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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사고(思考)의 실종(失踪) 그리고 메마른 영혼

by 여행사 작가 류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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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에 한 발짝 더 익숙해질수록, 나의 사고는 한 발짝 더 멀어진다. 의심과 비판은 이미 사라져 버린 지 오래된 가치이고 타인의 의견에 대한 무조건적인 수용, 그리고 그의 의견에 동조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책임에서의 자유가 나를 감싼다. 누군가의 말을 전적으로 듣는다는 것은 언제나 그를 탓할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지며, 내가 위험에 처할 때라면 언제든 누군가를 탓하고 도망갈 수 있음을 의미한다. 오늘 직장에서 ‘내 이름이 불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라는 안일한 생각이나, ‘나만 아니면 된다.’라는 일신 안일주의가 내 육신을 완전히 헤집어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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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이따금씩 나는 내 사고가 실종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스스로 연구하고 탐구하는 것보단 타인이 전해주는 정보와 지식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해 버린다. 어떻게 보면 지식을 습득하는 방식을 이런 방식으로 아주 쉽고, 편하고, 또 빠른 방법만 찾는 것만 같다. 가령, 경제에 대해서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면 관련 서적을 읽거나 보고서를 보며 직접 사고하는 것이 아닌, 영향력 있는 전문가의 말 한마디를 더욱 신뢰하며 아무런 비판이나 의심 없이 그들의 말을 그대로 답습하는 내 모습을 발견하곤 한다. 종국의 내 지식수준은 곧 누구의 말을 들었는지, 혹은 누구의 강의를 들었는지로 귀결된다. 모든 지식의 습득 방식이 이러하다. 타인이 알려준 지식을 그대로 답습하고, 그들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암기하고, 또 그들이 암기했던 방식을 앵무새처럼 따라 한다. 자격증 취득을 위한 학습에서는 이러한 경향이 더욱 짙어진다. 지식을 쌓기보다는 빠르게 문제를 맞혀 시험에 합격하는 것이 우선이므로, 지식에 대한 학습보다는 문제는 맞히는 기술만 나날이 늘어간다. 결국 학습 속의 사고는 없고, 그저 모니터 안 강사의 발언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점수를 위한 공부만을 반복한다. 사고의 상실이다. 그저 머릿속으로 넣어주는 정보를 외우기에도 벅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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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경향은 취미 생활에도 여실히 드러난다. 창의적으로 혹은 창조적으로 생각하고 또 표현하는 것은 이미 멀리 떨어졌고, 남들이 이미 만들어 놓은 창작물들을 하루하루 소비하기에 급급하다. 그래서일까, 쉬는 시간이 되면 멍하니 남들이 만들어 놓은 창작물을 하릴없이, 그리고 아무 의미 없이 들여다보고만 있다. 나의 휴식시간의 여가 역시도 남들이 만들어 준다. 휴식마저도 수동적인 태도로 점철되어 버린 것이다. 타인이 만들어 주지 않은 나의 여가 시간은 어떻게 보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난 그저 누군가가 나의 시간을 재미있게만 만들어 주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멍하니 침대에 누워 허상의 세상만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화면 속에는 정말 많은 것들 것 담겨 있다. 정치인들의 싸움을 보다가, 금세 페루 여행을 하다가, 또 지방에서 일어난 안타까운 인명 교통사고를 보다가, 이내 헐벗은 복장을 입은 이성이 나를 향해 눈빛을 보내고 있다. 타인이 흩뿌려 놓은 수많은 정보들은 자그마한 화면을 통해 순식간에 내 사고를 움켜쥐어 버리고, 난 그것들을 아무 의심 없이 무조건적으로 수용한다. 이내 나는 자극적인 정보가 가져다준 정보들에게 한껏 고양되어 세상 많은 것들을 배척하고, 또 두려워하고, 또 노려보고 있곤 한다.
흡사, 내가 세상의 모든 정보를 조절하며 취합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실상 나는 정체도 모르는 이의 의견에 완전히 휘둘려 조종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나의 영혼은 조금씩, 아주 조금씩 메말라 버리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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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생활을 살아가는 것에 있어서 아무런 지장이 없다. 비판 없이 하루를 살아도 내 밥벌이에 손가락질하는 이 없고, 화면 속 강사가 외치는 말을 전적으로 신뢰하면 수험 문제가 마법처럼 풀리기 때문이다.
다만, 무조건적으로 수용하고만 있는 나 자신의 모습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순간들이 찾아온다. 의지가 사라지고, 또 용기가 사라진 나를 바라보는 순간이다. 의지는 아주 쉽게 증발해 버린다. 편안한 침대에 누워 원하는 것을 검색한다면 무엇이든지 손쉽게 수많은 정보와 원하는 모든 것을 쥘 수 있었다. 침대 위에서 쉽게 이룰 수 있는 것들이 많고, 그것들이 끊임없이 나를 유혹한다. 유혹에 넘어가는 것은 예삿일이다. 매 순간 가슴속 심지와 의지는 달콤한 유혹 앞에서 말라 버린 나뭇잎처럼 바스락 으스러져 버린다. 끊임없이 연구하고, 탐구하는 정신은 없다. 한 순간에 검색하여 궁금증을 해결해 버리고, 관심사는 또 다른 분야로 넘어간다. 의지와 집요함은 없다. 그저 그렇다.
유사급부에서는 점점 더 용기를 잃어버리는 것을 느끼는 순간도 있다. 수많은 매체가 공포 마케팅을 빌미로 내게 공모심을 주입하고 있다. 불의에 맞서 싸우다가 결국 조직에서 내쳐지거나, 얼굴도 모르는 행인을 도왔다고 외려 범인으로 몰려버린 이야기를 들을 때면, 그것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선 잔뜩 움츠린 채 그나마 가슴속에 남아 있던 모든 용기들도 달아나버린다. 그래서 자기 목소리를 내고, 특히 불의에 맞서 싸우는 이를 볼 때면 대견한 마음이 가득하면서도, 최근 들어 한편으로 참 안쓰럽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정의 이후엔 폭풍처럼 밀려 올 보복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그 보복의 무게가 한없이 무겁다는 것을 알기에, 발 벗고 나서는 이가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하다. 나는 용기가 없어지고, 또 하루하루 비겁해지는 것을 느낀다. 이런 내 모습을 자각할 때면, 점점 영혼이 메마름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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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아무 사고도 하지 않으며 살고 싶지는 않기에, 나는 계속해서 글을 쓰고 생각의 자취를 남기려 노력한다. 영혼의 샘이 아주 메말라 버리기 전에 어떻게든 사고하고, 영혼의 물가를 머금기 위해 하염없이 날갯짓을 이 백지 위에 휘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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