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혹시 취미가 있으신가요?”
사람들을 알아갈 때 의례 묻고 또 대답하는 질문이다. 그리고 누군가가 내게 쉬는 시간에 무엇을 하는지를 이야기를 한다면, 나는 곧 마음속에서 상대를 향한 느낌과 인상을 순식간에 단정 지어 버린다. 가령, 누군가가 ‘스키’가 취미라고 내게 이야기해 준다면 그 사람이 어떤 성격을 가졌는가는 모두 잊어버린 채 그저 그 사람을 외향적이고 활발한 성격으로 기억하고, 반대로 누군가 ‘다도’가 취미라고 한다면 그 사람의 내면이 어떻든 간에 그를 조용하고 침착한 사람이라며 단정 지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만큼이나 ‘취미’라는 단어가 가져다주는 무게감이 내게는 크게 다가오나 보다.
사실 돌이켜보면 나조차도 그렇게나 다원적이고 복잡한 생각을 거친 후에 겨우 하나의 행동을 내딛으면서 어떻게 타인의 행동에는 이렇게나 쉽고 단순하게 판단해 버리나 싶기도 하다.
가령 나는 평생 몸이 굳고 뻣뻣한 것이 남들에게 이야기하지 못하는 나만의 콤플렉스였는데, 그것을 한 번 극복해 보기 위해 요가를 배운 적이 있다. 당시에 주변 친구들에게 ‘요가를 배우고 있다.’라고 이야기한다면 내가 오랫동안 요가를 해서 유연하고, 또 코어 근육이 탄탄하겠다며 쉽게도 오해 섞인 맞장구를 쳐주곤 했다. 나는 그게 아니라며 빠르게 손사래를 치면서, 어쩌면 나 역시도 늘 그렇게 쉽게나 남들에게 색안경을 쓰고 바라봤던 것은 아닌가 하며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취미’라는 단어는 나에게 자신의 삶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표상이라고 생각한다.
-
나 역시도 삶을 살아가며 참 많은 종류의 취미를 경험하고, 만들었다. 참으로 다양한 계기를 통해 다채로운 취미를 접할 수 있었는데, 가장 먼저 소개하고 싶은 취미는 ‘국악’이다.
국악을 처음 접한 곳은 다름 아닌 군부대였다. 군대에서는 매주 수요일 오전에 주간 정신교육을 마치고 나고 오후에는 전투 체육을 했다. 전투 체육이란 별 것 없이 평소에 하던 체력 단련보다 훨씬 더 강한 강도로 체육 활동을 하는 것이었는데, 천성이 움직이기 싫어하는 성격이라 나는 전투 체육 시간이 별로 좋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매주 전투 체육시간에 ‘국립국악원’에서 재능 기부 형식으로 국악 교육을 하니 체육 활동과 국악 학습 중에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군대에서의 국악이란 늘 단조롭기만 한 군대 생활 중에 색다른 자극이 될 수 있을 것 같았고, 사실 그렇게나 벅차던 체육 활동을 빠질 수 있다는 것에 이끌려 나는 국악 학습을 선택했다.
국악 교육에서는 기본적으로 사물놀이의 네 축인 북, 장구, 징, 꽹과리에 더해서 버나 돌리기, 열두 발 상모 춤 등 풍물놀이를 배울 기회도 주어졌다. 나는 거기서 처음 보았던 열두 발 상모 춤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열두 발 상모란 우리가 흔히 보는 짧은 끈이 아니라, 열두 발이나 되는 긴 상모를 돌리는 것이었다. 두 팔을 양 옆으로 폈을 때 한 손 끝에서 다른 손 끝까지의 거리를 ‘한 발’이라고 하는데 그것을 열두 개나 셀만큼 긴 상모를 돌리면서 춤을 추는 것이다.
아무래도 상모의 길이가 엄청나게 길다 보니 요령 없이 돌리면 금방 지쳐버리고 만다. 머리 힘으로 돌리면 금세 두통이 찾아오고, 목 힘으로 돌리면 담도 금방 찾아와 지쳐버리고 만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그 상모를 한 번 돌려보고 싶어 머리를 빙빙 돌렸었는데 결국 머리가 아니라 어깨를 사용해서 돌리니 자연스럽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걸 매주 연습하다 보니 어느 정도 상모를 돌리는 요령이 생겼고, 강사님들이 알려주는 자세를 곧잘 따라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남들에게는 자랑스럽고 당당하게 ‘나, 열두 발을 돌릴 줄 안다.’라고 이야기했고, 그 이야기를 하는 마음속에는 어느샌가 자신감이 가득 차 있었다.
