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임작가 Feb 13. 2022

100% 수신료 완납을 기록 한 드라마 주인공의 '허준

초급 22번. 한국사 기출문제, 허준 동의보감


*다양한 주제의 한국사 속, 숨은 이야기들을 쓰고 있습니다. 지식과 정보, 두 마리 토끼를 잡으셔요. *


< 이런 분께 추천합니다.>


1. 역사에 대해 관심 있으신 분
2. 한국사 시험을 준비하시는 분
3. 누군가를 기다릴 때, 출. 퇴근 시간
지하철에서  잠깐, 부담 없이 읽을 글이
필요하신 분.

<이글에 나오는 내용 요약 >

*민통선 이북 지역 허준의 묘가 1991년 훼손이 너무 심한 채로 발견됐다.

*MBC 드라마 허준이 방영된 기간에  TV수신료 납부율이 100%였다고 한다.

*허준은 현재 기준으로 서울 사람이었다. 그가 태어난 곳은 서울시 강서구 등촌2동이다.

*서자였던 허준은 원래 관직에 나갈 수 없었으나 그가 10살 무렵 과거시험 제도가 바뀌고 서자에 대한 차별이 완화되기 시작했다.

*허준은 침술보다 제서(諸書)에 통달했다는 기록이 있다. 의학과 약재가 전문 분야였음이 추정된다.

*한문으로 된 의학용어로 해석이 어려운 동의보감을 조지훈 시인의 아버지 조헌영 박사가 국역본으로 번역을 했다.

*한의학 연구원이 한의학 고전 DB를 만들어 동의보감뿐 아니라 고전 의학 서적을 누구나 쉽게 공부할 수 있게 했다.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서 >

다음은 2007.03.30 경향 신문 기사 내용입니다.

서지학자 이양재 씨가 1991년,
한국전쟁 이후 실전(失傳)된 허준의 묘를 찾았는데 도굴꾼들에 의해 심하게 훼손된 채로 발견됐지요.

땅속에서 묘의 주인이 허준임을 증명하는 비석이 두 동강 난 채로 나왔습니다.
그는 비석에서 ‘陽平○ ○聖功臣 ○浚’란 글자를 봤습니다. ‘양평군 호성공신 허준’을 뜻하는 겁니다.

허준의 묘는 민통선 이북지역에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에 의하면 황해도 해주의 대거면에 살았던 허준의 후손들은 1947년까지 그의 묘를 찾아와 제사를 지냈다고 합니다. 6.25 전쟁 이후 38선으로 남북 분단이 되고 민통선이 되니 아마도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겠지요.

1610년 (광해군 2년 )에 동의보감이 완성된 이후 중국 사신들이 우리나라에 오면 다른 건 제쳐두고 동의보감 목판본을 우선 챙겨갔다고 합니다.

허준 하면 딱 떠오르는 게 뭘까? 글쎄... 우선 의학서인 동의보감이 떠오른다. 음..  그다음으로 생각나는 건 전광렬? 2000년작 MBC 드라마 ' 허준 ' 이 워낙 인기가 많았던 터라 22년이 지났어도 머릿속에 각인된 듯하다.

당시 허준의 시청률이 64.8%로 사극 드라마에서 엄청난 기록을 남겼다. 월, 화 드라마로 64부작이었다. 항상 끝날 때 뭔가 여운을 남겨 다음 회차를 기다리게 하는 묘한 중독성을 가지고 있었다.

재밌는 건 허준이 방영될 때 화면 하단에 6개월 이상 수신료를 납부하지 않은 가정은
TV 수신을 중단하겠다는 문구를 내보내자 TV 수신료 납부율이 100%에 달했다는 설이 있다. 그만큼 드라마 허준은 온 국민의 사랑을 받았다.( 40대 이상이라면 격한 공감을 하실 듯.. )

이 드라마의 원작은 소설 동의보감 ( 이은성 작)이라 한다. 개연성을 바탕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과 다른 부분도 많다.

조선시대의 의학자 허준(許浚)을 간단히 알아보자.

76세의 생을 살았던 허준은 당시 기준으로 장수를 했다.

그는 조선 시대 주소로 경기도 양천현 파릉리에서 태어났고 이곳은 오늘날
서울시 강서구 등촌2동을 말한다.

드라마의 허준은 신분이 미천한 사람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실제 허준은 비록 서자였지만 어렸을 때부터 양질의 교육을 받지 않았나 추정된다. 마침 그에게 운도 따라줘 10살 될 무렵 과거 제도가 바뀐다. 원래 서자나 얼자, 둘 다 과거시험을 볼 수 없었는데 서자는 허용이 된다.

여기서 잠깐, 조선시대의 서얼은 양반의 자식 가운데 첩의 소생을 말한다. 첩이란 정실부인 이외의 혼외자를 말하는데,

서자는 양인(良人) 첩의 자손을 서얼은  천인(賤人) 첩의 자손이다. 즉, 어머니의 신분에 따라 과거를 볼 수 있게끔 제도가 바뀐 거다. 허준의 어머니는 양인이었다.

허준이 보건복지부에 해당하는 내의원에 들어갈 수 있었던 2가지 기록이 있다. 첫 번째는 고위 관료의 천거에 해서고 두 번째는 의과에 과거급제를 한 후였다고 한다.


