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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세규 Jan 10. 2022

풍수지리로 살펴본 평양, 개성, 부여, 경주의 입지.

 초급 11번. 한국사 기출문제, 선죽교, 송상과 관련된 도시 개성

< 이런 분께 추천합니다.>


1. 역사에 대해 관심 있으신 분

2. 한국사 시험을 준비하시는 분

3. 누군가를 기다릴 때, 출. 퇴근 시간

지하철에서  잠깐, 부담 없이 읽을 글이

필요하신 분.


<이글에 나오는 내용 요약 >


*송상, 선죽교, 개성공단의 용어들을 간략히  알아본다.


*평양은 마치 배가 둥둥 떠다니는 모습의 지세를 갖고 있다. 배를 고정하기 위해선 닻이 필요하다. 실제로 평양 사람들은 닻을 땅속에 묻어 풍수지리설을 보완 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닻을 파내어 올리자 평양은 갑자기 자연재해로 피해를 입었다. 봉이 김선달이 평양에서 대동강의 물로 사기를 칠 수 있었던 이유가 있다.


*개성의 풍수 지세는 노서 하전형(老鼠下田形)이다. 이 형국은 늙은 쥐가 밭으로 내려간다는 뜻으로 부와 자손이 번창한다는 명당이라고 한다. 늙은 쥐와 밭이라..  (풍수에서 쥐는 재물, 다산, 풍요를 상징한다.) 


*부여에는 유명한 낙화암이 있다. 알뜰 신잡에서 작가 유시민은 낙화암의 궁녀 3000명은 가짜 뉴스라며 이의를 제기했다. 필자도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의 기록을 살펴봤지만 궁녀 3000명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경주는 침식분지로 가운데 넓고 비옥한 평야가 있고 도시 주위를 험난한 산들이 병풍처럼 드리우고 있다. 천년 신라의 수도가 한 번도 바뀌지 않은 이유다. 2016년 경주의 5.8 강진으로 첨성대가 약간 손상됐다.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서 >


풍수지리에 관련된 글이나 책들을 보면 흥미롭습니다. 미신이라 치부하기엔 너무도 구체적이고 설득력이 충분히 있습니다.


우리나라 풍수의 시조라 알려진 고려시대 도선 대사는 풍수를 우리 몸에 비유했다고 하지요. 아픈 몸에 혈맥을 찾아 침과 뜸을 놓으면 치유가 되듯이 땅도 역시 아픈 자리를 찾아 사찰을 지으면 나라가 번영한다고 했구요.


도선 대사가 전국에 500여 곳을 찾아 절을 지었는데 혹자는 그래서 고려왕조가 500년 (보다 정확히는 474년 ) 동안 유지되었던 게 아닌가 생각하기도 합니다.


평양, 개성, 부여, 경주 살아 있는 우리 역사를 증명하는 도시들은 역시 명당입니다.

우리의 역사 속에 등장하는 주요 도시 평양, 개성, 부여, 경주다. 선죽교와 송상을 잘 몰라도 남북이 함께 만든 개성 공단은 워낙 많이 알려져서 쉽게 풀 수 있는 문제라 생각한다.


송상, 선죽교, 개성공단의 용어들을 간략히 살펴본다.


송상 (松商)


다른 말로 개성상인 이라고도 한다. 개성은  옛 이름이 송악이라 이 지역을 중심으로 국제와 국내를 넘나들며 상업 활동을 했다. 이들은 국내의 주요 거점지역에 송방을 만들어 중국으로 인삼을 수출해서 막대한 부를 창출 했다.


선죽교 (善竹橋)


북한의 개성시 선죽동에 있는 고려시대의 돌다리를 말한다. 정몽주가 이방원에 의해 피살된 곳으로 유명하다. 과학적으론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아직도 그날의 흔이 남아 있다고 한다. 고려와 조선의 역사적 변환점이었을 만큼 정몽주의 죽음은 커다란 역사적 사건이다. 아마도 이런 심리로 인해 선죽교에 낭자했던 그의 피가 남아있으리라고 믿는 듯하다. 훗날 통일이 된다면 꼭 가보고 싶은 곳이다.


