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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사 작사가 류익 May 14. 2024

#23. 가난을 빼앗다.

-       국제개발원조를 바라보는 단상(斷想)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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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이 힘든 이에게 나의 힘과 정성을 쏟아붓는 것은 고결하게 보인다. 사회라는 생태계가 존재하는 한, 강자와 약자는 언제나 존재한다. 힘이 없는 이가 없는 이에게 따뜻한 온정과 힘을 나누며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세상을 아름답게 비추는 등불 같다.
 이건 비단 인간 사회에서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국제 사회 역시 비슷하다. 함께 잘 살 수 있도록 약한 국가를 지원해 주고 원조해 주며 같이 잘 살 수 있게 이끌어 가는 것이 국제 원조 사업이다. 표면적으로만 본다면,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사업임에 틀림없다. 너도, 나도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을 우리는 늘 꿈꾸며 살아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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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절대적인 빛과 그림자는 존재하지 않듯이, 국제 원조사업에도 단연 빛과 그림자가 존재한다. 이 글은 빛에 눈이 멀어버린 우리가, 어둠의 일면을 보기 위해 그려낸 글이다. 
 ‘국제 원조사업’이라고 한다면 막연히 가난한 국가의 저소득층에게 식량과 식수를 보급하는 등 인도적 지원을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실상을 바라보면 긴급구호로 대표되는 인도적 지원은 8%인 반면, 경제 인프라(SOC; Social Overhead Capital)에 대한 투자가 22.8%로 실로 압도적인 수치를 차지한다.[1]

사회 간접자본이란 도로ᆞ철도ᆞ공항ᆞ항만 등 사회 발전에 필요한 시설을 말한다. 선진국은 사회간접자본에 대규모로 투자하는 대신, 자동차ᆞ건설 회사 등 선진국의 대기업이 더 용이하게 새로운 시장에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를 놓거나 공항ᆞ항만 이용권을 얻는 등 수여국으로부터의 혜택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한다. 

 이렇게 선진국의 막대한 자본이 쏟아져서 들어오고, 국가의 중요 시설들이 뚝딱뚝딱 지어진다. 그러면서 선진국이 겪어 온 사회 문제를 똑같이 답습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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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내가 몸 담았던 이전 회사의 사업지 중 하나인 라오스에서 있었던 일이다. 현대 한국인들의 경제적 목표가 ‘내 집 마련’이듯이, 라오스의 농부는 논 ‘한 마지기’를 얻는 것이다. 라오스에서의 논 한 마지기를 얻기 위해서는 평균 10~15년을 착실히 저축하면 되고, 대개 은퇴 자금으로 논 한 마지기를 안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자본의 힘은 차갑고 무섭다. 먹고 살 논을 얻겠다며 땀방울을 흘리던 그 땅 위에 언젠가부터 외래 자본이 들어와 사회 기반 시설이 들어오기 시작하고, 기반 시설 근처의 부동산 가격이 일제히 오르기 시작한다. 동료 시민들은 현 정부가 보여주는 눈부신 발전에 모두 환호하고 있기에, 그 여론에 반대 깃발을 들기가 어렵다. 그렇게 자본의 격차로 인해 10년 정도를 일하면 살 수 있었던 땅이 40 평생을 일해야 한 마지기 살 수 있을 만큼 가격이 급등하고, 이내 평생 노동해도 그 땅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희망’을 바라보며 한 농부가 평생을 바쳤는데,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결국에 그는 그 땅의 바깥으로 밀려나는 것이다. 국제 원조를 통해 그 사이에서 희망을 안고 살아가던 주민들은 자기 터전은 물론 희망마저 잃어버리고 다른 곳으로 쫓겨나게 되는 것이다. 가난한 이를 구원하고 살리기 위해 부어졌던 막대한 금전이, 결국 그들을 더욱 가난케 하고 희망을 잃게 만드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게 한 것이다. 
 우리의 온정이 그들의 가난을 뺏었다. 선진국의 서민들이 모은 쌈짓돈으로, 개발 도상국의 부자들을 더욱 부유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이처럼 사회는 예상치 못한 부작용을 언제나 안고 나아간다. 이 부작용의 간극을 어떻게 메꿀 수 있을까를 늘 고민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수수께끼의 사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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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적 자본에 초점이 맞춰졌는데, 사실 자원봉사 역시도 비슷한 맥락이다. 자원봉사의 가장 큰 문제점은 지속성이 없다는 것이다. 좋은 마음으로 낮은 곳을 바라보며 내밀었던 손길이 누군가에겐 마약성 진통제처럼 다가올 수 있다. 근면성실한 대한민국 국민이 그러지 않은 국민성의 누군가를 만났을 때 ‘왜 성실하지 못해 늘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할까’라는 답답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수혜자들은 사실상 계속해서 ‘자원봉사’라는 이름의 진통제를 맞고 있는지 모른다. 어차피 본인이 더욱 힘든 상황이 처할 때에는 선진국의 국민에게 불쌍한 자신의 삶을 보여주면 하늘에서 식량이 뚝 떨어지니까. ‘봉사’라는 이름으로 낯선 사람들이 자신이 처한 문제를 깔끔하게 해결하곤 떠나버리니까. 그에게는 인생을 근면성실하게 살아야 하는 동기가 없는 것이다. 그에게 놓인 최후의 보루는 더 돈이 많고, 더 사려 깊은 봉사자 눈에 띄는 것. 그것이 전부이다. 결코 자주적인 인생을 영위할 수 없다. 몸을 움직일 힘조차 빠져버린다. 내가 노동해서 식량을 번다면 고작 하루치의 식량인데, 누군가의 동정심은 100일 치의 식량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게 만든다. 그렇게, 그저 진통제에 취해 하루하루를 버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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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모든 것에는 빛과 그림자가 있다. 내가 기쁜 마음으로 내던진 동전 한 잎이 누군가에게는 날카로운 주삿바늘이 되어 꽂혀버릴 수도 있는 것이 우리 사회의 슬픈 현실이다. 무조건 좋은 것은 없다. 우리가 숭고하게 생각하는 기부와 봉사조차도 사실은 이렇다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인식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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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엔 영원한 빛도, 영원한 그림자도 없다. 



          

[1]  https://www.odakorea.go.kr/statistic/main#/tileLayout; ODA KOREA 2023년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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