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견) D+106 2018.11.21. (수)
ㆍ 스리랑카에 건너온 것도 벌써 백일 정도 지났다. 스리랑카의 인턴 생활이 일주일이라면, 벌써 월요일이 지난 셈이지. 아직도, 나는 적응하느라 바쁘다. 그래도 주변 환경도 얼추 적응되었고, 일하는 것도 대충 어떻게 굴러가는지 보인다.
ㆍ 삶의 질만 놓고 봐서는 한국보다 훨씬 좋다. 생활비로 매달 750 USD를 받는데 현지인 임금의 약 2~3배 정도이다. 지금 가지고 있는 현금만 해도 100만 원이 넘는데, 이렇게 호화롭게 지내본 적이 있는가 싶을 정도로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다. 생각보다는 모두 견딜만하다. 사실 가장 좋은 것은 스트레스가 별로 없다는 점이다. 일도 그렇게 빡빡하지 않고 생활도 여유가 있다 보니 별로 고민하거나 낙담할 일이 잘 없다. 먹는 것도 '파는 물건'이라면 모두 사 먹을 수 있는 여유가 되고 이따금 아무 부담 없이 타인에게 기꺼이 나눌 수 있는 여유도 생겼다.
여태 보고 싶었던 영화나 드라마들을 주야장천 보고 있고, 자기 계발은 영어 회화를 공부하는 것뿐 별다른 건 없다. 스리랑카에 건너와서 영어 회화 공부를 시작했다. 영어 회화는 살면서 꼭 이뤄내고 싶은 목표 중 하나였는데, 이제야 슬슬 연습을 할 수 있게 되었구나. 한국인과 영어로 회화를 한다는 것은 조금 낯부끄러운 면이 있었는데, 여기서는 영어를 쓰지 않으면 아예 소통이 안 되는 경우가 많으니까 억지로라도 계속 쓰게 되고 실력은 조금씩 늘어가고 있다.
ㆍ 하지만 이따금 휴일을 맞으면 엄청 무료하다. 밖에 나가도 딱히 만날 사람도 없고 그렇다고 나갈 곳도 마땅치 않고. 현지 파견일 이후로 3개월이 지나야 다른 지역으로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어서 무척이나 무료하다. 인터넷 요금은 이미 다 쓴 지 오래되었고, 다시 충전되려면 10일 정도를 더 기다려야 한다. 그래도 시간 보내는 것이 영화 및 드라마라 주야장천 방에서 컴퓨터 모니터만 바라보고 있다.
그래도 주말에 어디라도 나가볼까 하는 심산에 일본어 학원도 알아보고 있다. Kegalle 쪽에 하나가 있긴 한데, 교습의 질이 그렇게 뛰어나지는 않아서 Peradeniya나 Kurunegala 쪽으로도 조금씩 알아보고 있다.
ㆍ 사무실 업무는 아주 기초적인 인프라를 만드는 데만 꼬박 한 달이 넘게 걸리고 있다. 책상, 의자를 사고, wifi를 설치하고, 우리가 지어야 할 부지의 수목을 정리하고. 조합은 눈 깜짝할 사이 만들어졌고. 이 조합원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진행하는 중이다. 정식 교육은 12월 안으로 마무리가 되고, 내년에 건물을 지은 후 조합 운영을 시작하는데, 꼬박 1년 이상이 걸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ㆍ 한국의 행정을 별로 겪은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현지의 일 처리는 아주 느리다. 계속 요구하고 요구해야 하나가 이루어진다. 물론 돈이 관련되면 시간이 많이 앞당겨지긴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꽤 많다는 것. 일례로 사무실에 wifi 설치하는데 꼬박 3주를 계속해서 요구, 요구, 또 요구를 거듭한 결과 겨우 설치할 수 있었다. 앞으로의 일 처리도 단연 이렇겠지. 상황이 이렇다 보니 돈을 쓰고 싶어도 쓰지 못하는 경우도 생긴다.
Kegalle에 있는 일본어 학원에 내 수준에 맞는 선생님을 찾고 있다고 이야기를 들은 지 벌써 3주가 지났는데, 아직 깜깜무소식이다. 현지인들과 비교해 생활비를 왕창 받는데, 절반도 못 쓰고 돌아갈 듯싶다.
ㆍ 아직 스리랑카에 대해 이해하기 바쁘다. 전체적으로, 정치ㆍ사회ㆍ경제ㆍ문화ㆍ종교 등 다분야에 걸쳐 국가를 파악하려 노력하는 중이다.
