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역사에 대해 관심 있으신 분 2. 한국사 시험을 준비하시는 분 3. 누군가를 기다릴 때, 출. 퇴근 시간 지하철에서 잠깐, 부담 없이 읽을 글이 필요하신 분.
<이글에 나오는 내용 요약 >
* 호패 ~ 주민등록증까지 우리나라 신분증의 변천사를 알아본다.
* 호패법이 제대로 실행되기까지는 여러 가지 부작용과 오랜 시간 동안 시행착오가 있었다.
* 주민등록법은 1968년 무장공비의 청와대 습격 사건 이후 급물살을 타게 된다.
* 노년의 한명회가 만든 오가작통법을 기준으로 만든 행정구역인 면(面)과 리(里)는 지금도 쓰인다.
* 우리나라 최초의 1호 주민번호를 발급받은 사람은 누굴까?
* 호적 제도는 언제부터 있었던 것일까?
* 코로나 예방 접종 증명서를 발급받기 위해 공공기관 사이트에 접속했더니 카카오톡으로도 신분을 증명할 수 있었다.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서 >
중앙에서 병사를 징병하거나 궁궐 또는 성을 보수, 쌓을 때 건장한 남자들이 필요합니다. 어느 마을에 누가 살고 있는지를 알아야 인력을 모을 수 있겠죠. 호패는 적재적소에 필요한 인원을 알 수 있는 방법이었을 겁니다.
호패는 조선시대에 16세 이상의 남자들에게만 소지하도록 했지요. 태종 때 시행했던 호패법은 조선 중기 영조 시기에 이르러 그나마 강제적으로 자리를 잡습니다.
호패와 주민등록증은 자신이 누군가를 증명하기 위해 만든 신분증으로 똑같은 기능을 하고 있네요.
언제 시작해서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우리나라 신분증의 변천사를 알아보겠습니다.
호패(號牌), 일단 한자어부터 살펴보자.
號 이름 : 호 >>
본 이름이나 자(字) 외(外)에 허물없이 쓰기 위(爲) 하여 지은 이름.
牌 패 : 패 >>
이름ㆍ특징(特徵) 등(等)을 알릴 목적(目的)으로) 글씨를 쓰거나 어떤 표식을 한 작은 나무나 종이.
어떤 사실을 조리 있게 설명하기 위해선 육하원칙이 효율적이다. 호패와 호패법을 이 기준에 따라 서술해 본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 누가 >
원나라에서 시행한 호패 제도를 모방해서 고려의 공민왕이 병사들에게만 처음 시도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태조(이성계)에게 호패법을 만들어 실시하고자 건의했으나 무산되고 태종(이방원)이 본격적으로 실행했다.
< 언제 >
의정부에서 사람마다 호패(號牌)를 주고, 인하여 호구(戶口)를 성적(成籍) 하기를 청하니, 윤허하였다. 그 법은 한결같이 무인년의 수교(受敎)에 의하여 시행하였다.
- 태종 2년 8월 2일 (1402년 ) -
< 어디서 >
고려에서 처음 시도했으나 잘 안됐고 조선시대에 들어와 백성들에게 적용했다.
< 무엇을 >
16세 이상의 남자들에게 호패를 만들어 소지하게 했다.
< 어떻게 >
호패의 재료는 신분마다 달랐다. 양반 계층은 상아, 동물의 뿔, 회양목 등으로 만들었고 신분이 낮을수록 자작나무 등 흔히 볼 수 있는 잡목이 쓰였다.
상류층은 이름만 적었고 아래로 내려갈수록 성명, 거주지 등 자세한 정보를 적어야 했다. 심지어 노비의 호패는 크기도 남달랐다. 도망갈 것을 염려해 주인이 누구이며, 키, 수염, 얼굴의 특징 같은 세세한 부분까지 기록했다.
< 왜 >
여러분이 짐작하셨다시피 국가가 남성들에게만 호패를 착용하라고 강제적으로 명령한 건 전쟁을 대비할 병사들을 모집하기 위해서이고 각종 국역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호패법이 제대로 실행되기까지는 여러 가지 부작용과 오랜 시간 동안 시행착오가 있었다. 국역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양반의 노비로 들어가는 양인들도 있었고 불법적인 거래 등으로 사회적 혼란이 심하게 일어났다.
언제든 군대에 끌려가거나 각종 국가를 위한 노역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기 때문에 백성들은 호패법을 잘 따르지않았다.
