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할머니들에게 받았던 내리사랑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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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살아가며 유독 기억에 남는 할머니들이 있다. 첫 글에는 내 기억에 또렷이 남아 있는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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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나를 끔찍이도 아껴주신 나의 친할머니 이야기다. 사실 나는 우리 집안의 독자(獨子)이다. 우리 친할머니께서는 무려 여덟 명의 자식을 가지셨는데, 그중 아들은 딱 두 명이었다. 할머니께서는 첫째로 우리 큰 아버지를 가지셨고, 그리고 일곱째 자식으로 우리 아버지를 두셨다. 큰 아버지는 슬하에 딸을 세 명 낳았고, 우리 아버지는 누나와 나를 낳았다. 그렇게 나는 우리 집안의 유일한 남손(男孫)이 되었다.
그렇게도 기다리고 기다리면 손자 소식이었으니, 할머니는 나를 유별나게 아껴주셨다. 집안 모임이라도 할 때라면 할머니는 언제나 내게 떡 하나라도 더 챙겨주셨고, 내게 늘 ‘장군’이라는 호칭으로 불러주셨다. 나는 할머니의 이유 있는 호의를 정말 만끽했다. 우리 친누나가 보내던 매서운 질투의 눈살을 알아채지도 못한 채, 나는 그저 할머니를 만나는 것이 좋았고, 할머니를 만날 날을 기다렸다. 할머니를 만나는 날이면 나는 그녀의 품에 정말이지 폭 안겨 있었다.
우리 할머니는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셨는데, 할머니께서는 유품으로 내게 직접 만든 작은 손지갑을 남겨주셨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받은 그 지갑 안에는 여전히 그 체취가 남아 있었고, 그 향기를 맡을 때면 나를 엄청 아껴주시던 할머니와의 옛 기억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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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신입생 시절, ‘농민학생연대활동’을 했을 때의 기억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당시 우리는 경상북도 칠곡군에 있는 한 마을에 파견되어 농민들과 숙식하며 일정을 수행했는데, 경상북도 칠곡군이 ‘인문학 마을’로 이름을 날리고 있어서 우리는 여느 농촌 활동처럼 농촌 일을 돕는 것보다, 농민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만드는 활동을 진행했다. 마을에서는 아무런 소양도, 경험도 없는 청년들을 먹여주고 재워주며 아주 정성스레 대접해 주셨다. 우리가 약 일주일간 농촌에 머물며 했던 유일한 일은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이야기를 귀담아듣는 것이 전부였는데, 그들은 까마득한 후배 청년들에게 자신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아주 절절히 말씀해 주셨다.
나는 당시 만 80세의 마을의 최고령이신 ‘여갑연’ 할머니의 이야기를 담당하여 듣게 되었는데, 할머니는 본인의 아들 이야기를 꼭 빼놓지 않고 담담히 말씀하셨다. 할머니의 아드님은 80년대에 서울대학교를 입학하는 등 성공 가도를 달리는 듯했으나, 계속해서 사법시험에 낙방하면서 좌절을 맛보았고, 현재는 귀농을 해서 살아가는 아들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이야기해 주셨다. 자식이 좌절을 겪는 모습을 지켜본 어머니의 심정을 들을 때는 나 역시도 정말 가슴이 아팠고, 지금은 비록 사회가 원하는 성공은 아니더라도 자기 자신의 인생을 만족하며 살아가는 아들의 모습을 말씀하실 때는 모성애의 위대함을 깊이 느낄 수 있었다.
할머니의 이야기를 천천히 들으며 ‘노인 한 명이 죽는 것은 도서관이 하나가 사라지는 것과 같다’라는 격언이 피부로 확 와닿음을 느꼈다. 할머니가 전해주신 이야기는 그야말로 다채로웠고, 내용이 가벼우면서도 무거웠으며, 웃음과 해학이 가득했다. 나는 여갑연 할머니를 통해 ‘인문학’을 계속해서 해야겠다는 강한 다짐을 했고, 큰 울림을 주신 할머니는 여전히 내게 귀인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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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내게 물리적으로 정말 큰 도움을 준 할머니도 있다. 스리랑카에 파견되었을 때 같이 생활했던 할머니도 늘 기억한다. 현지에 파견된 후 약 두 달간 언어 교육을 받고, 현지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실제로 현지인의 집에서 약 일주일간 생활하면서 피부로 적응하는 기간을 가졌다. 당시 나는 정말 산 중턱에 사는 한 노부부 집에 배정받았고, 그 집의 작은 단칸방에서 일주일간 생활하며 현지인들은 어떻게 살아가는지 직접 보고 느낄 수 있는 기회였다. 짧은 기간이지만, 나의 거처가 노부부 집이었기에 사무실에서 일을 마치고 낯선 집에 들어가노라면 할머니께서 늘 입구에서 날 맞아 주시며 따뜻한 차 한 잔과 다과를 내어주셨다. 그리고 꼭 오늘 하루가 어땠는지 다정하게 여쭤봐 주셨다.
말은 잘 통하지 않았지만 내 생활에 불편한 점은 없는지, 식사는 입에 잘 맞는지 등 세심히 내 생활을 돌보아 주실 때마다 가슴속으로 따스함이 느껴졌다. 동양에서 온 아무것도 모르는 한 학생을 스리랑카의 한 할머니는 자식 대하듯 소중히 대해주셨고, 홈 스테이가 끝나고 그 집을 떠나야 할 때는 아쉬움의 눈물을 글썽이시며 직접 키운 바나나를 한가득 내 손에 들려주셨다. 할머니가 내어주신 사랑의 불씨는 내 가슴속 한 공간에 여전히 따뜻하게 빛을 발하고 있다. 그날의 할머니를 생각한다면 언제나 늘 감사한 마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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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여행하면서 만난 할머니도 있다. 스리랑카 북부 자프나(Jaffna) 지역을 여행할 때 일이다. 자프나 여행의 꽃은 자프나 지역 서쪽에 배를 타고 들어가면 볼 수 있는 이름다운 산호섬 ‘델프트(Delft) 섬’을 구경하는 것이다. 델프트 섬은 규모가 꽤 크기 때문에 관광하려면 차량을 꼭 대여해야만 했다. 하지만 나는 배를 타고 델프트 섬에 거의 도착했을 때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행히도 선착장 입구 쪽에는 나 같은 뜨내기 여행객을 노린 호객꾼들이 많았는데, 홀로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한 동양 청년이 안쓰러웠는지, 한 서양 할머니께서 자신들의 차로 동행할 것을 권해주셨고, 나는 할머니 덕분에 정말 편안하게 여행을 시작할 수 있었다. 할머니들은 스위스에서 오셨고 스리랑카를 여행하고 있었는데 스리랑카어를 구사하는 나를 보며 정말 신기해하셨고, 여행하며 간단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아주 마음 편하고 즐거운 기억을 만들어 주셨다. 특히 델프트 섬 동부의 에메랄드 빛 해변을 할머니들과 함께 바라보며 느꼈던 상쾌함은 여전히 내 가슴속에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 아름다운 풍경을 만나게 해 준 유럽 할머니들에게 항상 감사함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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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렇게, 알게 모르게 할머니들의 적극적인 도움과 이유 없는 사랑을 많이 받았다. 그리고 언제나 내가 사랑한 할머니들의 존재를 떠올릴 때면 배시시 웃음이 난다. 내가 받았던 사랑만큼의 깊이 있는 애정을 타인에게 무한히 쏟는 것은 아마 어렵겠지만, 나 역시도 부족함 없는 내리사랑을 할 줄 아는 어른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