ㆍ 물론 여기 와서 느낀 점도 정말 많다. 생활에 여유가 있다 보니 자연스레 과거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 분석과 반성을 많이 했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에 대해 꾸준히 고민하고 있다. 일단 타인 앞에서 불평, 불만을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최대한 나쁜 어휘는 자제하고 있다. 또한, 색다른 경험도 많이 하는 편이다. 마을에 몇 없는 외국인이라 가끔 유치원 학예회 등에 초대될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감동을 많이 한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조물조물 만든 알록달록 결과물을 보았을 때 정말 가슴 한편이 뜨거워진다. 어떤 미술관, 전시회를 갔을 때 보다 훨씬 재미있었고 감동적이었다. 어떤 작품이든 간에 그냥, 전부 다 잘하고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ㆍ 손님을 극진히 대접해 주는 문화라서 이런 행사를 할 때도 손님은 따로 모셔놓고 대접을 한다. 주로 차, 바나나, 과자, 전통 과자, 우유로 지은 밥 같은 것들을 제공해 주신다. 그런 것들을 받아먹을 때마다 항상 감사함을 느낀다. 하지만 손님 대접을 받을 때 조금 부담스러울 때가 있기도 하다. 한국의 장유유서 문화에 익숙해져 있는 나는, 나이에 상관없이 손님부터 음식을 먹는 그 문화가 아직은 적응이 잘 안 된다. 그래도 이런저런 곳에서 대접을 받을 때는 항상 기분이 좋다.
ㆍ 먹는 것들은 참 힘들다. 특히 현지식을 먹을 때 가장 힘들다. 정말로, 입맛에 아예 안 맞다. 집에 들어가면 맛있는 한식을 만들어 먹거나 이따금 피자 / 치킨 / 햄버거 / 파스타 등을 사서 먹고 있다. 그런 것들이 있는 게 어디냐, 아직은 생활 반경이 Rambukkana ~ Kegalle이지만, Peradeniya, Kurunegalla, Colombo 등 범위가 점점 넓어지겠지. 그래도 현지식은 너무 맛없다.
그래도 한국에서 과일 먹기가 참 힘들었는데 과일을 자주, 많이 먹을 수 있게 되었고 유제품과 음료도 많이 먹게 되었다. 한국에 있을 때는 도시락, 라면, 그리고 가끔 치킨만 먹었었던 기억이 나는데 음식을 선택하는 폭이 훨씬 넓어지긴 했다. 한국 음식이 그리울 때는 라면 수프를 끓인 국물에 밥을 말아먹기도 하고. 김치도 조금씩은 만들어 먹으니 집 밖에서 먹는 것보다 안에서 먹는 게 질이 훨씬 좋다.
ㆍ 현지어는 파견된 이후로 발전이 거의 없다. 딱히 어딜 돌아다니질 않으니 현지어 쓸 일이 잘 없고, 정말 간단한 회화는 가능하기에 조금씩 여유가 생기면 살을 덧붙여 나가야겠다. 하지만 언어에 대한 욕심은 크게 없다. '싱할라어' 하는 언어에 별 매력을 못 느끼기도 했고, 그리고 이 언어에 관심 없어진 가장 큰 이유는 아직 이곳에 있는 미인을 한 명도 못 만났다는 것이다. 그래도 생활하면서 지장은 없을 만큼은 만들어야지, 외려 영어나 제2 외국어를 더욱 탄탄하게 다져서 귀국하려나.
ㆍ 아직은 겪어 보고 경험해 보는 것이 전부이다. Elephant Freedom Project도 가 보고 Dambulla 열기구 투어도 해 보고 Damro Tea Factory도 가 보아야지. 겪어 볼 것이 많다. 많이 겪어 보고, 또 해 보자.
파견) D+119 2018.12. 4. (화)
ㆍ 스리랑카에 서호현 자문 위원님이 오셨다. 앞전에 Walpola 사업지에서 근무하셨던 분으로서 앞으로 5달간 우리 Walpola 마을에서 한솥밥을 먹게 될 분이다. 한 달 전쯤에 위원님이 들어온다는 말을 들었을 때 무척이나 멀어 보였는데 어느덧 연수도 끝나고 Walpola 사업 터 건물 착공도 시작된다.
ㆍWalpola 출근 첫날 부지 정리를 싹 다 해버리는 기염을 토하셨다. 5개월이면 건물은 그렇다 치고, 장비 입고는 힘들다고 하시는데 어떻게 될지.
그리고 선생님의 거주지 문제가 깔끔히 해결되지 못했다. 알아본다며 찾아다녔는데, 별 성과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ㆍ 삶의 기반은 조금씩 다져 나가고 있다. 평소에 구입하고 싶었던 키보드도 샀다, 별로 마음에 드는 제품은 아니라도. 언젠가 한번 소지해보고 싶었던 게임기,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 편히 앉으려고 구매한 의자 등 일단의 기반 물건들은 몽땅 구매했다. 2019년 1월부터는 생활비를 조금씩 아낄 수 있겠지. 한국으로 돌아갈 때 추가로 600만 원 정도를 더해서 3,000만 원을 만들어 나간다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삶을 단조롭게 만들 필요성도 조금 느낀다. 처음 부임했을 때만 해도 매달 1번은 꼭 여행을 나가야지 생각했다. 사실 그러기엔 너무 힘든 여정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교통 사정이 그리 좋지도 않고. 무엇보다도 월요일 출근을 해야 하지 때문에 삶의 부담이 되지 않을까 싶다. 어찌 되었든 평일도 바쁘게 주말도 알차게 보낼 수 있도록 삶을 단조롭게 해야겠다.
