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 위에 지은 모래성-지주택은 왜 무너지는가?

지주택 제도의 구조적 한계와

by 김선철

“청약통장 없이 새 아파트를 분양받을 수 있습니다.”

“시세보다 20~30% 저렴한 분양가, 조합원 선착순 모집 중입니다.”


이 말은 많은 이들에게 희망처럼 들린다.

내 집 마련이 점점 멀어지는 시대에,

청약도, 고가 분양도 부담스러운 무주택자들에게

지주택은 마지막 선택지처럼 다가온다.


그러나, 요즘엔 이런 농담이 돈다.

“원수에게 추천할 부동산 3종 세트? 지주택, 지식산업센터, 신도시 상가.”

그만큼 지주택은, 이제 ‘기회’보다 ‘위험’의 상징으로 회자되고 있다.


기대한 것보다 훨씬 오래 걸리는 사업 기간,

말도 안 되는 추가분담금,

조합 내부의 끝없는 갈등과 소송.


지주택(지역주택조합제도)은 지금,

처음의 이상과 너무도 멀어진 제도가 되어 있다.


지역주택조합의 본래 취지와 제도의 구조


지주택은 2000년대 초 무주택 서민들의 주거 안정을 위해 도입된 제도다.


무주택 세대주들이 자발적으로 조합을 구성해

직접 토지를 확보하고 아파트를 짓는 구조다.


청약통장이 없어도 참여할 수 있고,

공급가는 시세보다 저렴하다는 장점이 부각됐다.


그러나 문제는 이 제도가 어떻게 실행되고 있는가다.

실제 현장에서는 공공의 개입은 없고, 민간 브로커 중심의 사적 운영이 지배하고 있다.


그 결과, 지주택은 좋은 취지를 가졌지만,

현실에서는 조합원에게 모든 리스크를 전가하는 구조로 왜곡되고 있다.


추진위원회에서 조합 설립까지 – 출발부터 불균형


지주택 사업은 정비사업과 달리

‘추진위원회 구성 → 조합원 모집 승인 → 조합 설립 인가 → 토지 소유권 확보 → 사업시행인가’라는

특이한 순서를 따른다.


즉, 조합이 먼저 만들어지고, 토지는 그 이후에 본격 매입하는 구조다.


추진위원회는 무주택 세대주 50인 이상,

그리고 대상 토지의 필지 수 및 면적 기준 각각 50% 이상의 사용 동의를 확보해야

관할 지자체로부터 추진위원회 승인을 받을 수 있다.


이후 추진위는

지자체에 ‘조합원 모집 계획’을 신고하고 승인을 받은 뒤에야

공식적으로 조합원 모집을 시작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사업대행사나 추진위는

반드시 ‘사업성 분석 자료’를 제시하게 되며,

이 분석은 보통 낙관적인 전제(저렴한 토지 매입가, 낮은 건축비, 높은 일반분양가)를 기초로 한다.


겉보기에는 정교한 수지분석이지만,

실제 사업이 착수되면 토지 매입 실패, 공사비 상승, 소송 비용 등으로

조합원 추가 분담금이 급증하고,

처음 홍보됐던 ‘시세 대비 저렴한 분양가’는 무의미해지는 경우가 빈번하다.


조합은 설립됐지만, 95%라는 벽 앞에 선다


지주택 사업은 조합 설립 시

토지의 80% 사용 동의만으로도 가능하다.

이 과정까지의 진행은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정작 착공을 위한 사업시행 인가를 받기 위해선

토지소유권의 95%를 확보해야 한다.


이 괴리는 지주택 사업의 가장 치명적인 구조적 결함이다.


전 토지의 94%를 확보하고도,

남은 1% 내외의 필지에서 발생한 매도 비협조나 비정상적인 보상 요구로 인해

사업이 전면 중단되거나 장기 지연되는 사례가 적지 않다.


통상 ‘알박기’로 불리는 이 현상은,

법이 허용한 소수 필지의 교섭권이 전체 사업을 지배하는 구조적 역설로 나타난다.


실제로 서울 성수동 성수1가 지역주택조합 "트리마제 사례"처럼, 약 92% 수준 토지 확보에도 불구하고,

몇 필지의 소유자가 과도한 가격 요구와 협조 거부로 사업이 좌초된 경우가 있다.

이는 조합원들에게 수년간의 분담금 납입에도 불구하고 사업 실패라는 현실적 손실을 안긴 대표 사례다


조합원만 희생되는 구조, 그리고 투명성의 부재


사업이 표류하는 동안,

추진위원회, 조합, 사업대행사, 시공사 간에는

복잡한 이해관계와 권한 구조가 얽히게 된다.


그러나 정작 사업의 모든 금전적 책임을 지는 조합원에게는

실질적인 의사결정 권한이 거의 주어지지 않는다.

자금 집행 과정에도 감사나 외부 검토 절차가 제도상 마련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형식적인 수준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고,

실질적인 결정과 자금 운용은 대부분 사업대행사의 주도로 이뤄지는 것이 현실이다.


추진위원회 단계에서부터 조합원들로부터 거둬들인 수십억 원 규모의 예치금은,

토지 매입비, 용역비, 광고비, 대행사 수수료, 운영비 등의 명목으로 집행된다.


하지만 이 자금의 실제 지출내역이나 계약 조건, 집행 주체 간 역할 구분

조합원에게 사전에 상세히 고지되거나 검증되기 어려운 구조다.


특히 추진위나 조합이 자금 집행의 명목상 결정권을 갖더라도,

실제 집행은 사업대행사가 주도하는 경우가 많아,

조합원은 집행 과정에 실질적으로 접근하거나 사전에 통제하기 어려운 구조적 한계에 놓이게 된다.


