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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작가 Mar 24. 2022

행주치마는 행주 대첩과 관련이 없군요.

초급 26번 기출문제. 우산국, 징비록, 귀주, 행주, 청산리 대첩

[이 글에 나오는 내용 ]


* 독도는 우리 땅에서 나오는 신라의 이사부 장군이 우산국을 정벌한 과정.


* 귀주 대첩도 물살로 적을 물리친 케이스다.


* 행주 대첩과 행주치마의 유래는 관련이 없다.


* 김좌진, 홍범도 장군이 이끌었던 청산리 전투의 배경


[  26번 기출문제 ]

밑줄 그은 이 전쟁에서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은?

여기는 옥연정사입니다. 유성룡은 이 전쟁에서 드러난 문제점을 반성하고 훗날을 대비하기 위하여 이곳에서 징비록을 썼습니다.

1.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벌하였다.
2. 강감찬이 귀주에서 거란을 물리쳤다.
3. 권율이 행주산성에서 크게 승리하였다.
4. 김좌진이 청산리에서 일본군을
격퇴하였다.

[ 쉽고 재밌는 해설 ]

- 징비록 -

유성룡이 쓴 징비록은 일종의 국방백서다. 임진왜란 당시 전쟁 상황과 백성들의 처참했던 삶을 기록한 책이다.

도제찰사는 전쟁 중 임시로 맡은 군 최고 관리직을 말한다. 유성용은 영의정과 더불어 이 관직을 수행했다. 높은 관직에 있었으므로 군사작전이나 정황들을 세세히 기록으로 남길 수 있었다.

전쟁을 겪고 난 후 반성하고자 하는 뜻으로 유성룡은 징비록을 썼다. 난중일기와 함께 임진왜란 동안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오늘날 우리가 알 수 있는 소중한 자료다.

징비록은 KBS 드라마로도 제작됐다. 선조 역은 김태우, 유성룡 역은 김상중이 맡았다. 선조의 임금답지 않은 일화들을 보면서 배우 김태우가 얼마나 얄밉고 미워지던지 그가 들으면 조금 억울할 수도 있겠다.

징비록은 객관적 시선으로 임진왜란의 전후 사정을 담았다고 하지만 유성룡 스스로의 과오는 기록하지 않았다는 한계점도 있다고 한다.


- 행주대첩 -

행주대첩은 한산도, 진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중 일어난 전쟁이다. 1593년 음력 2월 12일에 발발했다. 하루 동안 일어난 전투다.

조선에서 명나라의 군대와 일본 간의 충돌이 일어난다. 함경도까지 치고 올라간 일본을 명나라는 가만히 둘 수 없었다. ( 마치 6.25 전쟁에서 1.4 후퇴를 연상시킨다.) 오늘날 고양시 벽제관에서 남하하는 명군과 일본군의 전투에서 일본이 대승을 했다.

이로써 남하하는 명군은 멈췄고 일본군의 사기는 충천했다. 이때 권율 장군이 지휘하는 조선군이 행주산성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이를 안 일본은 3만의 병력으로 2800여 명인 조선군을 공격했다.

공격과 방어의 치열한 공방전이었다. 일본은 무려 조선군의 10배가 넘는 인해 전술로 행주산성을 공격했다. 조선군에게 위기도 있었지만 결사항전 끝에 결국  일본은 막대한 피해를 입은 채 돌아가야 했다.

이 과정에서 열세에 놓인 조선의 백성들이 치마로 돌을 날라 조선군을 도왔다 는 데서 유래한 것이 행주치마라고 한다. 그런데 이 사실은 야사에서 전해질뿐이다.

학창 시절 ' 행주치마 ' 가 행주대첩과 관련이 있다고 책에서 읽은 것 같기도 하다. 보다 정확한 사실은 행주대첩 (1593)이 일어나기 전 1517년 사성 통해와 1527년 훈몽자회에서 이미 행주치마에 대한 기록이 있으니 행주산성에서 행주치마가 유래했다는 건 틀린 말이다.

행주치마에서 ' 행주 ' 는 부엌일을 할 때 겉옷 앞에 두른 천을 의미하고 행주대첩의 행주는 幸 다행 행, 州 고을 : 주, 자로 지명을 말한다.