ㆍ재단에서는 ‘찾아가는 연수’라고 협동조합이 결성된 다음 어느 정도 사업의 윤곽이 잡히면 한국에서 직접 연수단에 방문하여 현 사업 상황을 파악하고, 주민과 공무원들에게 연수를 시행한다. 스리랑카 사업지의 Walpola 사업지에 조합이 결성되고 주민들이 모집되니 재단에서 연수단을 파견하였다. Kegalle 지역에 있는 Sanasa Campus로 주민과 관련 공무원을 초청하여 기념품 (새마을 조끼, 티셔츠 등)을 나누어주었고, 대한민국의 새마을 운동 역사와 현황 및 결과 등에 대해서 교육하였다. 이후 현지 농업 공무원들이 현지 버섯 재배법에 대해서 상세하게 알려주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재단에서 버섯 전문가 ‘김한경’ 박사님을 스리랑카로 파견 보내 주셨다. 김한경 박사님은 Walpola 사업지에 부지 정리가 마무리되면 버섯 재배사를 어떻게 설계해야 하는지, 어떤 조건을 만들어야 하는지 등에 대해서 상세히 설명해 주셨고, Kandy 지역에 있는 KOPIA 시설에도 자문해 주셨다.
ㆍ한국에서 연수단도 다녀갔고, 스리랑카로 잠시 파견 나오신 김한경 박사님도 곧 한국으로 가신다. 생각보다 시간이 빠르게 흘러가는구나. 이렇게 가면 2년도 어느덧 끝나 있을까.
파견) D+120 2018.12. 5. (수)
ㆍ2018년이 저물어 간다. 12월, 곧 나도 20대 중반이 된다. 2018년은 참 길었다. 많은 일이 있었고, 많은 곳을 가 보았다. 미국 여행부터 시작하여 일본을 거쳐 스리랑카 거주까지, 많은 일이 있었다. 대학교 홍보대사 활동이 끝난 지 고작 백여 일밖에 되지 않았다니. 우리 동기들은 또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겠지. 학교로 돌아가면 스물여섯. 바로 졸업을 한다 해도 스물여덟.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스물일곱'이라는 나이는 엄청나게 커 보였는데, 나도 이제 스무 살보다는 스물일곱이라는 커 보이는 나이에 더 가까워졌다. 그랬던 나도 지금은 스물일곱 살이 더 가까운 나이가 되었다. 이렇게 눈 깜짝깜짝하다 보면 2년이라는 세월이 지나갈까.
파견) D+121 2018.12. 6. (목)
ㆍ서호현 위원님이 우리 사무실의 틀을 조금씩 잡아 주고 계신다. 일단 부지 평탄화 작업도 거의 마무리가 되어가는 듯 보이고 이제 설계 도면이 나오면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려 하시나 보다. 큰일이 있지 않은 이상 95% 주말에도 출근하신다는데, 앞으로 공사가 진행된다면 휴일은 거의 없어지는 듯하겠다.
ㆍ 일단 주말에는 학업에 매진하려고 한다. 현재는 영어 회화를 배우고 있는데 거기에 일본어 학원도 다녀볼까 생각 중이다. 무료하게 보내는 주말은 싫다. 무엇이라도 열심히 행하며 살아 보자.
ㆍ 처음 우리 마을에 배정받았을 때 소장님이 3개월의 생활비를 한꺼번에 주셨다. 정확히 얼마를 건네주셨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언뜻 30만 루피가 넘어 보였다. 봉투에 가득 들어 있는 그 돈들을 보면서 ‘이걸 언제 다 쓰나?’ 생각했다. 한국 돈으로 언뜻 200만 원이 넘었고 사실 딱히 쓸 일도, 쓸 것도 없기에 2달 치 생활비로 2년 내내 쓸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먹고 자고 공부하고 이 3개밖에 하지 않았는데 어느덧 그 돈이 벌써 동나버렸다. 여윳돈은 현재 3만 루피 (20만 원) 정도. 무얼 하느라 여기서 매달 100만 원 이상을 썼나, 모르겠지만 깜짝 놀랄만한 수치이긴 하다. PSP나 키보드, 의자 등 제반 물품들을 사느라 다 써버렸나 보다.
파견) D+129 2018.12.14. (금)
<2018 새마을 국제 포럼>
ㆍ 새마을 세계화 재단에서는 세계 각국에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매 2년마다 모든 사업 국가별로 돌아가며 국제 포럼을 진행하는데, 올해는 마침 스리랑카 차례라 박병규 소장님이 요 며칠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셨다.
