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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해거름은 우리네 중년을 닮아 있다.

해거름

by 임세규

해거름.


동그란 해가 수평선을 붉게 물들인다. 일 년 중 몇 번 되지 않는 운 좋은 날이다. 파란 가을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다. 해 질 녘 강화도 장화리 앞바다 풍경은 마치 잘 찍은 인생 샷 같다.

우리말에 해거름이란 말이 있다. 해넘이보다 조금 앞선 시간이다. 사계절 중 가을 해거름은
부지런히 달려온 어떤 일을 마무리 짓고 서서히 결실을 맺어야 할 때다.

일 년 중 시월이 주는 햇볕은 참 편안하다. 오래된 상처와 시름을 은은한 햇살에 맡긴다. 한 줌의 햇살만큼 딱 그만큼만 세상살이 걱정을 하고 호수 공원 주변 벤치에 앉아 가장 편한 얼굴로 가을빛을 만난다.

큰 아이가 일곱 살 무렵 서울에서 시흥시 은행동으로 이사를 왔다. 방 두 개, 비록 작은 평수의 아파트였지만 더 이상 2년마다 한 번씩 고민해야 하는 이사 걱정을 하지 않아서 좋았다. 그 무렵 우리 집 앞에는 길 건너 조그마한 낚시터가 있었다. 해거름 때가 되면 저수지 옆 참나무 오리 훈제 집에서는 장작을 태우며 저녁 장사 준비를 하는 듯했다. 쌀쌀한 늦가을 가끔 그 집에서 식사를 할 때 마당에 피워 놓은 모닥불에서 타오르는 장작 내음과 온기가 좋았다.


십여 년이 흘렀다. 강산이 변한다는 세월, 우리는 좀 더 큰 평수의 아파트로 옮겼다. 큰 아이는 얼마 전 주민 등록증이 나온다며 사진을 어디서 찍어야 잘 나오는지 호들갑을 떨었고 둘째 아이는 훌쩍 자라 초등학교 5학년이 됐다. 처음 내 집을 장만한 그 아파트 앞은 은계지구로 지정되어 오피스텔과 상가 지역으로 바뀌었다.

아이들과 함께 걷던 산책길에서 만났던 해거름을 언젠가부터 볼 수 없음이 아쉽다. 저수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팔뚝만 한 고기를 잡아 올리는 낚시꾼을 보며 탄성을 지르던 어스름한 가을 저녁도 오래된 기억으로 남아있다.

산책하기 좋은 계절 '사각사각' 낙엽 밟는 소리가 운치 있다. 하늘은 높고 말이 살찐다. 天高馬肥의 계절, 곡식이 무르익음을 알리는 말이다. 그 옛날 중국이 천하 통일되고 태평천하를 누릴 때 흉노족을 경계하라는 말로 쓰였다고 한다. 풍성한 가을 결실을 노린 북방 유목민족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달에서도 보인다는 만리장성을 축조하기 시작했던 것도 이즈음이다.

누렇게 고개 숙여 익어가는 벼와 함께 가을 해거름이 물들어 간다. 논둑 위 풀숲 사이 이름 모를 꽃들과 잡초 위로 햇살이 기울고 가을이 져문다. 부지런히 살아온 지난 시간을 뒤돌아 본다. 저마다 살아온 삶에 또 한 번 가을은 두장의 달력을 남긴 채 흘러간다. 해넘이가 오기 전 가을 해거름은 우리네 중년을 닮아 있다.

[지은이 소개] 작가명: 임세규

2019. 서울시 지하철 시 공모전 당선.
2019. 오마이 뉴스 '하포리 가는 길' 선정.
2020. 푸른 문학 수필 부문 최우수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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