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목 : 사적 제121호 * 소재지 : 서울 종로구 * 시대 : 조선시대 * 개요 : (가)
(가)에 들어갈 내용으로 옳은 것은?
1. 명성왕후가 시해된 곳이다. 2.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게 항복했던 곳이다. 3. 땅의 신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4.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셔 놓은 곳이다.
[ 쉽고 재밌는 해설 ]
< 사직단 >
사직( 社稷)의 한자를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社 > 토지신 稷 > 곡신(穀神: 오곡의 신)
즉, 사직단 (社稷壇) 은 임금이 토신(土神)인 사(社)와 곡신(穀神)인 직(稷)에게 제사 지내던 제단을 말한다.
사직은 또 다른 의미로 나라와 조정을 말하기도 한다. 역사 드라마를 보다가 흔히 듣게 되는 왕을 향한 신하의 말이 있다.
" 전하 ~ 종묘와 사직을 지키셔야 하옵니다. 종묘와 사직이 위태롭사 옵니다. "
이 말의 사직이 여기에 해당된다. 나라가 위태롭다는 뜻이다.
지도에서 보듯 중앙의 경복궁을 기준으로 서쪽이 사직단, 동쪽이 종묘가 있는 곳이다.
사직단은 우리 역사 속에서 2번이나 일본에 의해서 수난을 겪었다. 임진왜란 때는 불에 탔고 일제 강점기 시기에는 일본이 사직단의 격을 낮춰 공원으로 만들었다.
이후 사직단은 오랜 시간 동안 문화재로서 관심이 소원해져 있었으나 현재 문화재청 중장기 발전방안 발표에 의하면 사직단을 2027년까지 복원한다고 한다.
프로야구를 시청할 때 야구 중계 아나운서가 자주 했던 말이 있다.
" 여기는 사직구장입니다. "
부산의 사직동에 있는 야구장을 말하는 거다. 1986년부터 롳데 자이언츠의 홈구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사직동은 사직단에서 유래했다.
사직단은 서울뿐만 아니라 전국 주요 도시에도 있다.
< 종묘 >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셔 놓은 곳이다.
신주란 죽은 사람의 이름과 날짜를 적은 나무 패를 말한다. 죽은 이의 혼이 들어가 있다고 생각하며 가례에 따르면 4대손까지 신주를 사당에 모시다가 산소에 묻는다고 한다.
신주와 비슷한 위패가 있다. 위패 역시 죽은 사람의 인적사항을 기록하고 혼이 들어가 있다고 생각한다. 죽은 사람의 혼을 모시는 건 똑같지만 신주와 위패는 다르다.
신주 : 하나만 존재, 죽은 사람에 대해 구체적으로 적어 사당에 모셨다.
위패 : 여러 개가 존재, 간략한 글만 적어 향교나 서원 등에 모셨다.
다른 또 하나 신위가 있다. 신위는 죽은 사람의 영혼이 의지할 자리를 말한다. 예를 들어 죽은 사람의 사진, 지방(紙榜) 등을 말한다.
종묘는 조선의 창업주 이성계가 궁궐보다 먼저 만들었다. 지금 현존하는 신주는 모두 진품인데 임진왜란 때 선조가 제일 먼저 챙겼기 때문이다.
종묘를 둘러보다가 고개를 갸우뚱했을 수 있다. 그 이유는 공민왕 신당이 있기 때문이다. 실질적인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민왕을 왜 조선에서 신당까지 만들어 모시고 있었을까..
공민왕 시절 이성계와 그의 아버지 이자춘은 역사에 등장한다. 무명이었던 이성계가 정계로 진출할 수 있었음은 공민왕이 그에게 홍건적과 왜구를 토벌할 기회를 주었기 때문이 아닌가.
물론 뛰어난 명장이었던 이성계의 실력이 있었지만 말이다. 전설에 의하면 종묘를 지을 당시에 돌풍이 불어 공민왕과 노국공주를 그린 그림이 떨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떠도는 이야기일 뿐, 이성계는 공민왕에 대해 측은지심과 더불어 고려 멸망 때문에 불안한 민심을 달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추측해본다.
<경복궁>
명성황후가 시해된 곳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경복궁 내의 또 다른 작은 궁궐 건청궁 내에 있는 옥호루다.
건청궁은 임진왜란 이후 경복궁을 다시 짓고 (고종 10년 ) 5년 후에 만들었다. 경복궁 북쪽 끝에 가장한 적한 곳에 담장은 꽃무늬 벽돌로 쌓았고 궁 앞은 향원 지라는 연못을 만들어 왕과 왕비가 휴식을 취하기 위해 지어졌다. 고종은 이곳이 편해서 자주 머물렀다고 한다.
그러나 건청궁 내에 왕비의 처소인 곤녕합의 남쪽 누각인 옥호루에서 명성황후가 일본에 의해 시해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1895년 10월 8일(음력 8월 20일) 을미사변으로 옥호루는 명성황후가 35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 비운의 장소가 됐다. 이 사건 이후로 한동안 방치되었다가 결국 철거되고 2006년에 다시 복원되었다.
<남한산성>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게 항복했던 곳으로 영화 남한산성에서 ' 삼전도의 굴욕 ' 장면이 인상적이다.
주화파 (항복)와 척화파 (항전) 사이에서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인조의 내면 갈등을 잘 표현했다.
서울 근교의 관광지로 특히 서울 야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어서 인기가 좋은 곳이다. 남한산성에서 야경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진다.
남한산성은 치욕의 역사를 겪었고 수많은 천주교인들의 순교 장소였다고 한다. 과거의 슬픈 역사와 현재의 유명 관광지로 공존하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