포럼에서는 세계 각국의 새마을 지도자와 공무원 및 실무자가 모여 새마을에 대해 깊이 있는 토론을 한다. 개회식을 시작으로 세계 각국의 사업 사례와 결과를 발표하면서 내용을 공유하고, 앞으로의 발전 방안에 관해서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번 포럼을 통해 아프리카에서는 어떤 사업을 하고 있는지, 인도네시아에서 어떤 성과를 내었는지 알 수 있었던 자리였다. 기억에 남는 것은 아프리카에서는 쓰리게 분리수거장을 건설하거나 100헥타르가 넘는 광활한 땅 위에서 농사를 짓는 등의 사업을 하고 있다는 것 등이었다.
ㆍ 새마을 국제 포럼을 가기 위해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났다. 5시 10분에 아침 식사를 받아서 곧바로 콜롬보로 출발하려 했으나 5시가 되어서야 Rambukkana에서 Walpola 마을로 버스가 출발하였다. 결국, 6시가 다 되어서야 Rambukkana를 벗어날 수 있었고, 애당초 9시에 시작하기로 되었던 국제 포럼이 우리 때문에 30분가량이나 늦춰졌다.
ㆍ 국제 포럼장은 Bandaranaike Memorial International Conference Hall에서 진행되었다. 행사장에는 새마을 세계화 재단 대표 이사님, 재단 이사님들, 스리랑카 및 한국 공무원들, 각 마을 팀장, 르완다 / 인도네시아 / 베트남 소장님이 참석하셨다. 행사 내용은 계속해서 '새마을'에 관한 논의를 나누었는데, 1~2시간까지는 꽤 흥미로웠지만, 그 이상 무언가를 듣는 것은 사실상 내겐 무의미했다. 그래서 행사장에 발생하는 상황들에 대해서 대처하거나 보조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입구 접수처를 지키고 있는 안내 현지 여학생들과도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고 오며 가며 재단 주임님, 각 나라 소장님의 말동무가 되어드리기도 했다. 대부분 인간적인 느낌을 많이 풍기는 것 같아 좋았다.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은 우리 마을 사람들이 회의장에 늦게 도작하여 소장님이 많이 마음 졸이셨을 듯했는데, 늦어도 괜찮다며 꼭 껴안아 주셨다. 포럼 행사장은 누가 보아도 분위기가 엄숙하고 무거웠고, '언젠가는 나도 이런 포럼 자리에 참석하여 다양한 의견을 발표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지'라는 다짐을 했다.
ㆍ UN Woman에서 오신 UN Volunteer도 만나서 꽤 친해졌는데, 재미있는 이야기도 많이 들을 수 있었다. 국제기구 쪽으로 뛰어들려면 석사 학위가 기본이고, 영어권 학교가 인정받고, 등등. 내게 필요한 정보들을 많이 알려 주셨다. 머지않아 임기가 끝나고 곧 한국으로 돌아가신다는데, 가기 전에 콜롬보에서 한 번 더 만나기로 했다.
ㆍ 행사가 끝나고 바로 마을로 돌아가는 줄 알았는데, 소장님이 저녁 식사를 하고 내일 차량 이동의 선탑을 하라고 하신다. 그래서 일단 대기했다. 포럼이 끝나고 정리를 하는데 통역기 하나가 당최 보이질 않는다. 결국, 하나를 찾지 못하고 저녁 식사장으로 이동했다.
저녁 식사는 화려함 그 자체였다. 바다를 낀 식당에서 해산물을 먹는 곳이었는데, 스리랑카에 이런 곳이 있구나 싶을 정도로 풍경이 좋았다. 내빈들과 같이 사바라가무와 전통춤, Kandyan 댄스를 보고 해산물 모둠을 먹었다. 한 사람당 거의 5,000루피 정도를 하는 식당이었는데, 맛도 느낌도 물론 좋았다. 나의 옆쪽에는 경상북도 도청 새마을과 공무원들이 앉아 있었는데 아쉬웠던 점, 개선되길 바라는 점 등을 상세히 이야기해 드렸다. 연신 고개를 끄덕이셨는데, 잘 전달이 되었을까.
ㆍ 저녁 식사를 맛있게 먹고 Kingsbury 호텔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이상우 부장님과 꽤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다. 잘 먹고, 운동도 하고 건강을 잘 챙기라고 하신다. 그래, 마을로 돌아가면 운동을 좀 해야지 다짐했다.
호텔에서는 위라지, 마두랑가 코디네이터와 맥주 한 잔씩 했다. 이곳과 별반 다를 것 없이 일에 대한 고충, 상사에 대한 고충을 토로하더라. 그래, 세상에 안 힘든 일은 없지만, 나이가 40줄에 걸친 사람도 고민은 거의 비슷하구나. 확실히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다. 호텔 방에 누워 이런저런 생각과 고민을 동규와 나누다 늦은 시간 잠에 빠졌다.