개성공단 (開城工團)


2000년 6·15 공동선언 이후에 추진된 남북교류의 일환으로 조성된 대규모 공단이다. 2004년 12월, 이곳에서 처음 제품(스테인리스 냄비 )이 생산되었다. ' 통일 냄비 ' 로 불렸던 이 남. 북 합작품은 서울로 가져오자마자 불티나게 팔렸다고 한다. 북한과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우여곡절이 많다.


다음으로 한반도의 주요 도시 특히 과거 우리 역사의 많은 일화를 고 있는 도시인 평양, 개성, 부여, 경주를 살펴보자. 각 도시별 위치와 지도, 풍수지리학적 관점, 역사적 사건 순으로 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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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平壤)


-  위치와 지도 -

- 풍수지리학적 관점 -


평양의 북쪽 지역은 산으로 둘러싸였고 삼면에 강물이 있어서 적의 공격으로부터 방어를 할 수 있는 최적의 자연 요새다. 이 때문에 예부터 평양은 한 국가의 수도로서 부족함이 없었다.


땅의 모양을 볼 때 행주형의 지세는 배가 둥둥 떠 나니는 모습을 말한다. 보통강과 대동강으로 둘러싸인 평양은 지도를 보면 이 모양이다.


재밌는 일화가 있다. 조선시대에 평양은 풍수지리에 따라 배의 형상이라 여겨 우물을 파면 배의 구멍을 뚫는 것과 같다고 여겼다. 우물을 파고 난 후 평양에 큰 화재가 나서 다시 메우기까지 했다고 이중환의 택리지는 전한다.


조선시대의 평양은 이런 풍수의 이유로 우물을 뚫지 않고 대동강 물을 길러서 먹었다. 소설속의 봉이 김선달이 희대의 사기를 쳐서 대동강 물을 팔아 먹을 수 있었던 건 이런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배가 떠나지 않고 정박하기 위해선 닻이 필요하다. 1998. 06.20 일 중앙일보 기사에 의하면 평양 사람들은 실제로 닻을 땅속에 묻어 풍수를 보완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은 이를 무시하고 닻을 건져 올렸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으나 1923년 평양에는 대홍수가 일어났다. 기겁을 한 주민들은 닻을 찾아서 다시 원위치로 돌려놓았다고도 한다.

- 역사적 사건 -


교과서에서 배운 대표적인 평양의 역사적 사건은 1136년 고려, 인종 때 일어난 ' 묘청의 난 '이다. 서경(평양의 고려시대 이름) 천도 운동을 벌였다. 풍수지리를 맹신한 묘청이라는 중이 수도를 개경에서 서경으로 옮겨야만 국가의 난관을 극복할 수 있다며 주장했다.


정치적으로 개경의 귀족 세력과 서경의 신진 세력과의 다툼이었다. 인종은 서경(평양)에 궁궐을 짓고 천도를 하려 했으나 서경으로 가는 도중 알 수 없는  자연재해가 일어나 수많은 사람들이 죽자 묘청의 서경 천도는 힘을 잃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었고 묘청은 서경에서 그를 따르는 무리와 함께 난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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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開城)


- 위치와 지도 -

- 풍수지리학적 관점 -


개성에는 오늘날 분단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남과 북이 함께 만든 개성공단이 있다. 지도에서 보듯 서울과는 지척이다. 고려시대의 수도로 옛 이름은 개경이었다. 이곳은 만월대가 있는 곳이었다.


