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호자도 선생님도 아닌, 내가 도대체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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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시절, 우연한 기회에 닿아 청소년 활동을 참여했던 적이 있다. 고등학생 당시, 나는 한창 연극 연출과 입시를 준비하면서, 동시에 문화 기획자가 되기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친구가 자신이 이전에 청소년 활동을 했었다면서 사진을 보여주었고, 나도 자연스레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마침 그때 청소년들이 스스로 지역 문화 축제를 기획하고 진행하는 행사의 기획단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 소신 있게 그 활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것을 계기로 나는 ‘청소년 활동’이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현실로 실현해 본 것이 처음이라 나 자신에게는 아주 귀중한 경험으로 남아 있다. 그때의 인연이 닿아, 청소년을 벗어난 성인이 되었을 때도 가끔씩 청소년 활동을 도와주는 활동가의 역할을 맡은 적이 있다.
나는 정식 활동가가 아니라 단체에서 필요로 할 일이 있을 때 가끔 일손을 돕는 정도였다. 대체로 내가 필요했던 곳은 단체로 여행을 가는 경우가 많았다. 활동가 선생님들은 대부분 여성분들이 많으셨기에 여행을 갈 때 남학생들을 인솔할 수 있는 손이 부족해 내가 가끔 도와드리기도 했다.
나는 그렇게 청소년들과 자주 여행을 다니게 되었다. 내가 주로 만났던 청소년들은 모두 ‘학교 밖 청소년 [1]’이었다. 그들이 학교를 떠난 이유는 정말 다양했다. 가정적인 이유가 있었고, 마음의 문제가 있었으며 또 종교적인 사유도 있었다. 학교를 떠난 이유가 어찌 되었든 여행지에서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며 서로 교류할 수 있는 시간이 충분했었다.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면서 정말 망치를 얻어맞은 듯이 어지러운 순간들이 있었다. 정말, 내가 알지 못하는 세상의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평소에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가정 폭력이나 성폭력, 도박과 유흥, 그리고 사이비 종교의 이야기가 나왔다. 음 주 후에 늘 행패를 부리는 부모님으로부터 도망치듯 여행을 왔다는 아이의 이야기, 알고 지내던 지인에게 성폭력을 당해 결국 낙태까지 했던 아이의 이야기, 양친이 모두 사이비 종교에 빠져서 정규 교육을 그만두고 사이비 교회의 사설 교육장을 학교 대신에 나간다는 아이의 이야기 등 내 일상생활에서는 감히 겪을 수 없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되었다.
당시 나는 한참 타로점을 배우고 있었기에 가끔 지인들에게 타로점을 봐주곤 했었다. 내가 감히 그들의 세계나 상처들을 쉽게 이해할 수도, 깊이 공감할 수도, 섣불리 조언을 할 수도 없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들이 궁금해하는 타로점을 봐주면서 은근히 그들에게 무한한 ㅇ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려고 노력했다. 보호자도, 정식 활동가도 아닌 내가 잘 알지도 못하는 그들의 삶에 개입하기엔 무리가 많이 따랐다. 그저 그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순간을 재미있게 만들어주는 것이 나의 오롯한 역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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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여행을 다녀와서 적잖은 충격에 빠질 때도 있었다. 아이들이 해준 이야기의 주제도 그러했지만, 만난 지 오래되지도 않은 내게 이렇게 속 깊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 놀라우면서도 그 의도를 알지 못했다. 흔히 남들이 이야기하는 위험 신호를 나에게 보냈던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전문 청소년 활동가를 찾아가 아이들이 내게 이러한 이야기를 했었다며 들었던 말들을 간략하게 전달드렸다. 선생님께서는 잠잠히 듣더니 아무래도 대화의 소재 자체가 자극적이다 보니, 그러한 화두를 꺼내면서 타인의 관심을 받고 싶어 하는 심리가 있을 수도 있겠다는 이야기를 해 주셨다. 그렇게 자극적인 이야기를 계속 머릿속에 담아두고 살다 보면 오히려 내 정신상태를 해칠 수 있다며 그저 그러한 이야기는 물 흐르듯 흘려듣는 게 좋겠다며 조언해 주셨다. 그렇게 그때부터는 손발이 저릿한 이야기에 크게 동요하지 않으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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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난 후 그때 알게 된 여자 아이 중 한 명에게 뜬금없는 새벽 시간에 연락이 왔다. 밤이 늦은 시간이었는데, 수화기 너머로는 노래방 소리가 들리고 했었다. 대충 어떤 상황인지 느낌이 왔지만 나는 애써 모르는 척할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안부를 전한다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다가 애써 모르는 척 시간이 늦었으니 그만 놀고 일찍 집에 들어가라며 이야기를 건네었다. 그 순간 멀리서 “저기야, 몇 번 방 들어가라.”라고 이야기하는 중년 남성의 목소리를 들어버리고 말았다. 전화를 끊고 나고서 참으로 허탈함과 아쉬움이 느껴졌다. 그래도 내가 보기에 안쓰럽다는 이유로 그녀의 삶 깊숙이 관여한 자격은 당연히 없었다. 정말 안타까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속으로 생각하고, 또 기도하고, 빌어주는 것이 응당한 정답이 맞을까 싶다. 언젠가 깨우침이 많아진다면 이러한 무력감을 견뎌낼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될 수 있을 것인가.
사실 나는 나 조차도 잘 모르는데, 타인의 인생을 알아가면서 같이 살아가는 일은 언제나 힘든 일이 되지 않을까 싶다.
[1] 학교 밖 청소년: *초등학교ㆍ중학교ㆍ고등학교의 정규 교육과정을 마치지 못하고 퇴학, 자퇴, 제적, 유예, 휴학, 면제, 미취학, 미진학 등의 상태에 있는, 즉 재학 중이 아닌 청소년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