천거는 쉽게 말하자면 소개, 추천을 말한다. 시험을 보지 않고 서자 신분에 정부 기관에 들어갔다는 건 집안 배경도 튼튼하고 실력도 갖춰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과거급제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객관적인 평가 이므로 의술에 뛰어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거다.

그가 어떻게 의술을 배우고 공부했는지 알려진 바는 없으니 둘 중 어느 쪽이 맞는지 확인할 길은 없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겪는 국가적인 혼란과 유배에 굴하지 않고 선조의 명을 받은 동의보감 편찬을 마무리했다는 건 대단한 일임은 틀림없다.

광해군일기[중초본] 32권, 광해 2년 8월 6일 무인 3번째 기사 1610년

전교하기를,

"양평군(陽平君) 허준(許浚)은 일찍이 선조(先朝) 때 의방(醫方)을 찬집(撰集)하라는 명을 특별히 받들고 몇 년 동안 자료를 수집하였는데,


심지어는 유배되어 옮겨 다니고 유리(流離)하는 가운데서도 그 일을 쉬지 않고 하여 이제 비로소 책으로 엮어 올렸다.


이어 생각건대, 선왕께서 찬집 하라고 명하신 책이 과인이 계승한 뒤에 완성을 보게 되었으니, 내가 비감한 마음을 금치 못하겠다.


허준에게 숙마(熟馬) 1 필을 직접 주어 그 공에 보답하고, 이 방서(方書)를 내의원으로 하여금 국(局)을 설치해 속히 인출(印出)케 한 다음 중외에 널리 배포토록 하라."


허준 혼자서 동의보감을 썼을 리는 없다.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를 도와서 함께  동의보감을 완성한 많은 의학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허준은 침술에 능한 것처럼 드라마에서 나오지만 실록의 기록에서 선조와 허준의 대화를 보면 그가 침술보다 의학과 약재술에 뛰어난 실력이 있었음이 보인다. 허준에게 의학서 편찬을 하라고 선조가 명한 이유가 아닐까...


선조실록 178권, 선조 37년 9월 23일 경오 4번째 기사 1604년


편두통의 발작으로 침을 맞다


이르기를,

"침을 놓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허준(許浚)이 아뢰기를,

"증세가 긴급하니 상례에 구애받을 수는 없습니다.


여러 차례 침을 맞으시는 것이 미안한 듯하기는 합니다마는, 침의(針醫)들은 항상 말하기를 ‘반드시 침을 놓아 열기(熱氣)를 해소시킨 다음에야 통증이 감소된다.’고 합니다.


소신(小臣)은 침놓는 법을 알지 못합니다마는 그들의 말이 이러하기 때문에 아뢰는 것입니다.


 허임도 평소에 말하기를 ‘경맥(經脈)을 이끌어낸 뒤에 아시혈(阿是穴)에 침을 놓을 수 있다.’고 했는데, 이 말이 일리가 있는 듯합니다."


선조실록 176권, 선조 37년 7월 2일 신해 2번째 기사 1604년 명 만력(萬曆) 32년


상의 지병인 인후증과 실음증의 치료를 위해 의술에 능한 사람들의 서계를 받도록 하다


약을 쓰는 것은 군사를 쓰는 것과 같은데 어찌 전의 소견을 굳이 지킬 필요가 있겠는가. 의관들과 다시 더 상의하도록 하라.


허준(許浚)의 경우는 제서(諸書)에 널리 통달하여 약을 쓰는 데에 노련하고,


이명원(李命源)도 노숙한 의관이므로 범상한 솜씨가 아닐 듯한데, 이들이 어찌 감히 망령되이 생각했겠는가."


임진왜란 (1592 ~  1598   )과 같은 국난을 치른 조선의 백성들에게 동의보감(1610년)은 어쩌면 하늘이 내린 동아줄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나라에서 구할 수 있는 약초들뿐 아니라 여러 가지 병들에 대해 임상을 통한 구체적인 처방법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마무리 글>


어려운 의학용어와 한문으로 쓴 동의보감을 누구나 이해하기 쉽게 다시 한글로 번역한 많은 사람들의 노력도 있었다.

 

철학자인 도올 김용옥의 저서 < 너와 나의 한의학>에 의하면 동의보감을 최초로 번역한 사람은 허민 (許珉)이었다고 한다.


시인 조지훈의 아버지이자 한의학 박사인 조헌영의 주도로 어렵고 난해한 동의보감을 국역본으로 출간하기도 했다.


현재는 한국 한의학 연구원이 한의학 DB를 만들어 동의보감뿐만 아니라 고전 의학 서적을 번역해서 원문, 국역, 영문으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저서의 일부 내용은 현실과 맞지 않아 재해석이 필요한 부분의 한계점을 지적하기도 하지만 백성들을 위한 애민정신이 담긴 동의보감은 의학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때 수많은 대중들의 치료와 건강에 큰 기여를 했다.


- 참고 자료 -


*국사 편찬 위원회 기출문제

http://tok.historyexam.go.kr/mo/exam.html?grade=5&req=39&type=case

*표준국어대사전


*한의학 고전 DB

https://mediclassics.kr/

*파주 진동 허준의 묘/ 경향신문

https://m.khan.co.kr/article/200703301508551#c2b

*조선왕조 실록 데이터베이스

http://sillok.history.go.kr/main/main.do;jsessionid=7CBB4C6842B78B0A53A28FDDC7753912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 신분증(호패 ~ 카카오톡 )의 역사를 알아볼께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