ㆍ 다음 날 아침 조식 시간을 넘어 일어났다. 급히 준비하고 체크 아웃을 한 뒤 사업지로 향했다.
처음에는 Pitiyegama를 들렸는데, 준비를 너무 잘하신 듯 보였다. 조합원들 환영 인사에 질의응답, 간식, 현장 방문으로 일정이 이어졌다. 버섯 연구소를 급히 들린 다음 촉박한 비행기 시간을 맞추기 위해 Hewadiwela로 향했다. Hewadiwela 일정도 빠르게 소화하고 내빈들은 다시 콜롬보로 떠났다.
ㆍ 살면서 '포럼'을 겪은 것은 처음이다. VIP들과 함께 한 가지 주제에 대해 심도 있게 토의하는 것, 무겁고 딱딱한 느낌도 있었지만 나름 신선한 경험이었다. 그리고 한 행사가 잘 굴러가기 위해서는 밑에 바퀴가 빠르게 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그리고 이런 행사를 준비하는 것도 좋지만 되도록 나중에 참가하는 쪽이 되었으면 좋겠다.
파견) D+136 2018.12.21. (금)
<Workshop>
ㆍ 2018.12.17. ~ 18. 동안 Trincomalee 지역으로 Workshop을 다녀왔다. 아침 6시에 일어나 씻고 밥을 먹은 뒤 20인승 버스를 타고 Trincomalee 지역으로 향했다. 스리랑카 직원들은 버스에서 완전 신이 났다. 버스 안에서 소리 지르듯 이야기를 나누고 놀러 가는 길에 자지 말라고 버스에서 자꾸 깨운다. 좁은 좌석과 주변 소음에 잘 자지도 못했지만.
ㆍ 출발하자마자 거의 바로 아침을 먹는데, 우리는 전날 남은 음식을 먹고 왔기에 배가 그리 고프지는 않았다. 차 한 잔, 빵 한 조각을 맛있게 먹고 본격적으로 출발했다. Trincomalee는 목적지이고 중간에 사파리에 들린다는데, 오후 3시쯤이 되어야 동물들이 슬슬 나온다니까 그때까지는 Polonnaruwa에 잠시 들리기로 했다. Polonnaruwa에 도착했지만, 입장료가 무려 5,000루피이기에 입장은 포기하고 주변 유적지를 잠시 들렸다가 호숫가를 걸었다. 무더운 날씨였지만 나름 걸을만했다. 그곳에서 잠시 걷고 사파리를 보러 떠났다. 어떻게 알고 이곳엘 왔는지 사파리에는 서양인들이 가득했다. 여기서도 외국인은 5,000루피 정도, 내국인은 60루피 정도에 시설을 즐길 수 있었다. 다행히도 Residence Visa를 인정해 주어서 우리도 저렴한 가격에 들어갈 수 있었다. 사실 사파리 안에는 많은 동물이 있다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Off Road를 달릴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ㆍ 밤늦게 숙소가 있는 Trincomalee에 도착했다. 돼지고기를 구워 먹는다며 고기 잔뜩, 술 잔뜩 샀다. 고기가 잘 익지는 않았지만 정말 밤이 새도록 먹었고, 먹다가 지쳐 나는 방에 들어왔다. 어른들에게 밤에 화투치고 노시라고 건네 드렸는데, 정말 밤새도록 화투를 치셨다고 한다. 정말 대단한 체력이신 듯했다.
ㆍ 아침으로는 해장용 라면을 끓여 먹고, Trincomalee까지 온 목적인 바다에 들어가려 했지만, 바다 앞에 빨간 깃발이 서 있었다. 파도가 높고 거세서 들어가기 힘들단다. 알고 보니 지금은 여행 시기가 아니라 바다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힘들단다. 결국, 바다를 만나러 이까지 왔지만, 발만 퐁당 담그곤 다시 돌아가야 했다. 돌아오는데 다시 예닐곱 시간, 다들 마을로 돌아갔지만 나는 비자 연장을 하러 다시 콜롬보로 향했다.
파견) D+153 2019. 1. 7. (월)
<벌써 2019년. 스리랑카 6개월 차>
ㆍ 처음 스리랑카에 왔을 때는 '첫 외출을 떠날 때 즈음 반년이 지나 있겠지'라고 어렴풋이 생각했는데, 생각보다는 빨리 그 시기가 왔다. 벌써 20%가 훌쩍 지났구나. 군대로 치자면 일병이 조금 넘는 시기이다. 아직도 땅을 다듬고 있는데 내가 스리랑카를 떠날 때까지 버섯 나오는 것을 볼 수 있긴 할까 싶다. 처음 올 때 성과를 낼 생각 말고 1년간 꾸준히 지켜봐야지 생각했는데, 자의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해야 할 것만 같다.
