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핀

by 임세규


말총머리를 묶어 준다. 딸아이는 제 엄마보다 아빠가 더 잘 묶는다며 칭찬일색이다. 별 하나, 하트 하나 ‘ 똑딱 ’ 머리핀을 앞머리에 꽂는다.


학교 운동장 벤치에 앉아 바라보는 가영이의 머리핀이 잠시 머문 햇살과 함께 반짝인다. 흐드러진 벚꽃나무 사이로 미풍이 불어온다.


까맣게 잊고 지냈다. 딸아이의 머리핀 하나가 오래전 단상(斷想) 속으로 데려갔다.




그녀와의 첫 만남은 고 1 때다. 지금이야 촌스럽지만 그때는 빵집에서 만나는 미팅이 어색하지 않은 시절이다. 큰 딸아이에게 말하면 아빠는 '옛날 사람'이라고 한 소리 들을 법도 하다.


학교 앞 독일 제과 안에서 여학생 쪽이 각자의 소지품을 꺼낸다. 볼펜, 머리핀, 손수건이 탁자 위에 있다. 하트 모양이 달린 머리핀을 잡는다. 나와 그녀가 짝이다. 그녀가 앞머리를 살짝 올려 핀을 꽂는 모습이 앙증맞다.


“ 박주은이라고 해.” “반갑다.”그녀의 이름과 머리핀이 살짝 닮아있다. 조금 어색한 시간이 흐른 후 우리는 공원을 걸으며 날씨 이야기, 학교생활은 어떤지, 일요일에는 뭘 하며 지내는지, 많은 대화를 했다. 그녀와 편지를 주고, 받았다. 가끔은 유치한 문구를 넣은 글들과 말린 은행잎도 넣어 보냈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과 '사랑한다'는 감정의 차이는 어떤 것 일까. 사랑함은 좋아함 보다 이성적인 감정이 아닌가. 사랑은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 좋음은 딱히 무엇이라 할 수 없는 우리가 알고 있는 느낌. 그녀를 좋아했다. 사랑해란 말은 10대의 주은이와 내게는 어색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녀는 대학에 진학을 하고 나는 군대를 지원했다. 시간은 우리가 서로의 우편함을 확인하는 횟수를 점점 줄어들게 했다. 친구를 통해 그녀의 소식이 종종 들려오곤 했다.

첫 휴가를 나와 상봉터미널에 내렸다. 그녀가 보고 싶었다. 좌판에서 머리핀을 샀다. 그녀를 만나면 머리핀을 앞머리에 꽂아 주고 싶었다. 큐빅 머리핀과 레이스가 달린 분홍색 나비 리본 핀이 눈에 띄었다.


만나기로 약속한 커피숍에 조금 일찍 도착했다. 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머리핀을 주면서 어떤 말을 해야 하지..’ 바보 같았다. 주은이와 석호의 커플링을 보기 전 까지는.. 첫 미팅의 멤버였던 석호도 함께 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후회가 밀려왔다. 주은이에게 리본 머리핀을 주고 올 것을. 친구이니까. 그게 뭐라고. 뭐가 어때서.




영어에 If라는 단어가 있다. 사전적 정의는 만약에... 라면, 문법으로 가정법이라 한다. If you라는 문구는 팝송 가사에 흔히 나온다. 만약에 당신을, 너라면 으로 해석된다. 만일, 어땠을까 라는 문장은 지나온 시간에 대한 향수와 아쉬움을 가져온다. 그날 주은이와 둘이 길을 걷다가 머리핀을 건네고 사랑 고백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가수 싸이가 노래하고 박정현이 피처링(featuring)한 ‘어땠을까.’라는 가요의 가사다. 내가 그때 널 잡았더라면 너와 나 지금보다 행복했을까/ 왜 그랬을까 그땐 사랑이 뭔지 몰라서 사랑이 사랑인 줄 몰랐어 / 혼자서 그려 본다 / 헤어지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 어땠을까 (너와 나 지금까지 함께 했을까) 왜 그럴까. 그땐 사랑인 줄 몰랐어. 노래 가사처럼 사랑인 줄 몰랐던 시절이었다.


“ 후두두 ” 비가 내린다. “ 가영아! 비 온다.” 소나기다. 딸아이와 1층 현관 앞 처마 밑에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린다. 가끔 운명이란 말을 생각한다. 이미 정해진 것처럼 만들어진 길을 가는 것인지, 내가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주은이와 사랑하고 헤어지고 가슴 아파하는 청춘을 보낸 건 아니다.


그녀와 주고, 받던 편지 속에 남은 10대의 풋풋한 순수함과 전해주지 못한 머리핀의 아련함 하나쯤은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것도 그리 나쁘지 만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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