명절마다 우리 부대에서는 장기 자랑을 했는데, 그 무대에서 열두 발 상모 춤을 추게 되면서 정식으로 나의 취미 생활을 남들에게 보여주는 경험을 했다. 참 감사하게도 우리 부대의 사령관님이 나의 공연을 보시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고, 휴가증을 가득 챙겨 주시면서 나의 국악 취미에 샘솟는 자신감을 안겨주셨다. 취미 생활로 처음 타인에게 칭찬을 듣고, 또 실질적인 결과물을 처음 만들어 낸 순간이었다. 그렇게, 전역 이후에도 꾸준히 국악을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실제로 전역 이후에도 강사님을 찾아가 몇 번 더 국악을 배우기도 했다. 하지만 전역 후 다시 대학생이 된 나는 국악을 배우기 위해 매달 내야 하는 강사료와, 수도권에서 진행되는 강습의 교통비를 감당하지 못했고, 결국 지방으로 내려간 이후엔 자연스럽게 국악과 한 걸음 멀어지게 되었다.
-
두 번째로는 ‘서핑’을 취미로 가질 때의 이야기이다. 스리랑카에서 생활할 때 한 바다 마을에 갔는데 그곳에서는 저렴한 가격으로 서핑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당시 그곳에서는 강사를 대동하고 1시간 동안의 서핑 강습과 실습을 하는데 약 15,000원이 안팎의 가격이었고, 이는 엄청나게 저렴한 가격으로 고급 취미를 배울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습에서는 어떻게 보드 위에서 자세를 잡는지, 언제 보드에서 일어나야 하는지, 보드에서 뛰어내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 상세히 알려주었고 어느 정도 자세가 몸에 익으면 실습도 할 수 있었다. 강사님은 파도가 오는 시기에 따라 서핑 보드를 파도 방향을 따라 강하게 밀어주었는데 나는 강사님이 밀어주는 보드 위에서 중심만 잘 잡으면 되었다. 그럼에도 균형을 잡지 못해 바다 위로 나자빠지기 일쑤였다. 간헐적으로 균형을 잡고서 바람을 가르며 파도를 탈 때면 온몸에서 상쾌함과 짜릿함이 느껴졌다. 바람을 가를 때면 짠 바닷물을 먹던 고통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는 듯했다.
다만 서핑을 타는 것에는 체력적인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다지 오래 타지는 못했다. 아니, 단 한 시간만이라도 파도에 허덕이다 보면 체력이 모두 동나버려 몸 전체가 쇳덩이를 이끄는 듯 무거워지기 일쑤였다.
그래서 나에게 ‘서핑’이라는 것은 늘 감질맛이 나는 취미로 느껴졌다. 서핑의 쾌감은 오랜 시간 즐기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래도 내 두 발로 바람을 가르는 기분은 너무나도 상쾌했고, 일상생활 중에도 그 쾌감이 문득문득 생각나곤 했다. 그래서 나는 그때부터 틈만 나면 파도를 타러 바닷 마을로 떠났다.
어느 정도 혼자 파도를 타도 되겠다는 감이 잡혔을 땐 서핑 보드만 빌려 혼자 바다로 달려가곤 했다. 타인의 도움을 받지 않고 순수히 내 손과 발로 파도 위에 올라서서 바람을 가를 때의 느낌은 또 색달랐다. 혼자서 이 쾌감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만족스러웠다. 그렇게 서핑을 탈 때면 정말 정신을 놓고 즐겼다. 그러다 한 번 일이 터졌다.
