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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저빔 Jun 21. 2023

마음을 만나는 기쁨

사소하지만 사소하지 않은

  아이들의 마음을 만날 때, 그래서 가슴이 뜨거워질 때, 그럴 때 선생님이 되기를 참 잘했다고 느낍니다. 아이들의 귀한 노력을 읽거나 생각지 못했던 순수한 마음에 흠칫 놀랄 때, 아이다운 말과 행동이 나를 들뜨게 하는 많은 순간에 저는 힘을 얻곤 합니다.


  몇 해 전 우리 반이었던 규민이는 표현이 서툴고 무뚝뚝한 아이였습니다. 조금이라도 다정한 말은 오글거린다고 싫어하기도 했고 장난스레 하는 말 중에는 거친 언어도 많았습니다. 표현이 서툴다 보니 주장이 강한 친구들과 갈등이 자주 일어났고 아이들끼리 오해를 부르는 일이 종종 생기기도 했지요.


  학습 성취도도 높은 편은 아니었는데 그중에서도 영어를 유독 싫어했습니다. 4학년인데 아직 알파벳을 다 모를 정도로 실력이 부족했거든요. 못하는 걸 싫어하는 건 당연했고, 싫어하니까 더 못하게 되는 악순환이었습니다.


  규민이가 5학년이 된 해에는 제가 영어 교과 전담을 맡게 되었고 규민이는 여전히 알파벳을 헤매고 있었지요. 6학년에 올라가기 전에 그래도 알파벳은 떼야겠다 싶어 방과 후에 같이 영어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날도 함께 영어 공부를 시작하려고 앉았는데 규민이가 무심하게 종이를 두 장 건네더군요. 혼자만 쓰기는 쑥스러웠던지 다른 친구 한 명에게도 쓰라고 해서 같이 가져왔다고 하면서요. 그 종이가 하트 모양의 편지란 걸 알았을 때 규민이가 말했어요.

  “다음 주에 스승의 날이잖아요.”


  세상 무뚝뚝한 규민이가 펜으로 그리고 가위로 오린 하트 모양 편지지를 직접 만들어서 가져왔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놀랐습니다.

  “선생님 주려고 직접 만들어 온 거야? 완전 감동인데.”


  제 말을 듣던 규민이는 갑자기 제 손에서 편지지를 뺏어 들더니 구겨버렸습니다. 민망하다는 표현이었지요. 순식간에 종이 뭉치가 된 편지지가 아까웠습니다.

  “선생님 주려고 써왔으면서 왜 구기냐?”

  “아, 그냥 버리려다가 주는 거예요!”


  ‘오다 주웠다’라는 말을 연상시키는 경상도 사나이 규민이만의 애정 표현인 걸 알기에 당연히 속으로는 웃음이 났습니다.

  “치, 같은 말이라도 좀 곱게 하면 어디가 덧나니?”


  핀잔을 한번 주고는 구겨진 편지지를 살살 펼쳤습니다. 찢어지지 않은 게 다행이었지요. 들쭉날쭉 서툰 글씨로 꾹꾹 써 내려간 예쁜 편지였어요. 규민이가 글씨쓰기를 힘들어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저는 괜히 콧등이 시큰했습니다.

  “이야! 글씨 진짜 잘 썼다! 대단해, 규민아!”

  거의 유일한 주특기라 믿는 감탄사를 연발하며 고마운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아까 할 일 없어서 그냥 대충 썼어요!”

  규민이는 이 상황이 민망한지 계속 말을 돌렸습니다. 그러더니 편지를 다시 뺏으려 하는 거예요.

  “선생님! 빨리 읽고 다시 주세요!”

  “왜?”

  “버릴라고요!”

  민망함을 벗어나기 위한 규민이 특유의 말투는 돌덩이처럼 딱딱했지만 저는 이미 하트 모양의 편지에 마음을 뺏긴 후였기 때문에 그 목소리마저 다정하게 들렸습니다.

 

  “버리긴 왜 버려? 한번 줬으면 이제 선생님 건데.”

  “그럼 다 읽으면 버려야지 뭐해요!”

  “간직해야지. 선생님은 편지 안 버려.”

  “그럼 언제 버리는데요?”

  “선생님은 아이들한테 받은 편지 다 보관해. 십 년도 넘은 것도 다 가지고 있어.”

  “헐. 왜요?”