ㆍ 연말에 대사관에서 ODA 유관기관 만찬 행사가 열렸다. 한 해에 한 번씩 스리랑카에서 원조 활동을 하는 기관과 단체가 모여 서로의 성과를 공유하고 경청하는 행사였다. 참여 기관은 KOICA를 필두로 KOTRA, EXIM, KOPIA 등이 참여하였고 우리 단체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어차피 성과 발표는 소장님이 할 터이니 우리 단원에게는 축하 공연을 부탁하셨다. 원래는 KOICA 봉사단과 KOPIA의 인턴들도 모두 축하 공연을 준비한다기에 승낙하였는데, 막상 행사장에서 공연하는 인원은 나와 동규 둘밖에 없었다.
행사에 참여하는 내빈의 나이대와 분위기를 생각해서 가수 유재하의 ‘사랑하기 때문에’라는 곡을 선곡하여 약 3일간 열심히 준비했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했던 무대와는 너무 다른 탓에 너무 놀랐다. 설명은 Garden Party라 들었었는데, Garden이 아니라 강당에서 식이 진행되었고 심지어 피아노는 행사장 밖인 복도에 있었다. 마이크도 따로 없다는 말을 듣고 조금 황당하기도 했다. 없으면 없는 대로 공연을 했는데, 현장에서 호응을 참 잘해주셔서 감사했다. 그리고 평소에 먹고 싶었던 초밥과 회 종류를 잔뜩 먹고 돌아왔다. 대사관저를 살면서 처음 방문해 보았는데, 생각과는 많이 다른 분위기라 놀랐다.
ㆍ 그리고 매년 말에 일 년간의 성과를 종합하고 다음 해의 사업 계획 및 예산 작성을 해야 한다. 이제 사업지에 배정되어 업무를 알아가고 있는데, 결과 보고 및 이듬해 사업 계획서 작성에 대해서 보조해 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Walpola는 물론 Kudagama, Pitiyegama, Hewadiwela까지 전부 다 우리가 만들어야만 했다. 그 몇 개의 문서를 만드는 데 꼬박 2주가 걸렸다. 그렇게 저번 달 말에는 콜롬보에 계속 눌러살았다. 먹고 싶었던 한식도 많이 사 먹기도 했다.
파견) D+183 2019. 2. 6. (수)
<최근에 느끼는 것들>
ㆍ 일단 우리 가족이 스리랑카를 한 번 다녀왔다. 스리랑카 남쪽을 돌아보았는데, 시즌이라 그런지 예쁜 곳도 많았다. 근데 역시 관광 물가는 비싸도 너무 비싸다. 가족, 가이드, 운전사 몫까지 다 챙기려니 4~5일 여행에 거의 300만 원 정도를 썼다. 정말 여행하기는 좋지 않은 나라. 앞으로는 호캉스나 잔뜩 해야겠다.
ㆍ 그리고 국제 개발은 확실히 나랑 잘 맞는 것 같지는 않다. 평생 이렇게 외국을 떠돌며 살고 싶은 마음도 조금은 있지만 사실 '지금의 나는 행복한가?'를 물었을 때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물론 스트레스도 많이 없고 심적/물리적/시간적 여유가 있긴 하지만 이것이 '진정 내가 원하는 삶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아직은 새로운 맛이 가끔은 있지만, 점차 무뎌지면서 매너리즘에 빠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
ㆍ 그에 더불어 앞으로 '뭘 해 먹고살 건지'에 대한 고민이 부쩍 늘어난다. 정말이다. 무얼 하면서 살아야 하나 하는 고민이 계속해서 이어진다. 수많은 가능성과 절대적인 시간을 받는 이곳이 그런 점에서는 확실히 좋다. 모르겠다. 그러면서도 기회의 땅에 독특한 아이템을 팔고 싶은 생각이 든다. 물론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스리랑카도 충분히 기회의 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러 가지 가능성을 염두에 두는 중이다.
ㆍ 며칠 전 우연히 Kegalle 시내에서 걷고 있는 동양인을 발견하였다. 우리가 위치한 Kegalle 지역은 관광지도 아닐뿐더러, 분명 여행자 같은 모습이 아니라 말을 걸어 보았는데 JICA에서 일하고 있는 봉사단원이었다. 이름은 ‘타카세 에미’라고 했고, Kegalle의 한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고 있다고 했으며 가끔은 현지인들에게 간호 교육도 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파견 기간이 한 달밖에 남지 않았다고 했는데 일본어를 구사하는 나를 보고는 본인이 귀국하기 전에 친구를 한 명 소개해주고 귀국하겠다고 약속했다.