만월대는 고려 태조 ~ 공민왕까지 왕들이 거처를 했던 곳으로 송악산 남쪽에 있는 궁궐터인데 풍수로는 노서 하전형(老鼠下田形)이라 한다. 좀 어렵지만 풀어보자. 이 형국은 늙은 쥐가 밭으로 내려간다는 뜻으로 부와 자손이 번창한다는 명당이라고 한다. 늙은 쥐와 밭이라..  (풍수에서 쥐는 재물, 다산, 풍요를 상징한다.)


그러나 개성에 있는 자남산(子南山)이 늙은 쥐의 새끼 모양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늙은 쥐가 노심초사할 수밖에 없었다. 도성이 안전하고 평온하려면  이를 보완하기 위해 자남산의 새끼 쥐를 꼼짝 못 하게 만들어야 했다. 이를 위해 고양이, 개, 범, 코끼리의 상징물을 만들어 균형을 맞추려 했다. (새끼 쥐는 고양이가 제압하고, 고양이는 개가, 개는 범이, 범은 코끼리가 견제를 하므로 ) 풍수 용어로 이를 '오수부동격’이라 한다.


오늘날 이 네 동물의 흔적을 찾아볼 수는 없지만 고려 왕조가 474년을 이어 온 것은 어쩌면 풍수의 역할이 한몫을 한지도 모를 일이다.



- 역사적 사건 -


벽란도는 예성강 하구에 있던 고려 시대의 국제 무역항이다. 예성강은 개경과도 가깝고 물이 깊어서 큰 배도 다닐 수 있었다. 중국의 송, 요 (거란), 금, 일본과 아리비아까지 세계 여러 나라와 무역을 했던 곳이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이름이 ' 코리아 ' 로 불린 건 이때 벽란도를 드나들던 여러 나라의 상인들이 고려의 발음을 코리아로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벽란도가 무역항으로 상업의 요충지였지만 육로가 발달하지 않았던 고려시대에는 전국에서 모은 세금이나 특산물 등을 바닷길로 옮겨 예성강 하구의 벽란도에 모아 수도인 개성 (개경)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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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 扶餘)


- 위치와 지도 -


- 풍수지리학적 관점 -


부여는 백제,  성왕 ~ 의자왕까지의 수도였다. 지도에서 보면 왼쪽 아래가 금강이다. 이 물길은  부여읍의 왼쪽 백마강으로 흐른다. 동서남북으로 볼 때 부여는 서, 남, 북이 강물로 둘러싸여 있다. 군사적으로 동쪽만 방어를 하면 적으로부터 안전한 자연 요새다.


풍수지리에서 물은 양 (陽 )의 기운이고 산은 음(  )의 기운이라 한다. 물은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흐르며 산은 한 곳에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또한 물은 재산을 의미한다. 명당으로 여기는 만곡수는 물길이 급하지 않고 완만하게 굽어 흐르는 물을 말한다. 또한 궁궁수는 갈지자 모양이나 활궁자로 흐르는 물인데 풍수에서는 제일 좋은 물이라 한다. 부여를 두르고 있는 완만한 곡선의 물길이 보인다.

- 역사적 사건 -


충남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에는 낙화암이 있다. 백제 의자왕 때 나. 당 연합군에 의해 함락되자 궁녀 3000명이 몸을 던져 강물에 빠져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이다.


다음은 삼국유사에 나온 기록이다.


권 제1  >   제1 기이(紀異第一)  >   태종 춘추공(太宗春秋公)  >   전하는 말에 의자왕과 후궁들이 떨어져 죽었다는 타사 암이 있지만 왕은 당에서 죽다.


백제고기(百濟古記)에 이르기를 “부여성(扶餘城) 북쪽 모서리에 큰 바위가 있는데, [바위의] 아래는 강물과 만난다. 서로 전하여 내려오기를 의자왕과 여러 후궁들이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서로 일컬어 말하기를 ‘차라리 자진을 할지언정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


하여 서로 이끌고 이곳에 이르러 강에 몸을 던져 죽었으므로 속칭 타사 암(墮死岩)이라 한다.”라고 했으나, 이것은 속설이 와전된 것이다. 다만 궁인들은 그곳에서 떨어져 죽었으나 의자왕이 당나라에서 죽었음은 당사(唐史)에 명백히 쓰여 있다.