  예상치 못한 답변이라는 듯 약간은 누그러진 말투로 규민이가 물었습니다.     


  손지은선생님, 4학년 떼 아껴주고 사랑해주시고 사고 만이 쳐도 이해해주시고 5학년 데도 제가 학교 안나왔을 떼 걱정도 해주시고 4학년 떼 모르는 문제도 알려주시고 재밌는 것도 만이 해주시고 영어도 가리켜주셔서 감사합니다.  -박규민-          


  틀린 맞춤법, 구불거리는 글씨, 빨간 색연필로 삐뚤삐뚤 칠한 카네이션에 구석구석 담긴 규민이의 마음이 고스란히 읽혔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려놓은 태극기까지. 지난 영어 시간에 어느 나라 출신인지 묻고 답하는 내용을 공부했었거든요. 글로는 전하지 못했던 I’m from Korea를 표현한 규민이만의 언어란 걸 알았기에 그만 눈가가 촉촉해질 뻔했습니다. 우습기도 하고 흐뭇하기도 했던 제 마음을 규민이는 알았을까요.     


  며칠 뒤 다시 만난 규민이가 물어왔어요.

  “선생님! 제가 줬는 편지 어딨어요?”

  “집에 가져갔지.”

  “아깝다! 버려야 되는데! 진짜 안 버렸어요?”

  “안 버린다니까. 선생님은 아이들한테 받은 편지 다 보관해. 얼마나 소중한 건데.”


  말로는 버려야 한다고 툴툴대면서도 마음을 담았던 자신의 편지가 귀하게 간직된다는 걸 속으로 무척 기뻐했겠지요. 워낙에 무뚝뚝한 녀석이라 티 내면 큰일 나는 줄 아는 모습도 귀여웠습니다. 그 편지를 규민이가 정말 정성들여 썼다는 걸 저는 알고 있었어요. 일 년을 함께 지냈던 제가 모르면 누가 알까요. 그래서 더 고마웠습니다.     


  얼마 전 영어 시간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글쓰기 활동을 하고 각자 쓴 것을 발표한 적이 있었습니다. 발표를 하던 중 마치는 종이 울렸고, 그 반 아이들은 활동을 마무리하지 못한 채 교실로 돌아가게 되었지요. 평소처럼 줄을 세우고 있는데 대현이가 저에게 다가와 책을 내밀었습니다.

  “선생님이라도 제 거 읽어주시면 안 돼요?”


  발표를 하려고 손을 들었는데 시간이 부족한 바람에 기회를 얻지 못한 모양이었어요. 수업을 정리하느라 분주한 상황이었지만 제 대답을 기다리는 대현이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보고 ‘다음에’라고 말하기는 힘들었습니다. 원어민 선생님께 아이들 줄 세우는 일을 대신 부탁하고 책을 집어들었어요.


  특별한 것 없는 싱거운 내용이라도 대현이에게는 세상 하나뿐인 작품일 테지요. 누군가가 자기의 작품을 읽어준다는 사실로도 만족해할 대현이를 위해 기꺼이 시간을 할애한 저를 속으로 칭찬했습니다.


  대현이는 자신이 좋아하는 축구에 관해 썼더라고요. 옆자리에는 축구공과 축구선수 그림도 세밀하게 그려놓았고요.

  “오, 대현이는 축구를 좋아하는구나. 손흥민 선수도 영어 엄청나게 잘하잖아. 대현이도 그렇게 되는 거 아니야? 열심히 쓴 글 보여줘서 고마워.”


  몇 마디 해주었을 뿐인데 아이의 표정이 금세 밝아졌습니다. 그렇게 대현이는 만족한 얼굴을 하고 영어실을 떠났어요. 제 마음도 불이 켜진 가로등처럼 밝았습니다.


  학부모의 민원에 스트레스를 받고 때로는 아이들이 버겁게 느껴진다는 생각에 좌절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가르치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은, 모두 아이들의 마음을 만나는 작은 순간의 기쁨 때문일 것입니다.


  힘들고 지친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아이들의 마음이 찬찬히 옮겨와 제 마음을 밝혀주었던 순간을 떠올려 봅니다. 생각하지 않아서 보이지 않았던 순간이 가슴에 잡힐지도 모르니까요. 그런 순간의 기쁨을 어깨에 단단히 둘러메고서 오늘도 교실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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