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사랑, 배려, 공감 등 보이지 않는 끈이 있다. 이중 공감한다는 말은 서로의 감정을 이해하고 따뜻한 울림을 서로 나눈다는 의미다.
드라마를 참 좋아한다. 글쎄.. 술 마시고 당구 치는 것보다 드라마 보는 걸 즐기니 중년 남성 치고 조금 별난 사람인 듯싶다. 가끔 눈시울이 붉어질 때도 있으니 말이다.
소설과 드라마, 영화의 공통점은 개연성이다. 어느 소설가는 핍진성이라고도 하는데 둘 다 비슷한 개념이다.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줄거리와 '아! 그래서 그랬구나.! 복선과 필연으로 구성한 드라마를 볼 때면 "어쩜 저렇게 극본을 쓸 수 있지" 작가의 필력에 감탄할 때가 있다.
또 다른 공통점은 공감이다. 얼마 전 화제를 모았던 '응답하라...'시리즈 중 1988과 1994에서 드라마 속 배경이 된 소품과 그 시대를 살았던 등장인물들, 이야기들은 70년대를 살아온 우리 세대에게 공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아이들의 공감능력은 3세 이후부터 나타난다고 한다. 뇌와 신체가 발달하면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는 소통과 배려하는 마음도 함께 커지지만 일부 어른들은 아이들보다 공감력이 떨어질 때도 있다. 그들은 '공감'이란 단어조차 알지 못하는 것 같다. 오로지 자신의 눈높이로만 보려 한다.
유명한 실화가 있다. 뉴욕에서 맹인 거지가 '나는 앞을 보지 못합니다.'라는 문구를 써서 구걸을 하자 사람들은 그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고, 깡통에 모인 돈은 형편없이 초라했다. 하지만 프랑스 시인 앙드레 뷔르 통이 다가와 문장을 바꾼다. '봄이 다가오고 있어요. 그러나 나는 볼 수가 없군요' 지폐와 동전이 모이기 시작했다. 단, 두 줄의 문장이 마치 내가 맹인이 된 것처럼 공감을 일으켰다.
'당신이 옳다.'의 저자 정혜신 정신의학과 의사는 리액션을 통한 공감은 진정한 공감이 아니라 어떤 상황이든 '그건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생각하고 상대방에게 물어보라 한다. 남편이 잘 나가던 직장을 "때려치우고, 유럽 여행을 가고 싶어"라고 이야기했을 때 화부터 내지 말고 무슨 일이 있는지 물어봐 주면 서로가 온전한 공감을 할 수 있다는 거다.
요즘 둘째 딸아이가 너무 재밌게 보는 드라마가 있다. 시간 여행을 다룬 '앨리스'다. 금, 토요일만 손꼽아 기다리는 녀석은 드라마가 끝나면 부리나케 달려와 내게 줄거리를 이야기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