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밖에 있는 사람들이 뛴다. ''후드득'' 아파트 공사 현장에 벗어 놓은 노란 안전모 위로 비가 내린다. 횡단보도 건너편 노파는 야채를 올려놓은 좌판을 서둘러 정리한다.
빗소리는 오래전 안부를 묻듯이 카페의 창문을 슬며시 두드렸다. 결혼 전, 아내와 함께 신촌에서 영화를 보고, 이대 앞 카페를 즐겨 찾곤 했다.
고만고만한 아이들을 태운 유치원 버스가 빗속을 지나갔다. 딸아이가 어릴 때 ''아빠~" 하고 달려오는 모습이 떠오를 무렵이었다. 친구들 모임을 마친 아내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미안, 조금 늦었네.''
그날도 비가 내렸다. 서른 살 초반의 아내와 나는 비 오는 거리를 걸었다. 비를 피해 카페 처마 밑에 있는 여학생에게 내 우산을 주었다. 우리는 서로 어깨를 밀착한 채로 걸음을 옮겼다. 검은 우산 위로 작고 하얀 물방울이 맺혔다. '두둑 두둑' 내리는 빗소리는 애틋한 연인의 마음에도 내렸다.
비가 내릴 때 걷기 좋은 곳은 경기도 포천에 있는 산정호수다. 산속에 있는 우물 같은 호수라 해서 산정(山井)이라고 한다. 궁예가 왕건에게 쫓겨 죽음을 맞이할 때 산과 새들이 울었다는 명성산으로 둘러 쌓여 있다.
유명 국민 관광지인 이곳 근처에서 군생활을 했다. 완전 군장에 장거리 행군을 했다. 고된 유격 훈련이 이어졌다. 군용 삼각 텐트 안에서 스르르 눈이 감기며 빗소리를 들었다. 스물한 살 앳된 군인이었던 내게 소중한 기억으로 남았다.
이십여 년만에 아내와 함께 산정호수 산책길을 걷다가 비를 만났다. 호수에 내리는 빗방울이 동그란 동심원을 그렸다. 누군가 '톡' 하며 내 마음 한가운데 작은 물결을 주는 듯했다.
문학 작품 속의 '비'는 독자에게 여운을 남긴다. 소년은 소녀가 죽기 전 자기가 입던 옷을 꼭 함께 묻어 달라는 소식을 아버지에게 듣게 된다. 소나기는 소녀와 함께 한 추억을 순수하고 안타까운 사랑으로 간직한 소년의 마음이다.
영화 라디오스타의 OST '비와 당신' 이란 곡이 있다.비와 눈물과 당신 사이.. 여러 가수가 부른 이 노래는 비가 올 때 라디오에서 많이 틀어준다. 나는 '럼블피쉬'의 메인보컬인 최진이가 부른 버전을 가장 좋아한다. 그녀의 목소리에서 문득 연애시절 아내의 모습이 떠오른다.
만난 지 일 년이 조금 지난 가을 저녁이었다. 그녀는 오래전부터 망설였다는 듯 내게 말을 건넸다.
" 우리 엄마... "
그녀는 말이 차마 떨어지지 않았다.
" 우리 엄마 직업이 무속인이에요."
그녀와 나 사이에 놓은 커피잔이 그녀의 목소리와 함께 가늘게 떨렸다. 잠시 미묘한 정적이 우리 둘 사이에 놓였다.
'그랬구나! 그래서 그녀의 눈빛에서 가끔 불안이 느껴졌구나.'
어색한 감정을 정리하고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게... 그게 뭐 어때서... 당신 잘못.. 아니잖아.''
예상대로 부모님의 반대가 너무 심했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준 사랑을 '배신감'으로 받았다고 했다. 나는 자정이 넘어 집으로 돌아와 방에서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꼈다. 내게 아버지는 '그녀와 나는 여기까지만'이라 하셨다.
아버지께도 울먹이며 똑같은 말을 했다.
"은주 잘못이 아니잖아요."
그녀와 만났다. 헤어짐을 말했고 모질게 돌아섰다. 비를 맞으며 걷던 길에서 비인지 눈물인지 모를 아픔이 밀려왔다. 새벽이 다가올수록 세차게 내리는 '빗소리'는 그녀와 내 마음에 서러움으로 다가왔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결국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 더니 그녀와 나는 결혼을 했다. 둘의 '사주'를 보고 오신 어머니는 천생연분이 아니라 만 생연분이더라 하셨다.
그날 밤 내린 비는 아마도 내가 흘릴 눈물을 대신해 내렸나 보다.
자연이 들려주는 소리 중 나는 빗소리를 가장 좋아한다. 눈을 감고 들을 때 느끼는 평온함이 좋다. 이때 인간의 뇌는 안정이 되고 알파파가 나온다. 엔도르핀 생성을 도와준다고 한다. 빗소리는 편안함과 슬픔 두 가지 감정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누군가 그런다. 인간은 함께 있어도 늘 외로운 존재라고.. 백 프로 동의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는 맞다. 가끔 시골길을 운전하다가 자동차에서 듣는 빗소리는 기분 좋은 청량함과 아련한 추억을 불러오기도 한다.
합정역을 지나 집으로 향하는 길이다. 아내와 함께한 세월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간다. 잠시 신호대기에서 멈춘다. 혼자가 아닌 둘일 때 듣는 빗소리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그 시절 우산을 함께 쓴 젊은 두 연인의 귓가에도 작은 물방울의 두드림이 들려온다.
[지은이 소개] 작가명: 임세규
2019. 서울시 지하철 시 공모전 당선. 2019. 오마이 뉴스 '하포리 가는 길' 선정. 2020. 푸른 문학 수필 부문 최우수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