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황 증상을 벗어나기 위한 나의 분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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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 내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었다. 가족의 죽음으로 심리적인 지지대가 무너졌던 어느 날, 헛헛한 마음을 달래려 학교 근처 호숫가 주변을 산책하던 중 난생처음 공황 발작을 경험하게 되었다.
걷던 중에 순간 바닥이 한 번 휘청이더니 심장이 미친 듯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고, 정신은 어지러웠으며, 숨도 잘 쉬어지지 않는 듯했다. 만약 정신줄을 잘못 놓으면 그대로 죽음의 심연 안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이러한 증상을 느끼는 순간 나는 같이 산책하던 대학 후배에게 응급실로 데려다 달라면서 급히 호소했고, 응급실로 달려가는 택시 안에서 ‘내가 죽을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난생처음으로 하게 되었다. 생애 처음 느껴본 공포심이었다.
이내 응급실에서 몸에 온갖 장치를 달아 놓고서 많은 검사를 받았지만, 젊은 신체에서는 아무런 문제점이 발견되지 않았다. 의사 선생님은 내게 ‘공황 발작’을 겪은 것 같다며 짧게 일러 주셨고, 그때 나는 ‘공황’이라는 증상에 대해서 처음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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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우리 가족은 49일간 세상을 떠난 그를 기리는 위령 기도를 바쳤다. 그런데 한 번 공황을 겪고 난 이후부터는 낮게 기도문을 읊조리는 소리가 무척이나 공포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나도 가족들과 함께 위령 기도를 바쳤었지만, 한 번 기도 중 공포감이 찾아온 이후에는 더 이상 아버지의 연옥 생활을 빌어줄 수 없게 되었다. 가족들이 밖에서 기도문을 외울 때면 나는 방에 들어가 귀를 막고서 침대에 가만히 누워 그 기도가 끝날 때까지 가만히 누워있어야 했다. 그냥, 모든 것이 너무나도 무서웠다. 어느 순간부터 무너져버린 내 마음 상태를 보며 다시 예전 같은 일상을 보낼 수 있을까 싶어 눈물이 고이는 날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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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공황을 경험하고 나니, 그 죽음의 공포를 다시는 경험하기 싫었다. 그래서 일상생활 중 나를 놀라게 할만한 모든 것들을 조심했다. 혹여나 길을 걷다 넘어질까 싶어 조심조심 벽을 짚으며 걸어 다니기도 했고, 길을 걷던 중에도 내 심장이 잘 뛰고 있는 것이 맞는지 살펴보기 위해 하루에도 수십 번씩 가슴 위에 손을 대 보았다.
하지만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라고 하면 코끼리만 잔뜩 생각나듯이, ‘공황에 빠지지 말자’라고 굳게 다짐했던 나의 생각은 오히려 온종일 머릿속에 공황 발작에 대한 생각만 가득하게 했다. 조금만 긴장되는 상황이 펼쳐지면 나는 그것이 단순한 긴장인지, 공황의 전조 증상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도망치고만 싶었다. 커피처럼 카페인이 든 음료를 마셔서 심장이 뛰는 것도 카페인 때문인지 공황 때문인지 조차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렇게 좋아하던 커피도 끊었다. 이러한 생활이 이어지니, 일상생활 자체가 너무나도 괴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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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공포심은 취업 준비를 할 때 제일 커다란 걸림돌이 되었다. 나도 사람이기에 새로운 상황에 직면하면 당연히 긴장된다. 그런 상황에 접할 때면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하니, 면접장 안에만 들어가면 정말 코마 상태에 빠져버릴 것만 같았다. 심장이 빨리 뛰면 어느 순간 정신이 나가버릴 것 같아 당연히 나에게 물어 오는 면접관의 질문에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몰려오는 긴장감 속에 빨리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면접관이 내게 질문을 할 때면 공포감에 휩싸여 결코 심도 있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한 번은, 면접장에서 너무 긴장을 한 나머지, 주먹을 꽉 쥐고 있었나 보다. 그걸 본 한 면접관님이 “지원자님, 너무 긴장하셔서 주먹에 힘줄까지 다 보입니다. 나중에 우리 한 대 때리시는 것 아니죠?”하며 긴장을 풀라는 우스갯소리를 했다. 그 소리를 듣고 나는 입으로 웃었지만 속으로는 생존을 다투는 치열한 투쟁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얻어낸 면접의 기회였건만, 속에서 올라오는 공포심이 나의 앞길을 가로막는 것을 느낄 땐 정말 절망의 구렁텅이 안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면접에 대해 좋지 않은 경험들이 축적되기 시작하면서, ‘면접장’이라는 공간 자체도 점점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나, 앞으로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머릿속에 가득 찰 수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빛줄기 하나 없는 터널 안에 갇혀버린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금의 회사, 그리고 나의 상사 님이 그런 나를 구원해 주셨다. 다행히도 면접은 비대면으로 진행되었기에 평소만큼은 긴장되거나 하지는 않았는데, 그 때문인지 인사팀 및 나의 상사 님이 나를 예쁘게 봐주셨고 조직의 일원으로 초대해 주셨다. 그런 상황에 빠졌던 나를 조직의 일원으로 만들어 주셔서 너무나도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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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포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이제는 색다른 종류의 공포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앞으로 혼자 내 밥벌이를 하면서 잘 살아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감이 나 자신을 또 긴장하게 만들었다. 결국 신입사원 교육을 듣는 중에 또다시 공황이 찾아왔다. 공포심에 질려 휴게실로 달려갔고, 간이침대에 누워 한참이나 마음을 달래어야 했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 공포감에 사로잡혀 살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공황에 너무 지친 나머지 오히려 다음에 공포감이 찾아오면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한 번 맞서 싸워보는 것은 어떨까 생각했다.