며칠 후 어느 날 밤에 ‘에미’ 씨에게 전화가 오더니 이제 막 스리랑카로 막 부임 온 ‘리나’라는 단원을 소개해주었고, 본인은 스리랑카 땅을 떴다. 그렇게 ‘리나’라는 단원을 알게 되어 조금씩 교류를 시작하게 되었다.
ㆍ 영어도 어느 정도, 일본어도 어느 정도, 싱할라어도 어느 정도 만들어야 하는데. 하루하루 고민이 이어지는 밤이다.
ㆍ 새마을 2기 후임 단원들이 며칠 전 스리랑카로 도착했다. 어떤 사람들일까.
파견) D+196 2019. 2.19. (화)
ㆍ 오늘은 Poya Day이다. 스리랑카에서는 매달 보름달이 뜨는 날은 신성한 날이기에 모두 일을 제쳐두고 근처 절에 기도하러 간다. 하지만 서호현 위원님이 계시는 한 계속 출근이다. 물론 출근한다고 해서 그다지 크게 일이 있는 것은 아니다. 출근한다는 것 자체가 중한 일이다.
ㆍ 스리랑카에 넘어온 지 벌써 7개월 차. 나에겐 소리소문 없이 새 사랑이 찾아왔다. 일본 여성이다. 92년생 도쿄 출신, 우에무라 리나. 처음 만난 것은 동규가 우연히 Kegalle에서 만난 '타카세 에미' 씨의 덕이 크다. 에미 씨는 2년간의 스리랑카 생활을 마치고 곧 귀국을 앞둔 JICA 단원이었고, 그분을 한 번 뵌 이후로 여차저차 다른 JICA 단원도 소개를 받았는데 그게 지금 바로 나와 만나게 된 ‘우에무라 리나’이다.
사실 처음 만났을 때는 별생각 없었다. 그저 젊은 여성 일본인을 만난다는 생각, 가까이 있으니 이왕이면 예쁘장하게 생겼으면 좋겠다는 생각. 처음 만난 그녀는 확실히 무색무취의 느낌이었다. 빼어나게 예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비호감도 아니었고, 딱 여성 평균 정도 되는 키에 자그마한 몸을 가진 '스테레오 타입' 그 자체의 젊은 일본 여성이었다. 하지만 적당하고 평범하다는 것이 이렇게도 편하게 다가오는지 몰랐다. 기차 타고 한 시간 반, 적당히 떨어진 서로의 거주지에 KOICA & JICA의 적절한 유대감, 빼어나지도 않은 외모가 외려 순수해 보이는 듯싶기도 하고. 큰 특징 없는 성격이 다가가기에 편했다.
처음 만난 지 2개월, 5번의 만남을 거친 끝에 우린 손을 맞잡았다. 아마 그녀의 마음을 빼앗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그녀의 생일날이 아니었나 싶다. 생일날을 기념하기 위해 나는 2시간이 넘는 시간을 써가며 그녀에게 나아갔고, 오랜만에 만난 우리는 따뜻한 밥 한 끼와 따뜻한 대화 몇 마디를 다정하게 속삭였다.
다음 약속을 잡을 때 즈음 그녀가 나에게 마음을 연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내게 1박 2일로 여행을 할 것을 제안했고, 나는 기꺼이 받아들였다. 원래의 목적지는 'Nuwara Eliya'였지만 갑자기 사정이 생겨서 여행을 가지는 못했다. 처음에는 여행을 떠난다는 생각에 당연히 설레었지만, 3일간의 시간을 같이 보내며 그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알 수 있었다. 그녀 역시도 나를 꽤 오랜 시간 전부터 이성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의 감정으로 좋아하고 있다는 것, 그것으로 충분하다. 어찌 보면 여기 남아 있을 이유와 또 삶의 낙을 하나 찾았다.
ㆍ 확실히 여기서 마음의 여유가 많이 생겼다. 무엇이든 급하지 않고 타인과 다툴 일이 적다 보니 조금 더 마음을 드넓게 무엇이든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미운 사람들은 물론 밉겠지만 마음을 조금 더 열고 한 발 더 다가갈 수 있는 용기가 생긴 듯하다. 정말, 평화롭다. 정말, 마음이 잠잠하다.
파견) D+198 2019. 2.21. (목)
<일에 관해>
ㆍ현지에서 협동조합을 하나 결성하는 것은 꽤 복잡한 절차를 가진다. 일단 우리가 어떤 사업을 진행할 것인지에 대해서 사업 설명회를 개최하고 조합원을 모집한다. 조합원을 모집하면 투표를 통해 임원단을 모집하고, 3번 이상의 자체 회의를 진행해야 한다. 이때 회의록을 꼭 작성해야 하고, 3회 이상의 회의록이 완성되면 스리랑카 협동조합국에 협동조합 인가 신청을 할 수 있다.
