유신과 최후 결전을 했던 곳이다.


황산벌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통상적으로 이 지역 일대를 말한다. 연산면 송정리에는 천호산이 있다. 이 산의 옛 지명이 ' 황산 '이라 한다.


신라는 많은 병력으로 밀어붙였다. 그러나 수적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백제는 신라군을 맞아 죽기 살기로 싸운 끝에 4번의 공격을 막아냈다.


당나라 장수인 소정방이 이끄는 군대와 합류하기로 (나. 당 연합군) 약속을 했는데 쉽게 이길 줄 알았던 황산벌에서 오랜 시간을 지체했기 때문에 김유신은 마음이 급해졌다.


뭔가 전세를 바꿀 전술이 필요했다. 젊은 화랑들이 앞서 나가 싸워 군대의 사기를 끌어올렸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장춘랑, 파랑이라는 화랑과 반굴 (김유신의 조카)등이 선두에 나가 치열하게 싸웠다고 한다. 그런데 이들의 이름이 낯설고 화랑 관창이 많이 알려진 이유는 무엇일까.. 


16세의 나이로 적진에 돌진해  사로 잡혔으나 계백은 어린 그를 돌려보냈다. 하지만 관창은 다시 한번 돌진해 결국 신라를 위한 희생정신을 보여줬다. 어린 화랑의 목이 말에 실려 돌아오는 모습을 본 신라군의 사기가 높아져 결국 황산벌 전투를 이겼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관창의 이야기다.


권 제47 열전 제7  >   관창(官昌)

  >   황산벌 전투에서 포로가 되다


황산(黃山) 벌에 이르러 양쪽의 군대가 서로 대치하였다. 아버지 품일이 이르기를,


“너는 비록 어린 나이지만, 뜻과 기개가 있으니 오늘이 바로 공명을 세워 부귀를 취할 수 있는 때이다. 어찌 용기가 없을 것인가?”라고 하였다.


관창이 “예.”하고는, 바로 말에 올라 창을 빗겨 들고 곧바로 적진을 공격하여 말을 달리면서 몇 사람을 죽였으나 상대편의 수가 많고 우리 편의 수가 적어서 적의 포로가 되었다.


여기서 잠깐 생각해 볼 여지의 문장이 있다. 맨 마지막 문장이다. 우리 편의 수가 적어서... 우리 관창이 단기필마로 적진에 뛰어들어 용맹함을 보여준 거라 알고 있다.


그러나 역사란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여러 관점의 여지를 남길 수 있다.


우리 편의 수가 적어서, 라는 말은 관창 혼자가 아닌 그를 따르는 소수의 병력이 있었다는 의미가 아닐까. 상상은 여러분의 자유에 맡긴다.


세 번째 매소성 전투는 신라와 당나라 간의 전투다.


매소성, 혹은 매초성의 정확한 위치에 대한 이견은 있으나 오늘날 연천 지역이라고 한다.


나. 당 연합으로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당은 나. 당 연합 당시 전쟁에서 승리를 하면 대동강 이남의 땅을 신라에게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당나라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오히려 당은 백제의 멸망 이후 공주에 웅진 도호부를,  고구려의 멸망 이후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두고 우리나라에 영향력을 행세하려 했다.


당연히 신라는 크게 반발했다. 나. 당 연합이 깨지고 매소성 전투가 일어났다. 이 전투의 결과는 신라의 대승이었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권 제7 신라본기 제7


설인귀가 천성을 치자 맞서 싸워 크게 이기다 ( 675년 09월(음) )


우리 장군인 문훈(文訓)등이 맞서 싸워 이겼는데, 1천4백 명의 목을 베고 병선(兵船) 40척을 빼앗았으며, 설인귀가 포위를 풀고 도망가자 전마(戰馬) 1천 필도 얻었다.


이근행이 매초성에 진을 치자 공격하여 내몰다 ( 675년 09월 29일(음) )


29일에 이근행(李謹行)이 군사 20만 명을 이끌고 매초성(買肖城)註 179에 진을 쳤다. 우리 군사가 공격하여 도망가게 하고는 전마(戰馬) 30,380 필을 얻었으며 남겨놓은 병기도 그 정도 되었다.


이때 당나라의 장군 설인귀가 보급품을 함선에 싣고 왔는데 신라가 보급로를 차단했다. 적 함선 40척과 말 1천 필에 추가로 30,380 필을 빼앗은 기록이 있다. 당은 그야말로 대패를 했다.


매소성 전투에서 대패를 한 당나라는 평양에 있던 안동도호부를 요동성으로 옮긴다. 본격적인 통일신라 시대가 열린다. 


다만 아쉬운 점은 대동강과 원산만 이남으로 국경선이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다음에 나오는 기벌포 전투와 함께 신라의 삼국통일은 자주적 통일이기도 하지만 외세의 (당) 힘을 빌린 한계 때문에 완전한 통일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매소성 전투 (675) 다음 해 벌어진 기벌포 전투 (676)는 신라 해군과 당나라 해군의 싸움이다.


기벌포는 지금의 금강하구, 충남 서천군 장항읍 인근을 말한다.

지도에서 보듯 기벌포는 서해를 남북으로 나눌 수 있고 통일신라 이전 백제의 수도 방어를 위한 중요 군사요충지였다.


매소성 전투에서 크게 패한 당나라는 설인귀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었다. 하지만 22번의 크고 작은 전투에서 신라가 이겼다. 결국 기벌포 전투를 끝으로 나. 당 전쟁은 종지부를 찍는다.


재밌는 사실이 있다. 설인귀는 안시성, 매소성, 기벌포 전투에 참전했다. 드라마 대조영에서 이덕화가 설인귀 장군 역할을 했다. 매소성 전투에서 패한 후 당으로 돌아가는 처참한 모습의 설인귀가 생각난다.

<마무리 글>


여러분이 이미 아시다시피 정답은 4번 황산벌 전투다. 말을 타고 적진을 향해 달리는 신라의 관창을 떠올려본다.


젊은 화랑의 용기가 한 나라의 패망 (백제)을 알리는 전초( 前哨 )를 만들었다.


* 참고자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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