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중기는 통일신라 초기 무열왕 (백제 멸망), 문무왕 (고구려 멸망, 삼국통일) 신문왕 (강력한 왕권으로 신라의 중흥기)으로 이어진다.
*바다 속의 암석에 묻힌 문무 대왕은 동해의 용이 되어 신라를 수호하겠다는 유언을 남겼다.
*만파식적의 설화에 의하면 용이 알려준 대로 신문왕이 피리를 만들어 부니 온 세상이 평온해졌다.
*감은사에는 바닷물이 들어왔으리라 추정되는 수로의 흔적이 있다. 동해의 용이 잠시 쉬어가라는 의미다.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서 >
한국사 공부를 할 때 흔히 신라는 상대, 중대, 하대의 세 시기로 나눠서 공부를 했습니다. 이는 곧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에서 이렇게 구분했기 때문인데요. 신라 왕실의 계보를 보면 제1대 박혁거세 (상) 제29대 무열왕 (중)제36대 혜공왕 (하)를 기점으로 나누게 됩니다.
이중 신라 중기가 시작되는 무열왕 (김춘추)는 성골 출신의 왕이 아닌 진골 출신, 최초의 왕이 되죠.아들인 문무왕이 삼국을 통일할 수 있도록 나. 당 연합을 통해 백제를 멸망시켰습니다.
문무왕은 고구려를 멸망시키며 삼국을 통일하고 그를 이은 신문왕이 나라를 잘 이끌 수 있도록 국가의 기반을 다져줍니다.
간단히 정리해볼까요. 신라를 상. 중. 하로 나누면 중기에 해당하는 무열왕 (김춘추), 문무왕 (통일신라), 신문왕 (강력한 왕권으로 신라의 중흥기를 이끔) 이런 흐름입니다.
삼국유사의 기록을 보면 문무왕은죽어서 조차 동해의 용이 되어 신라를 수호하겠다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실제로 통일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 그의 말대로 왜구의 피해를 거의 입지 않았다고 합니다.
신라의 29대왕인 문무왕이지만 통일신라, 1대 임금이기도 한 그에 대해 알아봅니다.또한 아버지를 위해 사찰을 완공한 신문왕도 살펴보지요.
벌써 지문에 정답이 나와있다. 이 사찰의 이름은 아버지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 감은 (感恩), 느낄 : 감에 은혜 : 은자. 은혜를 고맙게 여긴다는 뜻이다. 감은사는 경북 경주시에 있던 절로 문무왕 때 짓기 시작해서 아들인 신문왕 때 마무리됐다.
문무왕은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첫 번째 왕이다.그는 아버지 무열왕 (김춘추)과 어머니 문명왕후 (김유신의 누이)의 아들로 태어났다.당나라를 몰아내고 비록 완전한 통일은 아니었지만, (대동강 ~ 원산만 )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이룩한 왕이다.
55세 (626 ~ 681)로 짧은 생애를 살았고기록을 보면 신라를 위해 몸을 아끼지 않은 흔적이있다.
혼과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았고 관리와 백성에게 빚을 지지 않았다고 말할 만하다.스스로 여러 어려운 고생을 무릅쓰다가 마침내 고치기 어려운 병에 걸렸고, 정치와 교화에 근심하고 힘쓰느라고 다시 심한 병이 되었다.
- 권 제7 신라본기 제7 > 문무왕(文武王) -
몇 해 전 가족 여행을 경주로간 가족여행 중 문무대왕릉을 다녀온 적이 있다. 왕릉이 바다의 암석이라니 조금 의아해했지만 죽어서 까지 동해 바다에 묻혀 신라를 수호하고자 하는 그의 마음을 엿볼 수 있었다. 당시에 신라의 역대 왕들이 규모가 큰 고분을 만들었지만 문무왕은 동해바다에 묻혔다.
사실 이 암석이 문무대왕릉이라는 건 이견이 있다. 탐사보도를 다룬 방송에서도 추정만 할 뿐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문무왕의 유언이 기록을 근거로 동해에 묻힌 걸 추측할 수 있다.
죽고 나서 10일 뒤에 곧 고문(庫門) 바깥의 뜰에서 서국(西國)의 의식에 따라 화장(火葬)을 하라.
- 권 제7 신라본기 제7 > 문무왕, 삼국사기 -
대왕이 나라를 다스린 지 21년 만인 영륭(永隆) 2년 신사(辛巳)에 붕어하니, 유조를 따라 동해 중의 큰 바위에 장사 지냈다.
왕이 평소에 항상 지의 법사(智義法師)에게 이르기를 “짐은 죽은 뒤에 호국 대룡(護國大龍)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를 수호하고자 한다” 고 하였다.
법사가 말하기를, “용이란 축생보(畜生報)가 되는데 어찌합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나는 세상의 영화를 싫어한 지 오랜 지라, 만약 나쁜 응보를 받아 축생이 된다면 짐의 뜻에 합당하다.”라고 하였다.
- 기이 제2, 문무왕 법민, 삼국유사 -
문무왕을 이은 신문왕은 통일 후 불안정한 사회를 바로잡고 강력한 왕권강화를 이뤄 나라를 안정시켰다. 만파식적의 설화는 이 시기 통일 신라의 상황을 잘 알려준다. 만파식적은' 만개의 파도를 가라앉히는 피리 '를 뜻하며파도는 세상사의 고난을 의미한다.
기록에 의하면 682년 5월에 신문왕이 동해 바닷가에 갔다가 용 (아버지 문무왕)을 만나 대나무를 얻었는데 용이 말하기를 이걸로 피리를 만들어 불면 세상이 평온해 질거라 했다. 신문왕이 피리를 만들어 불어보니 신기하게도 물결치던 세상만사가 잠잠해졌다고 한다.
설화 속의 만파식적은 통일 후 귀족의 반란 등 혼란스러운 신라 내부의 분열을 통합하고 왕권 강화를 통한 사회 안정을 이루기위한 바램이라고 볼 수 있다.
<마무리 글>
감은사가 있던 터를 보면 물이 들어올 수 있도록 만든 수로의 흔적이 있다.
유언대로 동해의 용이 된 문무왕이 절에서 잠시 쉬어 가시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신라 시대에는 감은사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으리라 추정한다고 한다.
삼국을 통일하고 동해바다에 묻혀 신라를 수호하고자 했던 문무왕을 위해 신문왕이 완성한 감은사는 말 그대로 아버지에 대한 감사를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