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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세규 Jan 17. 2024

영화의 한 장면 같은 내 인생의 마지막 시간

아내와 술 한잔 하며 나눈 대화 내용이다. 어떻게 잘 살 것인가는 어떻게 죽음을 맞을 것인가와 연결되어 있다. 잘 살아야 잘 마무리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우리도 그런 생각을 할  나이가 되었네 ~ "


" 그러게 말이야. 살날이 살아온 날들보다 적게 남았다는 말, 남일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 이야기야. "


" 2022년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한국인 남자의 기대수명이 79.6세 여자는 85.6세로 평균 82.7세라고 . 사람 인생이라는 게 언제 어느 때 어떻게 될지 몰라  딱 떨어지지 않지만 대략 80대에 죽음을 맞이한다는 가정으로 보면

어느새 지나온 삶보다 남은 삶이 적게 되었다는 현실이 슬퍼지는군. "


" 지난날 왜 그렇게 아웅다웅하며 살아왔을까. 후회되네. 언젠가 끝이 있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살아있는 시간들이 소중하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야. "


" 혹시 어떻게 죽음을 맞이해야 할까, 생각해 본 적 있어? "


" 글쎄..  생각은 해봤지만.. 잘 모르겠어. 아마 대부분 마음 한구석에 뭔가 막연함을 가지고 살아가겠지.. "


오늘 이야기는 행복한 죽음에 대해 초점을 맞춰 보고자 한다. 사실 말이 안 된다. 행복한 죽음이 어찌 있을 수 있겠는가. 죽음 자체가 행복하지 않는데 말이다.


굳이 행복한 죽음이라 한다면 ' 호상 ' 이른바 건강하게 오래 살다 잠자듯 자연사

다는 걸 의미할 수 있겠다. 필자의 할머니께서 그렇게 돌아가셨다. 전날 저녁 ' 배부르다~ 잘 먹었다 ~  ' 하시고 잠자리에 들으시고는 다음날 아침 눈을 뜨지 않으셨다고 한다. 살아생전 특별한 병도 없으셨고 40년 전 78세로 큰 고통 없이 돌아가셨다. 


행복한 죽음의 또 다른 사례로는 안락사를 들 수 있겠다. 합법, 불법 등등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찬반 논쟁은 오랫동안 있어왔다. 호주의 생태학자 데이비드 구달은 104세 때 안락사를 결심했다. 그는 100세를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건강상태는 좋았지만 삶의 질적인 면에서 힘들었다고 했다. 그는 왜 더 이상 오래 사는 건 의미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아마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 불안감이 크지 않았나 싶다. 오래 산다는 것이 축복 아닌 두려움으로 다가왔을지 모를 일이다.


호주는 2017년 빅토리아주만 안락사를 합법화했다고 한다. 결국 데이비드는 스위스로 떠나 그가 좋아하는 베토벤 교향곡 9번을 들으며 2018년 5월 10일 생을 마감했다. 레버를 누르면 약물이 투입되어 깊은 잠이 들면서 호흡이 멈추는 의사조력 자살을 했다. 이 느낌을 알 것도 같다. 수면 내시경을 해본 사람들은 알고 있을 거다. 약물 들어갑니다~라는 간호사의 말과 함께 스르르 잠이 오는 경험 말이다. 이 느낌대로 라면 데이비드 구달은  편안하게 떠 나를 것 같다.


인간의 존엄성이란 무엇인가. 풀이하자면 장애인, 정신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 경제적으로 궁핍한 사람들 등등 모두가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가치와 존엄이 있다는 말이다. 치유할 수 없는 병에 걸려 하루하루 고통과 죽음에 대한 무서움을 견디며 사는 사람들에게 편안히 죽을 수 있는 권리를 주는 것도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것일 수 있겠다. 그러나 안락사를 공식적으로 합법화한다면 부작용이 만만치 않을 것도 같다.


안락사로 위장한 살인도 있을 것이고 병을 치료할 돈이 없는 사람들은 치료조차 하지 못하고 안락사를 선택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겠다. 물론 안락사에 대한 엄격한 기준을 적용해야겠지만 지금 일부 나라에서 행해지는 안락사는 치료가 우선이 아닌 안락사를 먼저 선택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의료비에 대한 경제적인 문제와 치료과정에서의 고통을 안락사로 해결한다면 오히려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어떻게든 서로 돕고 힘을 모아 최선을 다해 치료하려는 노력도 인간 존엄성의 일부가 아닐까..

아니 어쩌면 안락사까지 생각할 정도로 삶에 대한 고통을 겪어보지 못한 필자의 생각이 잘못된 생각일 수도 있겠다. 안락사 논쟁은 명확한 결론을 내릴 수 없다. 이 또한 개인의 자유의사로 내릴 선택의 문제인 듯 싶다.


어떻게 죽어야 할 것인가.. 앞서 말했듯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어떻게 살 것인가와 연결되어 있다. 행복한 죽음은 현재의 삶과 이어진다. 지금의 나는 미래에도 영향을 미친다.  누구는 이렇게 누구는 저렇게 사는데 나만 뒤처진다고 생각하다 보면 더욱더 힘들어진다. 비우고 덜어내는 삶을 살기란 어렵지만 시도는 계속해야 한다. 비워도 비워도 또다시 채워지는 남들과의 비교는 더 이상 하지 말아야 한다.

행복한 삶과 행복한 죽음의 기준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지금 이 순간과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한 해답에 가까워지는 게 아니겠는가..


햇살이 따스한 날 창 넓은 창가에서 푸른 하늘에 시선을 맡기고 아무 걱정 없이 스르르 눈감는 그날을 상상해 본다. 영화 같은 장면이지만 내 죽음을 그렇게 평온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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