결국, 조선 후기 영조 때 법전인 속대전(續大典)의 기록을 보면 호패를 소지하지 않았을 때는 곤장 50대, 빌려 준다는 곤장 100대에 3년간 중노동을, 또한 호패를 위조하거나 훔친 사람은 사형을 시킬 정도로 강력하게 호패법을 시행했다.
조선시대의 호패는 오늘날의 주민등록증처럼 16세 이상 남자들의 신분을 증명해 주는 역할을 했다.
우리나라 신분증 역사의 흐름을 살펴보자.
조선시대 > 16세 이상의 남자들에게 군역과 각종 조세를 확보하기 위해 호패법을 실시했다.
1950년 ~ 1962년 > 6.25 전쟁 이후 간첩 식별을 위해 도민증을 발급했다. 공산주의자로 몰리지 않기 위해서는 도민증을 꼭 지참해야 했다.
1962년 ~ 현재 > 주민등록법이 1962년 5월 10일 법률 제1067호로 제정된 후 별다른 변화는 없었지만 1968년 무장공비의 청와대 습격 사건 이후 급물살을 타게 된다.
이때 생포 된 공비가 김신조 씨다. 당당하게 박정희 대통령을 죽이러 왔다고 하니 온 국민들은 충격에 빠졌다. 그 사건이 1968년 1월 21일에 일어났고 두려운 사회 분위기에 편승해 11월 21부터 주민등록 발급이 새롭게 개정되고 활성화됐다.
주민등록증은 간첩 색출과 주민들 간의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를 용이하게 했다.
조선시대에도 이와 비슷한 관리 방법이 있었다. 호패의 보완책으로 오가작통법이 있었다. 세조의 책사로 유명한 한명회가 노년에 만들었다. 5집을 1통으로 묶어서 호구, 세금, 부역, 범죄자 색출 등을 쉽게 관리하는 제도다. 5통을 1리로 잡았다. 이걸 기준으로 만들어진 행정 구역이 면(面)과 리(里)다. 그때 만들어진 것이 지금까지도 쓰인다.
우리나라에서 주민등록증을 처음 발급받은 사람은 누굴까? 박정희 대통령이다. 부인 육영수 여사는 두 번째로 발급받았다. 1968년도에 발급되었던 주민번호는 12자리였다. 다음은 실제 박정희 대통령의 주민번호다.
* 110101-100001 *
앞에서부터 11은 지역 (서울), 01은 종로구, 01은 청와대를 나타내고 뒤 6자리는 개인번호였다.
- 우리나라 1호, 주민등록증 / 국가 기록원 -
1975년부터 주민번호는 13자리로 바뀌고 앞 6자리는 생년월일을 나타냈다. 경찰관이 불심검문 시 신분증을 보여달라고 하면 반드시 보여 줘야 한다는 규정도 이때 생겼다.
주민등록증이 지금처럼 플라스틱으로 발급된 건 1999년부터다. 처음엔 종이로 만들었는데 그 위에 코팅을 한 주민증록증이었다.
<마무리 글>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다. 호패법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시행과 중단을 반복하며 자리 잡는 데 오랜 세월이 걸렸다.
호패는 16세 이상의 남자들에게만 발급됐다. 그러면 여자들과 어린아이들은 어떤 방법으로 관리를 했을까..
오늘날은 통신이 발달해서 중앙의 행정력이 지방까지 신속하게 전달되지만 조선시대는 말단까지 통제하는데 어려움이 많았을 텐데 말이다.
조선시대 이전인 고대 국가에서부터 호적 (戶籍) 제도가 있었다. 695년경에 쓴 걸로 추정되는 신라의 장적이 발견되었는데 여기에 4개 촌락의 사람, 말, 소, 토지, 나무 등의 수가 기록되어 있었다고 한다.
호적이란 건 일종의 장부를 만드는 거다. 조선시대에는 호적을 만들기 위해 호구조사를 3년에 한 번씩 했다. 호주를 중심으로 식구들의 나이, 조상, 이름 등을 상세히 기록했다.
지금은 전산화가 이뤄졌지만 필자가 어렸을 때만 해도 동사무소에 호적 장부가 있었다. 호적의 기원을 따지고 보니 수천 년 전부터 시행했던 제도였다.
호패에서 주민등록증까지 신분증은 시대마다 그 쓰임새가 달랐다. 오늘날은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다양하다. 여권, 운전면허증, 공인 인증서, 지문, 홍채 등에 이어 최근엔 큐알 코드로도 증명할 수 있다. 심지어 코로나 예방접종 증명서를 출력할 때 신분을 증명하기 위해서 카카오톡을 써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