낙화암(落花岩)이라고도 불리며, 충남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에 위치한 부소산 서쪽에 있는 절벽의 바위를 말한다. 현재 낙화암의 암벽에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필체로 보이는 ‘낙화암’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으며, 낙화암의 꼭대기에는 궁녀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하여 1929년에 세운 백화정(百花亭)이란 정자가 있다. 오세운, ≪부여의 누정≫, 부여문화원, 2000).


- 국사편찬 위원회 삼국유사 데이터 베이스 -


알뜰 신잡에서 작가 유시민은 낙화암의 궁녀 3000명은 가짜 뉴스라며 이의를 제기했다. 필자도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의 기록을 살펴봤지만 궁녀 3000명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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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慶州)


-  위치와 지도 -


- 풍수지리학적 관점 -


경주는 침식분지의 형세다. 침식분지란 가운데 평야를 중심으로 주변이 높고 낮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넓은 평지에 하천이 흐르고 외적의 침입을 효율적으로 방어할 수 있기 때문에 고대부터 사람들이 많이 사는 대도시로 발달했다.

서울, 대구, 광주나 세계적으로 파리, 런던 등이 이런 침식분지라고 한다.


경주의 지형은 지다산험 (地多山險)이다. 이 뜻은 산이 많고 험한 곳을 말한다. 작물이 잘 자라는 토지가 있고 주위가 병풍처럼 둘러싸여 한 나라의 수도로서 최적의 조건을 경주는 가지고 있다.


삼국중 신라는 1000년에 가까운 역사 동안 (992년) 나라의 수도를 한 번도 옮기지 않았다. 통일신라의 신문왕이 달구벌(대구)로 천도를 하려 했으나 귀족세력의 강한 반대와 재정부담에 부딪혀 실행하지 못했다.

- 역사적 사건 -


신라 1000년의 역사를 품은 경주는 불국사, 석굴암, 다보탑, 석가탑, 천마총 등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문화재가 있다. 워낙 중요한 역사적 가치가 있는 유물과 유적이 많기 때문에 오히려 오늘날의 경주는 잘 발달하지 못한 중. 소도시가 되었다.


경주의 문화재 중 첨성대는 삼국유사와 세종실록에 따르면 7세기 중반 (633년), 신라 선덕여왕 때 만들었다고 전한다. 쌓을 당시 원형의 모습 그대로 보존된 세계 유일의 천문 관측대다.


권 제1  >   제1 기이(紀異第一)  >   선덕왕 지기 삼사(善德王 知幾三事)  


별기(別記)에 이르기를 이 왕대에 돌을 다듬어 첨성대(瞻星臺)를 쌓았다고 한다.


하마터면 첨성대를 잃을 뻔한 사건이 2016년에 일어났다. 규모 5.8의 지진으로 첨성대 정자석(井字石)이 3.8센티 정도 북쪽으로 이동했지만 다행히도 더 이상의 피해는 없었다.


<마무리 글>


평양, 개성, 부여, 경주와 관련된 자료조사를 하면서 잘 몰랐던 각 도시들의 역사들을 만났다.


정착생활이 시작된 신석기시대 이후 물과 평야와 산은 도시로 발전하기 위한 필요조건이었다. 도시를 둘러싼 역사의 흐름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각도시마다 남겨진 역사의 흔적들은 조상들의 현재이었듯 어쩌면 우리의 현재는 미래에 보게 될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  참고자료 -


*국사편찬 위원회 기출문제

http://tok.historyexam.go.kr/mo/exam.html?grade=5&req=39&type=case

*국사편찬위원회 저작권 정책

*국사편찬위원회 교과서 용어해설 검색

*한국의 풍수

*중앙일보 기사

*삼국유사 데이터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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