- 우산국 정벌 -

우산국은 삼국시대 울릉도에 있었던 작은 나라다. 독도는 우리 땅이란 노래에 가사로 나온다. 울릉도 동남쪽 뱃길 따라 200리 외로운 섬 하나 새들의 고향~
지증왕 13년 섬나라 우산국 세종실록 지리지 50쪽에 셋째 줄 신라장군 이사부 지하에서 웃는다~

여기에서 이사부란 우산국을 정벌한 신라의 장수다. 지증왕은 이사부에게 오늘날 삼척의 군주로 삼고 우산국 정벌을 명한다.

우산국 (울릉도 ) 사람들은 오랜 세월 동안 파도와 물살 때문에 접근하기 힘든 섬에 살면서 독립국가를 유지했으나 결국 이사부에게 항복을 했다.

우산국 사람들은 육지의 외부 환경과 고립된 문화였으니 이사부는 이를 이용해 나무로 만든 사자를 많이 만들어 배에 싣고 가서 위협을 했다. 겁을 먹은 사람들은 싸워 보지도 않고 항복했다고 한다.

신라 장군 이사부는 금관가야와 대가야를 멸망시키기도 했다.

- 귀주대첩 -

1019년 고려와 거란군 간 대규모 병력의 싸움이다. 고려군 약 21만과 거란군 10만 명이 혈투를 벌였다고 하니 벌써부터 머릿속에 전투 상황이 그려진다.

살수대첩 (을지문덕), 한산도 대첩 (이순신), 귀주대첩 (강감찬) 은 한국의 3대 대첩이다.

고려는 거란과 3번의 전쟁을 하는데 귀주대첩이 세 번째다. 자료 조사를 하면서 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귀주 대첩이 일어난 곳은 흥화진 또는 삼교천 전투라 설명되고 있는데 정작 귀주의 위치는 좀 더 동쪽으로 있기 때문이다. 귀주대첩이라 불리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

지도로 보면 피현군(왼쪽 빨간색) 쪽으로 삼교천이 흐른다. 압록강의 제1 지류로 큰 하천이다. 강감찬 장군은 삼교천을 막아 수심을 얕게 만들어 거란군이 건너갈 때 둑을 터트렸다. 일시에 밀려오는 물로 적들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 공격을 했다. 아무리 얕은 물이라도 갑자기 밀려오는 세찬 물줄기에 거란군은 속수무책이었다.

- 청산리 전투 -

1920년 10월 21일 ~ 10월 26일에  김좌진 (북로군정서군)과 홍범도 (대한 독립군)가 연합, 일본군과 벌어진 전투에서 큰 승을 거뒀다.

청산리 전투의 배경을 큰 흐름으로 살펴보자.

1919. 3. 1 운동 이후 압록강과 두만강의 국경지역 중심으로 독립군이 활발히 움직였다.

이 지역은 간도라 불린다. 일본은 군대를 보내 간도의 독립군을 토벌하려 했지만 중국 땅이라 함부로 할 수 없었다.


명분이 필요했으니까 일본은 훈춘사건을 일으킨다. 이 사건은 일본이 훈춘에 있는 중국의 마적에게 돈을 주고는 일본 영사관을 습격하도록 만든 사건이다.


중국이 일본을 공격한 거나 마찬가지니 일본은 대규모 군대를 간도 지역에 보내 한인들과 독립군을 쫓았다. 중국은 자기 땅에 일본군들이 들어와 심기가 불편했다. 이에 우리 독립군들에게 근거지 이동을 요구했다.


독립군은 주 활동 지대인 북간도 (백두산을 중심으로 동쪽 지역)를 떠나 더욱 삼림이 험한지대로 옮겼다.


일본은 독립군을 잡으려 1920년 10월 20일 토벌작전을 시작했다. 마침내 김좌진과 홍범도가 이끄는 독립군과 일본이 한판 붙어 6일간 (21일 ~ 26일)의 전투가 일어났다. 10여 차례 공방이 오고 갔으나 일본은 우리 독립군에게 대패를 당했다.


이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지역이 다음 지도에서 보듯 청산리다.

유성룡이 쓴 징비록은 임진왜란의 반성문이다. 권율이 행주산성에서 일본군을 대파 한 건 임진왜란이므로 정답은 3번이다.


- 참고 자료 -

* 국사편찬 위원회 기출문제
* 표준국어대사전, 두산백과

*YTN 사이언스

https://m.science.ytn.co.kr/view_hotclip.php?s_mcd=1274&s_hcd=&key=201802211311496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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