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군가가 제 이름을 부르지 않게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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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매일 아침잠에서 깰 때, 업무를 시작하기 전에, 그리고 하루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 때 늘 기도하는 것이 있다. ‘오늘도 제발 무탈하게 지내게 해 달라’면서 말이다.
회사 생활을 하면서 이루고 싶은 유일한 나의 소원은 ‘오늘도 무탈하게 버텨내는 것’이다.
직장에서 내 이름이 소환된다는 그 자체는 대부분 긍정적인 내용이 아니었다. 일을 잘했다며 상을 주는 일은 없었고, 내가 무슨 실수나 잘못을 했을 때 회사에서는 그것을 캐치하고 그 잘못에 대해 문책을 할 때 언제나 이름이 불려진다.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부른다는 것이 이렇게나 두려운 일인지 몰랐다. 아무래도 나의 생계와 직결되어 있는 장소에서 문책성 질책을 듣노라면 정말 내 몸의 혼이 모두 빠져나갈 만큼 정신이 어질어질하다. ‘내가 왜 그런 실수를 했을까.’하는 후회와 자괴감 속에 내 자존감은 저 밑바닥으로 푹 꺼져 버린다. 내 자존감이 깊은 심해 속으로 잠수할 때면 어떤 것을 할 의지가 완전히 사라져 버린다. 별다른 활력소가 없는 일상생활에서 꺼져버린 내 자존심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회복 탄력성이 낮다는 뜻이겠다. 내 마음을 다시 평온한 상태로 되돌려 놓을 때까지 아무것도 못하고 그저 흘러가는 시간을 바라보아야만 하니 그 시간들이 너무 아쉽게 느껴질 때가 많다.
그렇게, 직장 안에서 내 자존감을 지키는 것이 나에겐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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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나의 마음이 이렇게 되어 버렸을까. 사실 혼이 나는 것은 내게는 아주 익숙한 일이다. 자라오면서 칭찬을 받은 일보다 혼이 났던 경험이 훨씬 많다. 내가 조금이라도 잘못을 하거나 누군가의 눈에 거슬리는 행동을 할 때면 언제나 그 누군가 내게 그것을 이야기하고, 처벌을 가했다. 집안 어르신께 예의 있게 하지 않았다며 나를 혼내던 아버지의 고함 소리, 별 일 아닌 것으로 친구와 싸웠을 때 선생님께 들었던 꾸지람, 행동을 빨리 하지 않는다며 내게 욕을 하던 군대 선임들, 나는 참 다양한 사람에게 혼나며 자랐다. 늘 나의 주변을 따라왔던 것이기에 그것은 늘 익숙했고, 어쩔 때는 별 타격도 없었다.
그래도 자라면서 받았던 질책들은 모두 개선의 가능성 혹은 앞으로 똑같은 행동을 하지 말라는 애정 어린 시선으로 내게 일러주었던 것들이라 생각한다. 나 역시도 언제나 그렇게 생각했었다. ‘나는 어리니까, 실수하는 것이 당연하다.’라면서 똑같은 실수만 반복하지 말아야지 생각하며 나에게 물어오는 문책들을 별다른 무거움 없이 받아들였었다. 그렇게 나는 청춘의 특권을 마음껏 누렸다. 그래도 나는 붙임성이 좋은 편이라,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면서 다시 살갑게 그에게 다가갈 때면 대부분 상대는 화를 누그러트렸다. 그런 과정 역시도 나에게 성장점이 된다며 굳게 믿었던 날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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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사회에서 질책을 듣는 것은 단연 그 무게부터 달랐다. 나의 잘못 끝에는 늘 돈 문제가 걸려 있었고, 누군가는 내가 만들어낸 돈 문제를 책임져야 했다. 내가 되었던, 내 상사가 되었던.
나의 잘못은 곧 돈의 손실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완벽주의와는 거리가 아주 멀었던 나 역시도 돈이 걸린 문제를 해결할 때에 몇 번이나 확인에 확인을 거쳐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역시도 사람이며 언제나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어느 순간부터 회사에서 두각을 보이는 것보다, 실수 없이 하루를 넘어가는 것에 방점이 찍히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나의 모든 행동들이 소극적이면서 방어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사회와 조직이라는 것은 100개를 잘해도 1개를 잘 못한다며 나를 물고 뜯는다는 것을 돈 문제에 엮이며 뼈저리게 깨우치게 되었다.
신입 사원일 때는 나도 당연히 눈에 띄고 싶었고, 조직의 일원으로서 탁월한 성과를 한 번 내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 초심은 만 2년 만에 모두 사그라들고 말았다. 최대한 누군가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고, 조용히 내가 해야 할 일만 마무리하며 무탈하게 침대에 눕는 것이 직장생활 중 유일한 바람이다. 정말, 눈에 띄고 싶지 않다. 용기는 점점 줄어들어가면서 어느 순간부터 나의 내면에는 비겁한 어린아이 하나만이 자리 잡고 있는 듯하다.
이런 시선에서 주위를 돌아본다면, 꾸준히 눈에 띄는 성과를 내거나 혹은 조직에 가감 없이 쓴소리를 하는 분들이 늘 대단하게만 느껴진다. 눈에 띈다는 것은 그만큼 시련을 많이 겪었다는 뜻일 것이고, 조직에 대한 쓴소리 이후에는 반드시 후환이 따라오는 것을 알기에 밥벌이를 하는 곳에서의 두려움을 이겨내는 그 용기가 참 존경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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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잘 모르겠다. 그저 오늘만, 평안하고 무탈히 잘 넘길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오늘도 그러하기를 하늘에 진심으로 바란다. ‘오늘은 제발 누군가가 제 이름을 부르지 않게 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