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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이 되고 나서, 참 다양한 곳에서 생활했었다. 여태까지 머물렀던 곳을 하나하나 세어보니 20세가 된 이후에 무려 15번이나 거주지를 옮겼던 것을 알게 되었다. 워낙 새로운 공간을 좋아하기 때문에 거소지를 옮기는 것이 썩 나쁘지 않았었지만, 사실 매번 살림살이를 옮길 때마다 매번 도전하는 기분이었다.
새로운 공간에 익숙해지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그곳의 지리를 잘 익혀야 하고, 또 그곳에서 새로 만나는 사람들을 사귀어야 했다. 이것은 순전히 나의 생존을 위한 만남이었다. 약 15번의 이사 끝에 몸소 깨우친 것 중 하나는, 새로이 뿌리내릴 곳에 아는 사람을 사귄다면 적응을 훨씬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새로 이주한 지역에서 친구를 사귀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했었다. 언어 교환 모임도 나가보고, 독서 모임도 나가보고, 종교 활동에도 나가 보았다. 그곳에서 새로 사귄 친구들은 역시 내가 그 지역에 잘 적응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지만, 결국 우리 사이의 지속성을 가지기는 매우 힘들었다. 나는 어렸고,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몰랐었기에 새로운 인연을 만나면 곧 헤어지기 일쑤였다.
정말 내 삶은 이러했었다. 한 지역에 막 정이 들어갈 참이면, 새로운 도전이라는 이름으로 신상의 변화가 생기면서 곧 그곳을 떠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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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이 된 이후의 내 삶을 비유하자면 마치 민들레와 같았다. 어딘가에 용케 뿌리내렸다 싶으면 곧 바람에 날려 또다시 알지 못하는 곳으로 떠밀려 가는 것만 같았다. 몇 번의 같은 과정을 거치며, 난 언제까지 이렇게 떠돌아다녀야만 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자연스레 피어올랐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지역에서 만나는 이들에게 싶은 정을 주기가 참 무서웠다. 나 스스로도 새로운 곳에 적응하면서도 ‘곧 떠날 곳’이라 간주하며 새로 만나는 관계에 최선을 다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모든 것을 두고서, 새로운 곳으로 떠밀려 갈 때면 언제나 마음 한편이 헛헛했다. 나는 도대체 언제 한 곳에 뿌리내리고 살아갈 수 있을까, 고민은 점점 커져만 가는 것 같았다.
그제야 유랑하는 삶을 점점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한 곳에서 뿌리내리고 꾸준히 살아가기 위해서는 또 많은 요소의 안전장치가 필요했다. 안정적인 돈벌이가 필요했고, 안정적인 관계가 필요했으며, 또 안정적인 주거 공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 중 하나라도 이루어내기 쉬운 것은 없었다. 한 직장에 번듯한 내 자리 하나를 꿰차는 것도 무척이나 고된 일이었으며, 만약 내 자리를 얻는다고 하더라도 그 자리를 지켜내는 것 역시도 매일같이 도전이고, 시련이며, 또 경쟁이었다.
사랑도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다. 내 짝을 찾아내는 것부터 가는 바늘에 실을 꿰듯 어려웠지만, 참 불행하게도 겨우내 내 마음에 들어온 이성들은 나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듯했다. 나는 도대체 언제 진득한 관계를 만들어 영원의 사랑을 이루어 낼 수 있을까, 늘 생각하면서 또 걱정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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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목표가 생존이자 정착으로 초점이 맞추어지자, 앞으로 해야 할 것들이 그런대로 명확해졌다. 민들레 같은 삶은 벗어던지고, ‘안정’과 ‘정착’을 위한 요소들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사회에 진출할 나이가 되면서 내 모든 정력은 ‘생존’에 쏟게 되었다. 적성에 맞지 않았음에도 일단 손아귀에 일감을 쥐어 보았고, 더 나은 조건의 거주지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돌아다녔다. 부단한 노력과 억센 운이 따라주었기에 어떻게 입에 풀칠할 수 있을만한 직장은 겨우 구했고, 청년 시기까지는 큰 걱정 없이 임대할 수 있는 정부의 임대 주택을 정말 기적적으로 구했다.
그리고 남는 것은 관계였다. 그래도 관계는 내게 가장 할만한 것이라고 느껴지기도 했다. ‘안정’을 찾아야겠다며 생각한 순간부터 누군가 나의 이상형을 물어볼 때면 늘 결혼하고 싶은 여성상을 이야기했었다. 그러면서 언제부터인가, 결혼할만한 상대를 찾아내는 것도 내가 해내야 하는 일생의 큰 도전과제처럼 느껴졌었다. 그래서 내 삶의 안정감을 선사해 줄 운명의 짝을 찾아 참 열심히도 나다녔었다. 어느 곳에서 나의 짝을 찾을지 알 수 없기에, 소개팅이니, 파티니, 동창회니 하면서 인연이 이어질 수 있는 모든 사교 모임에 빠지지 않고 참여했었다. 하지만 내 의도가 너무나도 빤히 읽혔던 탓일까, 내 마음에 드는 이를 적극적으로 찾으려고 하니 반대로 멀리 도망가버리는 듯했다. 혹자는 일생을 열심히 살다 보면 문득 일상 속에 찾아온다고 일러주었는데, 사실 내게는 전혀 와닿지 않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마음 한 편으로는 그 말을 꼭 믿어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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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으로 내 삶에 집중하기 시작하면서, 내가 만나기를 원하는 여성상을 하나하나 적어 보았더니 무려 33개에 달하는 희망사항이 나오는 것을 보고 나 조차도 깜짝 놀랐다. 나도 이렇게나 바라는 것이 많은 것처럼, 상대 역시도 내게 바라고 원하는 것이 많을 것이다.
그러면서, '같이 뿌리내릴 이를 찾는 것도 이렇게나 힘들구나'라는 것을 다시금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내 조건에 꼭 맞는 완벽하는 이를 찾기는 불가능하므로, 내가 원하는 희망사항에서 하나씩 지우고, 비우고, 또 타협해 나가는 과정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기에, 이미 본인의 짝을 찾아 뿌리내리고, 또 아름답게 살아가는 지인들의 모습을 보면 참 부러우면서도 한 편으로 조바심이 들기도 한다. 나는 저들처럼 언제 뿌리를 내리게 될까, 자신의 선택을 확실하게 한 이들을 보며 내 마음속 거울을 비쳐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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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돌고, 또 돌아다녔던 민들레의 꿈은 드디어 정착하는 것에 닿았다. 일생의 숙제인 그 삼박자를 나는 과연 성공적으로 이루어 낼 수 있을 것인가. 몇 년 후에 나는 또 어떤 상황에 처해있을까, 매일을 기도하고, 또 기대하고, 또 기다리는 심경으로 살아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