파도는 당연히 밀물과 썰물이 있는데, 간혹 밀물보다 썰물이 훨씬 더 강하게 느껴지는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정말 바다가 내 온몸을 잡아당기는 듯한 느낌이 들곤 한다. 하루는 조금 전까지도 친구들과 물장난을 치며 놀다가 순간 정신을 차리니 나 혼자만 외딴곳에 떨어져 있다는 것을 인지했다. 그 순간 위기를 직감하고 해변까지 걸어갈 생각으로 바다에 몸을 담갔는데 아뿔싸, 발이 땅에 닿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순간 패닉이 찾아왔다. 조금만 더 지체하면 강한 썰물 때문에 하염없이 바다로 떠내려갈 형국이었다. 그래서 나는 정말 미친 듯이 육지를 향해 팔을 휘두르며 패들링을 했다. 정말 다행히도 어느 정도 패들링을 하다 보니 겨우 땅 끝에 발이 닿는 듯했고, 겨우내 서핑 보드와 지친 몸을 이끌고 해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물의 무서움을 온몸으로 실감한 순간이었다. 한 번 바다에서 식겁한 이후로는 쉽게 바다에 몸을 담그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그때부터는 나의 안전이 담보될 수 있는 취미 위주로 시선이 돌아가게 되었다.
-
그 이후로는 정말 수많은 취미들을 시도해 보았다. 위스키를 마셔보고, 일본어 회화 모임을 나가보고, 책을 읽은 후 독서 모임을 나가보고, 야구 경기를 챙겨보고, 노래의 가삿말을 써보고, 부동산을 공부해 보고, 트로트를 불러보는 등 정말 수많은 취미들을 겪어 보았다. 그 취미들을 통해서 나의 내면을 바라보기도 하고, 나의 약점을 보완하면서도 또 강점을 부각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렇게, 내가 보여주고 싶은 나의 모습이 여실히 취미 생활에 드러나는 것만 같다.
내가 겪어 본 취미들 중에는 비록 꾸준하고 오랫동안 했던 것을 몇 없지만, 그래도 내가 했던 많은 것들이 나를 표현하고 내면을 단단하게 만들어 주었다고 생각한다. 무언가를 하고 싶은 마음은 크지만, 오랫동안 지속하지 못하는 것이 또 나의 특징 중 하나라는 것을 취미 활동을 통해 알게 되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어쩌면 나는 나 자신을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다.
“저는, 취미를 만드는 것이 취미입니다.”
사람들을 알아갈 때 의례 묻고 또 대답하는 질문이다. 그리고 누군가가 내게 쉬는 시간에 무엇을 하는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면, 나는 곧 마음속에서 상대를 향한 느낌과 인상을 순식간에 단정 지어 버린다. 가령, 누군가가 ‘스키’가 취미라고 내게 이야기해 준다면 그 사람이 어떤 성격을 가졌는가는 모두 잊어버린 채 그저 그 사람을 외향적이고 활발한 성격으로 기억하고, 반대로 누군가 ‘다도’가 취미라고 한다면 그 사람의 내면이 어떻든 간에 그를 조용하고 침착한 사람이라며 단정 지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만큼이나 ‘취미’라는 단어가 가져다주는 무게감이 내게는 크게 다가오나 보다.
사실 돌이켜보면 나조차도 그렇게나 다원적이고 복잡한 생각을 거친 후에 겨우 하나의 행동을 내딛으면서 어떻게 타인의 행동에는 이렇게나 쉽고 단순하게 판단해 버리나 싶기도 하다.
가령 나는 평생 몸이 굳고 뻣뻣한 것이 남들에게 이야기하지 못하는 나만의 콤플렉스였는데, 그것을 한 번 극복해 보기 위해 한 번 요가를 배운 적이 있다. 당시에 주변 친구들에게 ‘요가를 배우고 있다.’라고 이야기한다면 내가 오랫동안 요가를 해서 유연하고, 또 코어 근육이 탄탄하겠다며 쉽게도 오해 섞인 맞장구를 쳐주곤 했다. 나는 그게 아니라며 빠르게 손사래를 치면서, 어쩌면 나 역시도 늘 그렇게 쉽게나 남들에게 색안경을 쓰고 바라봤던 것은 아닌가 하며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취미’라는 단어는 나에게 자신의 삶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표상이라고 생각한다.
-
나 역시도 삶을 살아가며 참 많은 종류의 취미를 경험하고, 만들었었다. 참으로 다양한 계기를 통해 다채로운 취미를 접할 수 있었는데, 가장 먼저 소개하고 싶은 취미는 ‘국악’이다.