약 1달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인가 허가가 나면 협동조합 정관을 만들고 앞으로 협동조합국의 보호를 받을 수 있고, 또한 약간의 혜택을 받는다. 협동조합에서 물건을 생산하면 그 물건에 대한 보증을 스리랑카 정부가 지는 역할도 있고, 정부에서 제공하는 협동조합 관련 각종 교육을 받을 수 있다. 또한, 정부로부터 지원금을 받거나 위문품을 받을 수도 있다. 그래서 스리랑카에서 사업을 진행할 때 가장 우선하여해야 하는 것이 이 협동조합 결성과 등록이다.
ㆍ 일은 아직 일단 큰 재미는 없다. 별로 관심이 없는 분야라 그런가 '건축'에 대해서 코끼리 뒷다리 만지듯 배우고는 있지만 그렇게 흥미가 생기지는 않는다. 일이라는 것도 능동적인 것보다 수동적인 것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고 일을 한다기보다는 하루하루 시간을 죽이고 있다는 표현이 더 옳을 수도 있겠다. 일에 대한 재미와 흥미를 못 찾으니, 그래서인지 밖에서 자꾸 낙을 찾으려 하는 것 같다. 리나를 만나는 것도 비슷한 맥락. 좋은 사람도 맞지만, 삶의 낙을 찾았다는 것에 의의가 더 크다. 여기서 지내야 할 이유와 에너지를 얻은 것 같다.
ㆍ 스리랑카 생활 7개월 차. 아직 아무것도 배운 것도 없고, 망망대해에 떠 있는 기분. 본국으로 돌아가려면 무려 500일이 넘는 시간이 남았고, 체력은 벌써 다 떨어졌는데 그저 지치기만 할 뿐이다. 날은 무척이나 더워지는데, 하고 싶은 것은 따로 없다. 무기력하다.
내가 만약 유학을 할 일이 생기더라도, 이렇겠지. 이렇게 금방 지치고 싫증이 날 수도 있겠지. 이렇게 나약한 내가, 나 자신이 앞으로 40년이 넘는 긴긴 세월을 잘 버텨낼 수 있을까. 체력이 약한 게 문제인가. 아니면 정신력이 약한 게 문제인가. 앞으로 수없이 마주칠 무기력함을 물리치는 힘이 바로 체력일까.
ㆍ 리나와 어느 정도 관계를 진전한 뒤로는 결코 밤이 외로워지진 않는다. 오히려 쓸데없는 것에 시간과 에너지가 낭비되는 느낌. 차라리 그 시간에 운동이나 더 하고 싶다. 몸과 영어, 경험, 언어 4개만 만들어서 나가자. 지금보다는 더 활동적인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란다.
파견) D+202 2019. 2.25. (월)
<그녀와 첫 여행>
ㆍ 리나와 Nuwara Eliya에 다녀왔다. 원래는 동규, 소장님, 선신호 선생님과 남해 쪽을 둘러보고 올 생각이었으나 일정이 한 주 밀리는 바람에 이번 주는 리나와 놀고 다음 주에 회사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이 사실을 알리고 우리는 즉흥적으로 Nuwara Eliya로 향했다. 가는 길은 무척 구불구불, 멀미를 참아내느라 애를 많이 썼다. Nuwara Eliya에 가서는 저번에 꼭 들러보고 싶었던 Grand Hotel로 가서 Afternoon Tea를 마셔 보고, 같이 맛있는 밥과 커피 등을 마시면서 오랜만에 참 좋은 시간과 좋은 밤을 보내고 돌아왔다.
ㆍ 사실 2019년에 맞아 들면서 자그마한 목표도 하나 가지고 있었다. 올해부터는 좀 Sexual 하게 살아 보자고. 사실 또래들에 비해 경험이 적기는 했고. 경험이라, 처음 몇 번은 두근대는 가슴을 부여잡고 어찌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었다. 쿵쾅대는 심장을 보며 이 느낌이 과연 죄책감인지 두려움인지 설렘인지 단추를 풀면서도 한참 고민했었다.
첫 경험은 사실 뭐 어떻게 하다 보니, 여자의 몸에 들어갔고 여차저차 어느 순간 첫 경험은 끝나 있었다. 물론 느낌은 무척이나 좋고 황홀했다. 하지만 그것 이후로 뚜렷한 경험이나 별 다른 것이 없었다. 여자친구는 꾸준히 사귀어 왔지만 어떻게 관계를 만들어나가야 하는 것인지 전혀 몰랐고, 궁극적으로 내 여자의 몸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잘 몰랐다. 하지만 마음가짐도 이렇게 먹은 김에 상대의 몸을 사랑해 주는 방법을 배우기로 했다. 내가 여태까지 남들에게 들었고, 여타 매체를 통해 접한 것들이 정답인 줄 알았다. 하지만 공부를 하고 연구를 하다 보니 알게 되었다. 여자의 몸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사랑스럽게 어루만지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그렇게 하니 확실히 무언가가 다른 게 느껴졌다. 지금이 되어서야 나는 여자의 몸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