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대만 타이베이 자심재단과 리런유기농업회사
초겨울, 대만 타이베이공항에 내리자 훅, 하고 더운 기운이 느껴졌다. 내 가방에는 세 시간 전에 넣어둔 두툼한 패딩점퍼가 들어있었다. 2시간 30분이라는 짧은 비행시간 후 만난 그곳은 따뜻하고, 낯설었다.
대만 타이베이 도심으로 이동해 리런유기농업회사(里仁事業股份有限公司, Leezen, 이하 리런) 매장을 찾았다. 대만 전역에 132개가 있고 해외 거점 점포도 110여 곳이 있는 대만 최대의 유기농산물유통업체. 1998년 설립 이후 지역 먹거리를 사용하고, 인공첨가물은 넣지 않은, 건강한 조리법이라는 3대 원칙을 지키며 꾸준히 성장했다. 2019년 기준 전국 600여 개 농가가 협력하고, 17개 가공업체가 리런의 원칙과 주문에 따라 생산한 가공품을 비롯해 4800여 가지 품목을 취급하며 연간 800만 명이 이용한다.
리런의 최대 주주는 불교 철학을 바탕으로 한 자심유기농업발전기금회(慈心有機農業發展基金會, 이하 자심재단)과 복지재단福智財團으로, 이익은 재단의 공익적인 프로젝트로 사회에 환원하는 구조다.
테니스라켓 양배추와 빈혈 수박
1995년, 자심재단 설립자 일상日常 스님은 화학비료와 농약, 제초제 남용으로 수많은 생명체들이 죽고 농지가 황폐해지는 상황을 안타깝게 지켜보며 고민 끝에 유기농장을 열었다.
“1995년은 대만에 유기농업이 막 보급되던 시기였어요. 농사 기술이 부족해서 채소 모양이 엉망이었죠.”
수무롱蘇慕容 자심재단 대표는 당시 유기농 밭에서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말했다. 테니스라켓 양배추, 인삼 (같은) 당근…. 상품 가치가 전혀 없는 농산물들을 다시 밭에 묻었다. 그러다가 일상 스님이 아이디어를 냈다. 만두소를 만들자, 채소를 다지면 생김새는 상관없으니까. 그것이 ‘농산물 가공’의 시작이었다.
“수박을 키워 쪼갰는데, 속이 희멀겠어요. ‘빈혈 수박’이라고 별명을 붙였죠. 그런데 이걸 사주는 소비자들이 있었던 거예요. ‘수박은 달지 않아도 마음은 달다’ 하며 설탕에 찍어 먹었죠.”
유기농업에 대한 인식조차 없던 시절, 함께 만두소를 만들고 빈혈 수박을 사주던 소비자의 존재는 우리나라 생협 운동 초창기를 밝히던 소비자의 모습과 닮아있다.
멧돼지와 함께 먹는 옥수수, 나비를 살리는 망고
자심재단 담당자가 과자봉지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이건 옥수수 과자인데요, 멧돼지가 그려져 있죠? 멧돼지가 먹고 남은 옥수수로 만든 과자라는 의미랍니다.”
타이루거 국립공원에 거주하는 원주민들이 짓고 있던 농사를 유기농업으로 전환하는 프로젝트를 농민과 국립공원이 함께 진행한 결과였다.
“농민들은 생태에 관심이 없었어요. 그런데 유기농으로 전환하면서 환경, 생태 의식이 높아졌죠. 농사를 망치는 귀찮은 존재라 여겼던 야생동물들과의 공존을 받아들이게 된 거예요. 자연스럽게 ‘동물이 먹는 농산물이 안전한 것’이라는 의미를 마케팅에 활용할 수 있었어요.”
비슷한 예로 북부지역의 수원지인 저수지 근처의 차밭을 유기농으로 전환하는 기술을 지원하기도 했는데, ‘차를 마시며 식수원을 지킨다’는 슬로건으로 소비자와 공감을 이끌었다.
녹색보육, 유기농에 생태적 의미를 더하다
농약 과다 사용으로 보호종인 새들이 떼죽음을 당한 사건이 발생하는 등 환경문제가 크게 대두되자 2009년에는 기존 자체인증제도를 보완해 ‘녹색보육綠色保育’ 인증제도를 확립하기도 했다.
유기농에 생태적 의미를 더한 녹색보육 인증은 田(밭 전)자 모양의 인증마크에 새, 개구리, 산짐승과 사람의 발자국이 안을 향하고 있다. 사람을 포함한 모든 동물이 ‘사이좋게 농사를 지어友善耕作’ 땅으로 돌아와 어울림을 상징한다. 녹색은 생태보전을, 황금색은 경제활동을 의미하며, 생태보전과 경제활동이 함께 발을 맞춘다는 뜻이다.
2020년 11월 30일 현재 399명의 농민이 녹색보육 인증을 받고 농사를 지으며, 597.8ha, 총 45종 194개의 다양한 서식지 환경을 조성했다.자심재단에서 운영하는 마지유기농장. 유기농 교육을 목적으로 하며, 소비자 대상 먹거리체험과 초중고교의 정규프로그램도 운영한다.
생태와 경제가 함께 굴러간다
생태계를 복원하고 생명을 살리는 일이 좋은 일이라고 하더라도, 아직도 여전히, 테니스라켓 배추와 빈혈 수박을 생산하면서 소비자들에게 “자,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지속 가능한 생태계를 위해 이것을 먹어야 합니다”라고 외친다면 어땠을까.
자심재단과 리런에서 느꼈던 일종의 감명은 소비자에 대한 영리한 포섭 방식이었다. 이들은 소비자의 선한 마음에만 기대지 않았다. 평범한 소비자가 자신에게 필요한 소비행위를 하면서 가치 있는 일에 동참하고 있다는 자긍심을 느낄 수 있는 가령, 차를 마시면서 맑은 물을 지킬 수 있다는 낭만적이면서 합리적인 장치, 그리고 가치를 지향하는 비영리재단과 이익을 추구하는 경제 조직이 함께 굴러가며 만들어내는 시너지, 정부와의 협력을 통한 제도화, 인간과 자연의 ‘사이좋은 농사’가 필요하다는 공감, 같은 적극적인 행위가 있었다.
‘어렵고 쉽고의 문제가 아니라 꼭 해야 하는 일이다.
아무도 하지 않으면 우리가 해야 하지 않겠는가.’ _일상 스님
일상 스님의 메시지에 깊이 공감하고, 연대와 협력을 약속했던 그들과의 이야기는 아쉽게도 2019년 12월에 멈춰있다. 코로나19와 함께 일 년 이상을 보낸 이제,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해 다시 정의를 내려야 하지 않을까. 자연은 인간이 무한정 소비할 수 있는 자원이 아니고 인간은 자연의 예외가 아니라는, 지극히 당연한 진리, 혹은 낭만에 대하여.
* 현지 기관의 명칭은 한자명으로 썼고, 인명 등 일부 명칭은 편의상 중국식 발음으로 표기함.
* 자심재단: toaf.org.t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