신탁사를 ‘보여주기용’으로 활용하는 지주택 조합과 대행사의 문제


지주택 조합과 사업대행사들은 일반적으로 조합원들의 불안감을 달래기 위해

“신탁사를 통해 자금을 안전하게 관리하고 있다”는 식의 홍보를 앞세운다.


신탁계좌를 도입했다는 사실만으로

마치 사업의 자금 운용 전반이 투명하고 안정된 것처럼 포장한다.


하지만 실제 신탁사의 역할은 ‘출납관리’에 국한되어 있다.

토지 매입금, 용역비, 운영비, 대행사 수수료 등

수십억 원이 오가는 자금 집행의 의사결정과 집행 권한은

전적으로 조합과 대행자 측에 있다.


그 결과,

조합원이 문제 제기를 해도

계약서나 자금내역을 확인하고자 해도

사업의 적정성을 따지고자 해도


신탁사는 “우리는 단지 이체만 담당할 뿐”이라는 입장만을 내세운다.

이처럼 신탁사는 명목상으로는 신뢰의 장치처럼 활용되지만,

실질적으로는 아무런 통제 권한도, 책임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합과 대행사는

신탁사의 존재를 ‘안전장치’인 양 홍보하며 조합원을 설득하거나 회유한다.


이는 신탁사를 명분용 방패로 소비하는 왜곡된 구조이며,

결과적으로 조합원 보호에는 아무런 실효성도 제공하지 못한다.


제도 개선을 위한 정책 제언 – 지주택, 다시 ‘희망’이 되기 위해


지역주택조합은 태생적으로 공공성을 품은 민간 주도형 공급모델이다.

주택을 필요로 하는 무주택 세대주들이 직접 조합을 구성해

시세보다 낮은 가격으로 내 집을 마련한다는 이상은,

지금의 주거난 시대에 더욱 절실하다.


그러나 그 좋은 취지조차

왜곡된 사업성 검토,

실현 불가능한 토지확보 기준,

그리고 책임 없는 사업대행 구조 앞에서는

이상으로만 남는다.


지금 필요한 것은 지주택 제도의 폐지가 아니라,

그 취지를 구현할 수 있는 법적 안전장치의 정비다.


① 조합설립과 사업시행인가 요건의 정합성 확보


현행 제도는 조합 설립 시 80%의 토지사용권만 확보하면 가능하지만,

실제 착공을 위한 사업시행 인가 단계에서는 95%의 토지소유권 확보가 요구된다.


이 괴리는 알박기 문제를 구조적으로 양산하며,

조합원 피해의 출발점이 되고 있다.


따라서, 조합설립 요건과 사업시행 요건을 90% 수준으로 통일하여

조합 설립 이후에는 일정 요건 하에서 법적으로 사업이 추진될 수 있다는 신뢰를 부여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소수 필지의 과도한 협상 지연을 차단하고

조합원 피해를 사전에 차단하며

실현 가능한 사업만 착수되는 구조가 정착될 수 있다.


② 신탁사의 실질적 권한 및 책임 부여


현재 신탁사는 단지 입출금만을 관리하는 ‘금고지기’ 수준에 머물러 있다.

조합과 대행사의 일방적인 자금 집행에도

신탁사는 이를 견제하거나 검토할 권한이 전혀 없다.


지주택 제도의 구조를 감안할 때,

신탁사는 단순한 회계관리자가 아니라,

조합원 권익을 보장하는 제3의 감시기관이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자금 집행의 적정성 검토 및 보류 권한,

조합 회계의 정기 검토 및 지자체 보고 의무,

필요 시 사업대행 기능 일부 대행 가능성을 포함하는

법제도적 정비가 필요하다.


, 신탁사는 명분용 통장이 아닌, 실질적 사업책임 주체가 되어야 한다.


③ 추진위원회 단계의 사업검토 실효성 강화


현행 제도에서는

추진위원회 구성 시 제출되는 사업성 검토 자료가

형식적으로만 존재하며,

과도하게 낙관적인 수지분석이 그대로 조합원 모집 광고에 사용된다.


따라서

추진위 단계에서 사업성 분석자료의 외부 감정 의무화,

토지확보율, 공사비, 금융비용 등에 대한 현실 기준 설정,

조합원 대상 설명자료 표준화 및 허위표현 금지 조항 강화가 필요하다.


이는 조합원 보호의 기본선이다.


④ 공공의 사전 관여 확대 및 책임연계


지자체와 국토부는 현재 조합 인가와 사업승인 단계에서의 형식적 심사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지주택은 공공적 효과가 기대되는 민간형 공급모델인 만큼,

사전 컨설팅 지원,

추진위 단계에 대한 관리 감독 강화,

위험사업 목록의 사전 고지 및 사업 중단 권고 등

공공의 적극적 관여 시스템이 병행돼야 한다.


마무리하며


지금의 지주택은 신뢰를 잃었다.

그러나 제도를 손본다면,

지주택은 다시 무주택자의 주거 사다리가 될 수 있다.


조합원에게만 모든 리스크를 떠넘기고,

책임 있는 행위 주체가 사라진 제도는

결코 오래가지 못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이상을 지키는 구조의 설계자, 그리고 법의 개입이다.


지주택이 본래의 공공성과 기능을 회복하려면,

이제는 입법과 행정이 구조적 개입을 통해

제도의 신뢰 기반을 다시 설계해야 할 시점이다.




이전 12화0.88의 경고, 그러나 희망은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