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과일가게 좌판 앞에 있는 먹음직스러운 대봉을 샀다. '살짝 만져 보고 사 올걸' 모양은 홍시처럼 생겼는데 알고 보니 어설픈 감을 사 왔다.
''기다려서 먹지요 뭐'' 아내가 쿨하게 말한다. 다행이다. 익지도 않은 홍시를 사 왔다고 한소리 들을 줄 알았는데 말이다. 주방 한쪽에 놔뒀다. 그런데 이 홍시도 아닌 어정쩡한 감이 2주가 지나도 거기서 거기다.
인터넷을 검색해 본다. 홍시 빨리 만드는 법.
'그리 어렵진 않군.' 속성으로 만드는 방법 중 제일 빠르게 만드는 방법이 있다. 감의 꼭지를 알코올(소주)에 살짝 담근 후 밀폐 용기에 담아 두면 3일 후에 먹을 수 있다고 한다.
소주를 사 올까 하다가 그냥 두기로 한다. 빨리 먹고 싶은 마음을 접어 둔다. 쟁반에 대봉 다섯 개를 띄엄띄엄 놓고 햇빛 드는 베란다에 놓는다. 때가 되면 익겠지.
선영이가 중학교 2학년 때였다. 북한 군인들도 무서워한다는 중2병이 우리 집에도 왔다. 저녁 식사를 하다가 물어봤다. 학교 생활은 어떤지, 친구들 하고는 잘 지내는지. 아빠가 아이에게 그 정도 관심을 갖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딸아이가 뾰로통 하니 대꾸가 없다. 아이가 예민한 건지 밥 먹다가 말고 제방으로 '쏙'들어간다.
아니, 도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했나? 정말 무슨 일이 있는 거 아닌가 싶었다. 아내가 그런다. ''내버려 둬요. 사춘기잖아요.'' 나는 억울했다. 일상을 물어봤을 뿐인데 무슨 큰 잘못을 저지른 아빠 같았다.
질풍노도(疾風怒濤)의 시기다. 한자 그대로 해석하면 '거친 바람과 화난 파도'라는 뜻이다. 미국의 심리학자 그랜빌 홀(Granville Stanley
Hall,1844~1924)이 그의 저서에서 언급한 표현이다.
10대, 특히 중2병이라 불리는 이 시기에 아이들은 극도로 예민해진다. 10대의 뇌는 변화를 겪게 된다. 아직 완성되지 못한 20%의 불안정한 뇌 때문에 감정조절이 잘 안 된다고 한다. 부모의 시각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는 이유다. 이때 섣부른 조언이나 논리적인 설득은 오히려 반항감을 키울 수 있다.
직장 선배의 집에서 일어난 일이다. 지금은 다자라 성인이 된 아들의 이야기다. 공부를 곧잘 하던 아이가 어느 날 엄마에게 그러더란다. 프로게이머가 되고 싶다고. 아들은 게임에 빠졌다. 부모는 불안했다. 아들의 아버지는 보다 못해 스마트폰을 뺏어서 방바닥에 던져 버렸다. 이후 어떤 상황이 벌어졌겠는가. 아들은 반항이 더욱 심해졌고 오랜 시간을 아버지와 담을 쌓고 살았다. 순간의 감정을 참지 못한 아버지는 최악의 수를 둔 거였다.
사춘기 아이의 행동이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욱'하고 올라올 때 속으로 열까지 세라 한다. 선배의 아들 경우처럼 아버지의 극단적인 행동은 가족 간의 깊은 골만 만들 뿐이다.
부모와 아이에 관한 지침서를 제법 읽었다. 현실과는 동떨어진 이야기들도 있었다. 하지만 종합해 본 결과 내 기준이란 걸 만들었다. 그건 눈 높이다. 아이와 같은 곳을 바라본다는 의미다. 선영이는 영화와 음악을 좋아했다. 휴일에는 제 방에서 꼼짝도 안 하고 스마트폰으로 하루 종일 영화를 봤다.
'그래, 이거다.' 싶었다. 딸아이가 보는 영화를 넌지시 물어봤다. 처음에는 '시큰둥' 하더니 발동이 걸렸다. 줄거리, 배우, OST까지 줄줄이 내게 얘기해 줬다. 나는 격하게 공감해 줬고 아빠도 꼭 보겠노라고 했다. 보이지 않는 미묘한 감정의 벽이 허물어지는 순간이었다. 음악 사이트 멜론을 검색해서 선영이가 좋아할 만한 곡을 '카톡'으로 보냈다. ''이번에 새로 나온 신곡인데 좋더라.''
또 하나의 기준은 기다림이다. ''재는 커서 뭐가 되려고 저러는 거야. 저렇게 하면 사회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겠어? '' 부모라면 똑같은 심정 일거다. 아이를 믿고 기다리라는 말이 이론으로만 생각된다. 마음에 와닿지 않는다. 나 역시도 그랬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아이 입장에서 전적으로 신뢰하고 믿어 준다는 말이 맞다. 딸아이는 질풍노도의 시기를 무난히 지나왔다. 내년이면 성인이 되는 나이다.
버스에서 막 내리려는데 선영이의 전화번호가 화면에 뜬다. ''아빠~ 감이 익어가고 있어요.~'' ''그놈 참 오래 걸린다. 기다리면 익긴 익는구나.''
홍시란 붉은색으로 말랑말랑하게 익은 상태의 감을 말한다. 땡감을 햇볕에 놓아두거나 항아리에 넣고 기다리면 떫은맛이 없어지고 맛있는 홍시가 만들어진다. 햇살을 받고 기다려주면 감이 무르익어 가듯 믿고 기다리면 중2병인 아이도 성숙해질 때가 오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