국악을 처음 접한 곳은 다름 아닌 군부대였다. 군대에서는 매주 수요일 오전에 주간 정신교육을 마치고 나고 오후에는 전투 체육을 했다. 전투 체육이란 별 것 없이 평소에 하던 체력 단련보다 훨씬 더 강한 강도로 체육 활동을 하는 것이었는데, 천성이 움직이기 싫어하는 성격이라 나는 전투 체육 시간이 별로 좋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매주 전투 체육시간에 ‘국립국악원’에서 재능 기부 형식으로 국악 교육을 하니 체육 활동과 국악 학습 중에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군대에서의 국악이란 늘 단조롭기만 한 군대 생활 중에 색다른 자극이 될 수 있을 것 같았고, 사실 그렇게나 벅차던 체육 활동을 빠질 수 있다는 것에 이끌려 나는 국악 학습을 선택했다.
국악 교육에서는 기본적으로 사물놀이의 네 축인 북, 장구, 징, 꽹과리에 더해서 버나 돌리기, 열두 발 상모 춤 등 풍물놀이를 배울 기회도 주어졌다. 나는 거기서 처음 보았던 열두 발 상모 춤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열두 발 상모란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짧은 상모 끈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열두 발이나 되는 거대한 길이의 상모를 돌리는 것이었다. 두 팔을 양 옆으로 폈을 때 한 손 끝에서 다른 손 끝까지의 거리를 ‘한 발’이라고 하는데 그것을 열두 개나 셀만큼 긴 상모를 돌리면서 춤을 추는 것이다.
아무래도 상모의 길이가 엄청나게 길다 보니 요령 없이 돌리면 금방 지쳐버리고 만다. 머리 힘으로 돌리면 금세 두통이 찾아오고, 목 힘으로 돌리면 담도 금방 찾아와 지쳐버리고 만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그 상모를 한 번 돌려보고 싶어 머리를 빙빙 돌렸었는데 결국 머리가 아니라 어깨를 사용해서 돌리니 자연스럽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걸 매주 연습하다 보니 어느 정도 상모를 돌리는 요령이 생겼고, 강사님들이 알려주는 자세를 곧잘 따라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남들에게는 자랑스럽고 당당하게 ‘나, 열두 발을 돌릴 줄 안다.’라고 이야기했고, 그 이야기를 하는 마음속에는 어느샌가 자신감이 가득 차 있었다.
매 명절마다 우리 부대에서는 장기 자랑을 했는데, 그 무대에서 열두 발 상모 춤을 추게 되면서 정식으로 나의 취미 생활을 남들에게 보여주는 경험을 했다. 참 감사하게도 우리 부대의 사령관님이 나의 공연을 보시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고, 휴가증을 가득 챙겨 주시면서 나의 국악 취미에 샘솟는 자신감을 안겨주셨다. 취미 생활로 처음 타인에게 칭찬을 듣고, 또 실질적인 결과물을 처음 만들어 낸 순간이었다. 그렇게, 전역 이후에도 꾸준히 국악을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실제로 전역 이후에도 강사님을 찾아가 몇 번 더 국악을 배우기도 했다. 하지만 전역 후 다시 대학생이 된 나는 국악을 배우기 위해 매달 내야 하는 강사료와, 수도권에서 진행되는 강습의 교통비를 감당하지 못했고, 결국 지방으로 내려간 이후엔 자연스럽게 국악과 한 걸음 멀어지게 되었다.
-
두 번째로는 ‘서핑’을 취미로 가질 때의 이야기이다. 스리랑카에서 생활할 때 한 바다 마을에 갔는데 그곳에서는 저렴한 가격으로 서핑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당시 그곳에서는 강사를 대동하고 1시간 동안의 서핑 강습과 실습을 하는데 약 15,000원이 안팎의 가격이었고, 이는 엄청나게 저렴한 가격으로 고급 취미를 배울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습에서는 어떻게 보드 위에서 자세를 잡는지, 언제 보드에서 일어나야 하는지, 보드에서 뛰어내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 상세히 알려주었고 어느 정도 자세가 몸에 익으면 실습도 할 수 있었다. 강사님은 파도가 오는 시기에 따라 서핑 보드를 파도 방향을 따라 강하게 밀어주었는데 나는 강사님이 밀어주는 보드 위에서 중심만 잘 잡으면 되었다. 그럼에도 균형을 잡지 못해 바다 위로 나자빠지기 일쑤였다. 간헐적으로 균형을 잡고서 바람을 가르며 파도를 탈 때면 온몸에서 상쾌함과 짜릿함이 느껴졌다. 바람을 가를 때면 짠 바닷물을 먹던 고통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는 듯했다.
