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는 본래 속말말갈(粟末靺鞨)로서 고구려에 붙은 이들이며 성은 대 씨다. 고구려가 멸망하자 무리를 거느리고 읍루(挹婁)의 동모산을 차지했는데,
영토는 영주로부터 동쪽으로 2000리에 위치했고 남쪽으로 신라에 대하여 이하(泥河)를 경계로 하였으며, 동쪽은 먼바다, 서쪽은 거란이었다. 성곽을 쌓아 그곳에 살게 되자 고구려 유민이 점점 모여들었다.
- 신당서 권 219 열전 제114 북적 -
구당서 (舊唐書)란 (940 ~ 945년 동안 편찬) 중국 당나라 왕조의 정사(正史)를 쓴 역사책이고 신당서 (新唐書)는 (1044 ~ 1060년 동안 편찬) 송나라에서 쓴 당나라의 역사책이다.삼국사기나 삼국유사처럼 중국의 역사를 기록한 고서에 발해와 대조영이 언급되어 있다.
이 기록들에 의하면 고구려의 대조영이 말갈과 고구려 유민들을 모아 동모산에서 나라를 세웠음을 알 수 있다.
2021. 4.17 연합 뉴스의 기사에 의하면 중국이 동모산으로 추정되는 유적을 찾았다고 전한다. 이는 2020년 중국의 10대 고고학 발견에 포함되었는데 이 유적은 중국 지린성 투먼시에 있다.
중국 측은 동모산으로 추정되는 이전 발견 지역은 말갈족들이 주류를 이루고 살았으므로 발해는 중국의 역사라고 했지만 이번 새롭게 발견된 지역은 그 시대에 고구려 땅이었으므로 고구려 인이 발해를 세웠다는 걸 증명하게 됐다. 그동안 발해를 중국 역사에 편입하려 했던 중국 역사학계의 주장이 논리에 맞지 않아 고민하고 있다 한다.
이밖에도 삼국사기, 조선의 실학자 유득공의 발해고, 일본의 속일본기 등에서도 발해가 우리 역사임을 증명할 수 있는 기록들이 있다.
4번. 상경을 도읍으로 삼기도 하였다.
발해는 5경, 15부, 62주의 행정구역으로 나누어 국가 운영을 했다.이중 주요 지역인 5경은 중경을 중심으로 상경, 동경, 서경, 남경이다. 수도를 여러 번 옮겼는데 상경은 926년 멸망할 당시의 수도였다.
3번. 전성기에 해동성국이라 불렸다.
해동성국( 海東盛國 )이란 발해가 9세기 무렵 최고의 전성기를 이룬 무왕, 문왕, 선왕 시기를 중국에서 부른 이름이다. 뭔가 ' 넓고 큰 ' 이미지로 다가온다.
2번. 거란의 침입으로 멸망하였다.
미스터리 (mystery)란 이해할 수 없거나 설명되지 않는 사건을 말한다. 발해의 멸망이 그렇다.해동성국이라 불리며 전성기를 누리던 발해가 중국의 역사서에 의하면 개전 후 한 달도 되지 않아서 거란에 의해 함락되었다고 한다. 약간의 상상력을 동원해 추측해본다.
228년 동안 유지되었던 거대국이 어찌 한 순간에 멸망할 수 있었을까.. 필자는 2022년 01월 우리나라의 정치 상황을 빗대어 본다. 3월 09일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야당의 후보와 대표 간의 내홍이 극에 달한 뉴스가 연일 보도된다. 마침 발해에 관한 글을 써나가는 시점에서 정치적 혼란을 보고 있자니 떠오르는 생각이다.
' 그래, 발해도 저런 비슷한 내부 분열이 있지 않았을까.. 서로 자기모순에 빠진 사람들과의 다툼이 계속 이어졌고 이 틈을 타 기습전으로 발해를 공격한 거란이 일거에 수도를 점령했겠지.지리멸렬한 발해의 지도부는 도망가기에 바빴고 거란은 발해의 흔적을 모조리 불태워 버려 오늘날 전해지는 기록이 남을 수 없었겠지. '
단순한 필자의 생각일 뿐, 근거는 없다. 발해의 여러 가지 멸망 설중 백두산 분화에 의한 자연재해 때문이었다는 다큐멘터리가 있었다.KBS에서 제작한 이 방송은 백두산의 대폭발 시기와 발해 멸망과의 연관성을 화산재의 이동 등 과학적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발해는 926년에 멸망을 했고 946년 11월 즈음 하늘에서 하얀 재가 내려왔다는 일본의 기록과 갑자기 하늘이 무너지는 큰 소리가 개성에서 들렸다는 고려사의 기록이 있다. 더군다나 우리나라의 11월은 계절적 편서풍의 영향으로 발해의 수도 상경에 화산재로 인한 자연재해가 있었을 리 없다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
거란에 의해 발해가 멸망했다는 증거는 있다. 하지만 그 과정을 남긴 기록이 없으니 명쾌한 결론이 나지 않는다. 내부 분열에 의한 자중지란이 있었고 또 마침 그때를 틈탄 거란의 속전속결전술로 멸망했을 거라는 생각도 일리는 있지만 어떻게 가장 큰 영토를 확보한 전성기의 한 나라가 그렇게 쉽게 무너졌고 그 기록이 없다는 게 의문이 남는다.
1번. 화랑도라는 단체가 있었다.
화랑도가 신라의 조직이라는 건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상식이므로 넘어간다.
<마무리 글>
다음은 조선 정조 때의 학자 유득공이 남긴 그의 저서 ' 발해고 ' 의 전문이다.
고려가 발해사를 짓지 않았으니, 고려의 국력이 떨치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중략) 부여씨가 망하고 고씨가 망하자, 김 씨가 그 남쪽을 영유하였고 배 씨가 그 북쪽을 영유하여 발해라 하였다. 이것이 남북국이라 부르는 것으로 마땅히 남북 국사(南北國史)가 있어야 했음에도 고려가 이를 편찬하지 않은 것은 잘못된 일이다. 무릇 대씨는 누구인가? 바로 고구려 사람이다. 그가 소유한 땅은 누구의 땅인가? 바로 고구려 땅으로 동쪽과 서쪽과 북쪽을 개척하여 이보다 더 넓혔던 것이다.”
발해의 역사적 기록을 고려사에서 왜 다루지 않았는지에 대한 유득공의 아쉬움이 담겨있다. 고구려 사람들이 지배층을 이루고 말갈족이 피지배층이었다니 자부심을 가질 우리 발해의 역사였다.훗날 말갈족은 여진족, 후금을 거쳐 중국의 마지막 통일 왕조 청나라로 이어진다. 청나라를 세운 사람들의 조상이 말갈인 셈이다. 이 말갈족을 한때 우리 조상들이 지배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