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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얼마나 많은 국수를 만드셨을까..

우리 고모

by 임세규


우리 고모

음식 솜씨가 좋은 사람에게 나오는 고유의 맛이 있다. 바로 '손 맛'이다. 참, 알 수가 없다. 정확한 그램으로 재료를 계량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아내가 요리하는 모습을 봐도 그렇다. 대충 '슥슥' 하는 것 같은데도 맛이 좋다. 아내는 골뱅이 무침을 잘한다. 시원한 맥주 한 잔에 잘 어울린다.

잔치국수를 만들어봤다. 육수가 포인트다. 요즘에는 육수를 내는 팩이 나온다. 멸치, 다시마, 새우등이 들어 있어서 간편하다. 국수가 삶아지면 미리 만든 양념장을 살짝 올린다. 마지막으로 계란을 풀어준다. 비교적 간단한 요리라 생각했는데 쉽지 않다. '호로록' 둘째 딸은 아빠가 만들어준 국수도 먹을 만하단다.


강산이 네 번이나 바뀌었지만 잊을 수 없는 맛이 있다. 나는 열 살 무렵 아버지와 함께 미아리에 있던 고모 집에 갔다. 언덕길을 한참 올라 허름한 집에 도착했다. 1980년대 그곳은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마침 점심때였다. 고모는 국수를 해 먹자고 하시며 육수를 끓이셨다. 멸치로 우려낸 국물이 얼마나 맛이 있던지 두 그릇을 먹고도 아쉬웠다. 어머니가 해 주신 국수 하고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잔치국수를 먹을 때마다 고모가 생각났다.

고모는 한량이고 나약한 남편과 자식 넷의 생계를 책임져야만 했다. 미아리는 북한산과 가까웠다.
고모는 등산객들을 상대로 길거리 좌판에서 음식을 만들어 장사를 하셨다. ‘ 얼마나 많은 국수를 만드셨을까 ’ 비록 변변치 않은 길거리 장사였지만 맛을 내기 위해서 생각을 많이 하신 것 같다. 맛 좋은 국수 한 그릇을 먹어본 손님들은 분명히 다음 등산길에도 다시 찾았을 거다.

잔치국수는 이름 그대로 ‘잔치 때 먹는음식’

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손님이 많을 때는 만들어 놓은 면을 체에 담아 뜨거운 국물에 여러 번 넣었다 빼면 따뜻하게 데울 수 있다. 이를 '토렴'이라고 한다. 국수를 더욱 맛있게 먹는 방법은 면을 바로 먹기 전에 삶아 찬물에 헹구어 내면 쫄깃하게 된다. 고모가 만들어주신 국수에는 단순한 조리법이 아닌 다른 무엇이 있지 않았을까. 재료의 신선함과 끓이는 시간 등등 최상의 맛을 내기 위한 노력이 깃들여져 있었을 거다. 고모의 잔치국수가 맛있었던 이유다.

음식은 타이밍이다. 적당한 순간 적절한 행위를 해주어야 최고의 맛이 나온다. 신선한 재료와 요리법도 중요하다. 하지만 먹는 사람을 생각하며 넣은 관심, 배려, 마음 등등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재료도 음식의 맛을 좌우한다.

유명한 요리 연구가 백종원의 말처럼 ''간단하지유 ''라는 말속에는 단순하지만 단순하지 않은 그 이상의 무엇이 담겨있다. 그의 요리법은 장사 속에 얽매이지 않는 재료의 맛을 살리는 솔직함이다. 음식을 먹는 사람의 마음을 알고 있다.

정도(正道)를 따르는 그의 음식 비법은 먹는 이들에게 감동을 부른다.

군대에서 휴가를 나와 고모의 집에 갔다. 자식들도 성인이 되어 분가를 하고 조그만 아파트에서 홀로 지내고 계셨다. 젊은 시절 고생을 그토록 많이 하셨는데 노년에도 혼자 계시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려왔다.

고모가 우리 집에 다녀가신 이후로 돌아오시지 않았다는 연락을 받았다. 휴대폰도 꺼져 있었다. 고모의 행방을 찾을 수가 없었다. 하루가 지나 파출소에서 모셔왔다. 일시적인 기억 장애였다. 버스에서 내렸을 때 순간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고 하셨다.

병원에서 검사를 해보니 치매 증상이 있으셨다. 자주 '깜빡깜빡'했지만 홀로 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 식구들이 인지를 못했다.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초기에 알았더라면 조금이라도 진행 속도를 늦출 수 있었지만 고모는 이미 중증으로 진행된 상태였다.

고모의 지병이 갑자기 악화되어 위독하시다는 전화를 받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의사는 오늘 밤을 넘기시기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손을 꼭 붙잡고 마지막 인사를 했다. 고모의 초점이 흐린 눈에서 희미한 빛이 보였다. 왈칵 두 줄기 눈물이 흘렀다.

아마도 지난날 고단한 삶 속의 희로애락이 고모의 국수에 담겨 깊이 있는 맛이 나오지 않았을까.
40년 전 그날 먹었던 고모의 잔치국수를 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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