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은 지나온 시간의 일부를 깨워 준다. 미래가 불투명했던 시절 거리에 울렸던 팝송 하나가 마음속에 들어와 잔잔한 울림을 가져온다. 90년대 중반 M B C 미니시리즈 드라마의 O S T곡 I O U. (Carry &Ron)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온다.
지나고 보니 추억들이 많았고 다시 돌아가고 싶은 아쉬움이 남는 시간들이었다. 빨리 성인이 되었으면 하며 조급해하던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J는 대학에 진학을 하고 S는 취업을 하고 K는 재수를 하고 나는 군대에 지원을 했다. 풋풋한 고교 시절을 함께한 친구들은 각자의 길로 한 걸음씩 발걸음을 내디뎠다.
이층 카페의 창가에 앉아 많은 사람들이 분주히 오가는 영등포 거리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4월의 벚꽃은 화려하다. 지나던 바람이 스르르 벚꽃 잎을 스치고 지나간다. 하늘하늘 흩날리는 꽃잎은 길을 가던 어떤 이의 머리 위에 실려 어디론가 떠나간다.
이 밤이 지나고 나면. 임재범의 노래가 울려 퍼진다. 리어카 가판대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는 변함없이 히트 곡을 만들어내지 않았던가.. 그의 목소리에는 진실함이 담겨 있다. 그의 노래와 함께 고등학교 동창 J가 벚꽃처럼 환한 웃음으로 다가온다. “ 부산 여행 갈까?”졸업 이후 좀처럼 만나기 힘든 S와 K에게도 같이 가자했다고 한다. S와 K는 고등학교에 올라가 첫 미팅에서 만난 친구들이다.
앳된 스무 살에게는 그동안 금기시되어온 많은 것들이 허락되었다. 술, 담배, 당구장, 나이트클럽, 장거리 여행 등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친구들은 야간 자율 학습시간에 담장을 넘어 학교 앞 분식집에서 라면을 먹었던 소소한 일탈처럼 작은 여행에 설렘과 여린 긴장감을 함께 싣고 부산을 향해 출발했다.
도시의 네온사인을 벗어나자 스무 살의 야간열차는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간간이 보이는 희미한 불빛을 향해 달려갔다. 열차는 소리 없는 세상 속의 정적을 덜컹덜컹 깨우고 부산역에 도착했다.
우리는 태종대에서 일출을 바라보며 은은한 수평선을 품고 있는 바다에게 저마다 가지고 있는 꿈을 알려 주었다. 그곳은 산 전체가 오래된 소나무로 둘러싸여 있으며 바다와 경계를 이룬 곳은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졌다. 절벽에 부딪히며 들려오는 파도 소리를 듣고 있으니 마음이 편안했다.
망부석 앞에 도착하자 바람에 실려 오는 바다의 내음이 왜 나라에 끌려간 남편을 기다리던 한 여인이 화석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는 사연을 전해주는 것 같았다.
신라 말기의 학자인 최 치원 선생이 속세를 떠나기로 마음먹고 해인사로 들어가던 길에 이곳을 지나가다가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 바닷가의 바위 위에 자신의 호인 해운(海雲)과 높고 평평한 지형을 의미하는 대(臺)를 새겨 넣어서 그때부터 이름 지어졌다고 하는 해운대(海雲臺)로 들어서자 푸른 바다와 함께 펼쳐져 있는 백사장과 동백섬이 보였다.
원래는 섬이었지만 오랜 세월 동안 퇴적작용으로 인해 육지가 되어버린 육계도(陸繫島)인 동백섬은 동백나무가 많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동백꿀을 좋아하는 직박구리 한 마리가 두리번거리다가 우리를 보자 “ 푸드덕 ”날아간다.
“ 꽃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 ” 조 용필의 히트 곡인 돌아와요 부산항에도 등장하는 동백섬을 바라보며 해운대의 모래사장을 거닐었다. 4월의 봄과 함께 살며시 불어오는 미풍은 스무 살의 J와 S, 나와 K에게 소중한 추억을 남겨 주었다.
서울로 돌아왔다. 포근한 햇살을 안은 서울역 앞 거리의 벚꽃 잎은 저마다의 어깨에 내려앉아 제각기 다른 꿈들과 함께 어디론가 떠나갔다.
작은 부산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후 우리는 다시 한번 세월의 열차에 몸을 싣고 이십 대와 삼십 대 그리고 사십 대의 시간을 달려갔다. 참 많이 변했다. 강산은 두 번 반이나 바뀌었다.
갓 피어나는 초록빛 같은 그해 4월 어느 봄날의 마음은 그때 그대로이지만 우리는 스무 살 앳된 나무에서 중년의 나무가 되었다.
이십여 년 만에 부산행 열차를 탔다. KTX는 두 시간 삼십 분을 달려 부산 역에 데려다주었다. 기술의 진보는 시간을 단축시켜주고 AI(인공지능)과 자율 주행 차 등의 놀라운 생활의 편리함을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필름 수가 정해져 있어서 꼭 남기고 싶은 추억들만 찍어야만 했고 사진관에 현상을 맡기면 며칠 후 설렘 반 기대 반으로 사진을 찾으러 갔던 기억과 90년대 삐삐의 호출과 전화 속에 남겨진 녹음한 음성을 듣기 위해 공중전화 앞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던 슬로우 시간 속의 아날로그적인 감성들은 점점 더 뒤로 밀려 나간다.
동백섬에서 바라본 광안 대교 위로 붉은 노을이 내려앉을 무렵이었다. 서쪽 하늘은 지상의 땅 끝으로 사라져 버릴 것 같은 황혼의 일 몰로 번져 갔다.
해운대 근처의 달맞이 공원에서 맞이한 소나무와 만개한 벚꽃 사이로 밝고 둥그런 달이 그해 4월 우리의 봄을 데려왔다.
부산 앞바다의 일출과 수평선에게 막연한 우리의 꿈을 전해 주었던 J는 의사가 되었고 S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고 K는 중학교 선생님이 되었고 나는 시인과 공무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