나의 공황 증상은 이러했다. 주로 손 끝, 발 끝과 같이 신체의 먼 곳부터 몸이 저려오기 시작해, 그 저림이 점점 심장 쪽으로 다가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늘 심장까지 저림이 옮겨 붙어 심장마저 멈추어 버리면 어떡하나 하는 공포심이 들었었다. 하지만 다음번에는 심장까지 저림이 옮겨 붙든 말든 한 번 끝까지 버텨보기로 했다.
그 다짐을 한 다음 날 점심시간이 지난 오후 교육 시간 중 공황 증상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비대면 온라인 수업 시간이었다. 나는 마치 만반의 전투 준비를 마친 한 명의 전사가 된 듯, 진정한 나와의 싸움을 시작했다. 예상했듯 몸 저림은 발 끝에서 시작되어 점점 심장 방면을 향해 다가왔다. 종아리를 지나, 옆구리를 지나, 배꼽까지 저림이 올라왔다. 마치 수십 명의 사람들이 주무르듯이 내 온 하체가 저렸다. 당장 어디라도 도망가서 눕고 싶은 공포감이 찾아왔지만 계속 심호흡을 하며 계속 그 저림과 맞서 싸웠다. 그러면서 나조차도 그 저림이 어디까지 옮겨 붙을지 궁금했던 것이다.
몸 저림은 결국 명치까지 옮겨 붙을 때 신기하게도 처음 저림이 시작했던 발 끝부터는 서서히 증상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파도를 치듯이 몸 저림은 가슴과 목을 타고서 머리 위 정수리까지 올라왔는데. 상체로 올라올수록 하체의 떨림은 없어지기 시작했다. 정수리까지 옮겨 붙은 저림은 온 얼굴을 거쳐 마침내 코 끝을 간지럽혔는데, 그것을 끝으로 내 몸에 모든 부위에서 점점 그 증상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나의 공포심은 발 끝에서부터 시작해 코 끝에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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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황으로부터 처음 승리한 순간이었다. 내 마음속에서는 정말 끓어오르는 희열을 느꼈다. 나와의 싸움에서 승리를 확신하고 시계를 바라보니 약 1시간이 지나있었다. 그 뜻은 온몸의 저림이 1시간이나 계속되었었다고 생각해 주면 될 것이다. 그 한 시간이 내 일상생활의 모든 것을 바꿔주었다. 앞으로는 공황이 찾아돠도 더 이상 겁이 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극복하는 방법을 알아내었기 때문이다. 그저 호흡하며 버티면 되었다.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는 방법은 예상외로 너무나도 간단했으며, 그것을 알게 된 곳은 다름 아닌 그렇게나 나를 긴장하게 만들던 사무실의 내 책상 위였다.
그리고 정말 신기하게도 공황을 극복하는 방법을 알게 되자마자 이전만큼 자주 공황이 찾아오지도 않았다. 조금이라도 증상이 느껴지는 나는 심호흡을 하며 단단하게 버텨 내었고, 공황이라는 존재는 내 코 끝만 잠시 간지럽힌 뒤 곧 달아나 버리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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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으로 드러나는 성과는 아니지만, 내 인생에서 가장 치열했었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이 공황장애를 극복하게 된 것이다. 사람에 따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으나, 나에게는 정말 황금보다 더 커다란 자산이다. 심호흡을 하며 참는다는 것은 더 나아가 분노와 짜증의 순간이 찾아오더라도 다른 부정적인 감정을 쉬이 넘길 수 있는 강력한 힘을 만들어 주었다.
이는 나에게 결코 잃고 싶지 않은 젊은 날의 훈장과도 같은 경험이자 능력이다. 나는 죽음의 공포심이 찾아온대도 결코 두렵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