다만 서핑을 타는 것에는 체력적인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다지 오래 타지는 못했다. 아니, 단 한 시간만이라도 파도에 허덕이다 보면 체력이 모두 동나버려 몸 전체가 쇳덩이를 이끄는 듯 무거워지기 일쑤였다.
그래서 나에게 ‘서핑’이라는 것은 늘 감질맛이 나는 취미로 느껴졌다. 서핑의 쾌감은 오랜 시간 즐기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래도 내 두 발로 바람을 가르는 기분은 너무나도 상쾌했고, 일상생활 중에도 그 쾌감이 문득문득 생각나곤 했다. 그래서 나는 그때부터 틈만 나면 파도를 타러 바닷 마을로 떠났다.
어느 정도 혼자 파도를 타도 되겠다는 감이 잡혔을 땐 서핑 보드만 빌려 혼자 바다로 달려가곤 했다. 타인의 도움을 받지 않고 순수히 내 손과 발로 파도 위에 올라서서 바람을 가를 때의 느낌은 또 색달랐다. 혼자서 이 쾌감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만족스러웠다. 그렇게 서핑을 탈 때면 정말 정신을 놓고 즐겼다. 그러다 한 번 일이 터졌다.
파도는 당연히 밀물과 썰물이 있는데, 간혹 밀물보다 썰물이 훨씬 더 강하게 느껴지는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정말 바다가 내 온몸을 잡아당기는 듯한 느낌이 들곤 한다. 하루는 조금 전까지도 친구들과 물장난을 치며 놀다가 순간 정신을 차리니 나 혼자만 외딴곳에 떨어져 있다는 것을 인지했다. 그 순간 위기를 직감하고 해변까지 걸어갈 생각으로 바다에 몸을 담갔는데 아뿔싸, 발이 땅에 닿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순간 패닉이 찾아왔다. 조금만 더 지체하면 강한 썰물 때문에 하염없이 바다로 떠내려갈 형국이었다. 그래서 나는 정말 미친 듯이 육지를 향해 팔을 휘두르며 패들링을 했다. 정말 다행히도 어느 정도 패들링을 하다 보니 겨우 땅 끝에 발이 닿는 듯했고, 겨우내 서핑 보드와 지친 몸을 이끌고 해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물이 정말 무섭다는 것을 온몸으로 실감한 순간이었다. 한 번 바다에서 식겁한 이후로는 쉽게 바다에 몸을 담그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그때부터는 나의 안전이 담보될 수 있는 취미 위주로 시선이 돌아가게 되었다.
-
그 이후로는 정말 수많은 취미들을 시도해 보았다. 위스키를 마셔보고, 일본어 회화 모임을 나가보고, 책을 읽은 후 독서 모임을 나가보고, 야구 경기를 챙겨보고, 노래의 가삿말을 써보고, 부동산을 공부해 보고, 트로트를 불러보는 등 정말 수많은 취미들을 겪어 보았다. 그 취미들을 통해서 나의 내면을 바라보기도 하고, 나의 약점을 보완하면서도 또 강점을 부각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렇게, 내가 보여주고 싶은 나의 모습이 여실히 취미 생활에 드러나는 것만 같다.
내가 겪어 본 취미들 중에는 비록 꾸준하고 오랫동안 했던 것을 몇 없지만, 그래도 내가 했던 많은 것들이 나를 표현하고 내면을 단단하게 만들어 주었다고 생각한다. 무언가를 하고 싶은 마음은 크지만, 오랫동안 지속하지 못하는 것이 또 나의 특징 중 하나라는 것을 취미 활동을 통해 알게 되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어쩌면 나는 나 자신을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다.
“저는, 취미를 만드는 것이 취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