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생존 요리의 역사

- 그저 생존을 위한 요리를 만드는 나의 처절한 투쟁기

by 여행사 작가 류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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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살아남기 위해 요리를 만든다. 30대 독거 총각도 이따금씩 주방에서 앞치마를 맨다. 만들 수 있는 요리는 몇 개 없더라도, 열심히 고기를 굽고 생선을 뒤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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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으로 자취를 시작하기 전에는 요리라곤 할 줄 몰랐다. 학교에서는 매 끼니 급식이 주어졌고, 집 냉장고에는 언제나 어머니가 만들어 주신 반찬이 있었다. 그것마저 싫증이 날 때면 귀한 반찬을 놔두고서 라면을 끓여 먹거나, 짜장면을 주문해 먹었다. 부모님께서는 부족함 없이 용돈을 챙겨 주셨고, 그 덕에 배를 주릴 일은 없었다.

처음으로 요리를 접하게 된 것은 전역 이후 본격적으로 자취를 시작하면서부터이다. 부모님께서 보내주시는 용돈이 부족하지는 않았지만, 월세와 관리비를 내고 나면 그리 넉넉하지도 않았다. 매 끼니 음식을 사 먹기는 턱 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교내 식당에서 일을 시작했다. 내가 맡은 일은 음식이 나오면 손님에게 전달해 주는 역할이었지만, 이따금씩 재료 손질을 돕거나 산처럼 쌓인 식자재를 주방 안으로 옮기는 일도 했다. 식당에서 처음으로 식재료를 만졌고, 그야말로 쏟아지는 접시를 닦았다. 주방장님께서는 하루 팔고 남는 재료로 음식을 만들어 주셨고, 자연스레 학생 식당에서 끼니를 해결하는 일이 많았다.
당시 한 시간 정도 일하면 시급을 5,000원 정도 받았는데, 학생 식당에서의 한 끼는 근 5,000원에 달했다. 하루 4시간 정도를 일하고 학생 식당에서 밥을 먹은 뒤, 커피 한 잔을 마시면 하루 벌이는 그것으로 끝이 났다. 대학 생활에서 나에게 돈이란 곧 음식이었다. 학생 식당에서 자발적으로 추가 근무를 했던 날이 있었고, 추가 근무 수당은 식당 내 중식당에서 짜장밥으로 받았다. 이렇게 평일에는 어떻게든 학생 식당에서 끼니를 때웠지만, 문제는 주말이었다. 식당에서 식재료 정리는 하더라도, 조리를 하지 않아서 할 줄 아는 요리가 없었다. 그래서 거의 외식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대학 생활을 하다 보니 술자리가 많았는데, 자리가 파할 때 즈음 미리 시켰던 안주가 좀 남는다면 어김없이 포장해 와서 다음 날 점심으로 대충 데워 먹었고, 저녁에는 또 다른 친구들과의 술자리로 나섰다. 나의 첫 자취의 식사는 학생 식당에서의 요리와 술자리 안주가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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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진짜 문제는 스리랑카 생활을 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전에는 그래도 음식을 챙겨주는 이가 있거나, 여의치 않으면 근처 가게에서 사 먹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스리랑카 시골에는 음식을 사 먹을 수 있는 마땅한 음식점도 없었으며, 있다고 한들 내 입맛에는 완전히 맞지 않았다. 그래서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요리를 시작하게 되었다. 가만히 있어도 내 입에 밥을 밀어 넣어주는 이는 없었다.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그저 굶어야 했기에 생존을 위한 사투를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본격적인 요리는 스리랑카에서 처음 시작했다. 낯선 땅에서 난생처음 요리 책을 보았고, 음식을 조리하는 영상을 찾아보았다. 진간장과 국간장을 구분해서 쓰라는데, 시골 동네 마트에는 ‘Soy Sauce‘라고 적힌 간장 자체를 구하기도 어려웠다. 고급 식재료는 만무하고, 흔히 사용하는 된장과 고추장조차 구하는 것이 하늘의 별따기였다.
매일이 식재료와의 전쟁이었다. 가령 고등어 구이가 먹고 싶은 날에는, 현지 수산시장에서 먼저 고등어를 판매하는지부터 확인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리고 이전까지는 늘 이미 구워져 있거나 손질이 된 상태의 고등어만 보았기에, 생물의 형태가 어떤지 몰랐다. 고등어를 사려고 해도 스리랑카 말로 고등어가 무엇인 줄 몰랐고, 통역을 도와주는 현지인조차도 고등어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수산시장에 깔려 있는 수많은 생선 앞에서 눈알만 데굴데굴 굴리다가 결국 비슷한 느낌의 물고기를 하나 골랐고, 겨우 내장을 파내고 비늘을 벗겼다. 생물에서 구워 본 고등어 요리는 내 입에 비리기만 했고, 조리된 음식을 두고도 먹지를 못하니 그보다 더 서러울 수 없었다. 그리고 스리랑카는 불교를 국교로 삼는 나라라 기본적으로 사회 전반에 금육(禁肉) 문화가 저변에 펼쳐져 있기에 고기를 구하는 일도 엄청 힘든 일이었다. 시골 동네에서 돼지고기를 파는 푸줏간을 수소문해 찾아갔는데, 고기 위에 앉아 있는 수많은 파리떼를 보고 구역질하며 가게를 나올 수밖에 없었다. 내가 먹을 수 있는 고기를 구할 곳은 단 한 곳뿐이었다. 동네 슈퍼마트에서는 냉동 돼지고기를 팔았는데 그나마 그게 삼겹살과 비슷한 느낌이 났다. 그래서 마트에 냉동 고기가 입고되는 날이면 누구보다도 먼저 마트로 달려가 고기부터 집었다.

결국은 익숙한 식재료를 쓸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한국에서 감자는 많이 접해 보았기에 마트에서 감자를 잔뜩 산 뒤 찌고, 볶고, 튀긴 후 온갖 요리에 다 넣어 먹었다. 일주일의 반은 감자 요리를 먹었고, 또 일주일의 반은 달걀 요리를 먹었다. 너무 기운이 떨어지면 냉동 고기를 굽거나, 온갖 재료를 넣고 끓여낸 수육을 만들어 먹었다. 매일같이 마트를 들락거리니 제철에 나오는 과일도 눈에 띄기 시작했다. 평소에 아무 생각 없이 집었던 과일에도 철을 맞으니 훨씬 달콤하다는 것을 이역만리 타지에서 깨달았다. 그래서 스리랑카에서 처음 제철 귤을 발견했을 때는 박스 채로 사 놓고 손톱이 노래질 때까지 먹고 또 먹었다.

이렇게 생존을 위한 투쟁이 계속해서 이어지자, 곧잘 할 줄 아는 요리도 늘어가기 시작했다. 감자채전을 부쳤고, 호박죽을 끓였고, 두부와 버섯을 넣은 된장찌개를 끓였고, 짜장면을 만들겠다며 땀을 흘린 적도 있다. 요리하기 싫은 날에는 동네 KFC에서 짜디짠 닭고기를 사 먹거나, 동네 슈퍼에서 즉석 죽을 사서 먹었다. 기름기 밴 햄버거 패티를 깨물 때면 전신에 피가 도는 듯했다. 매일의 식사는 생존을 위한 투쟁이었다. 살기 위해 먹었고, 매일의 가장 중요한 과업은 대체 오늘은 무엇을 먹어야 하는가였다.
계약 기간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탈 때에는, 드디어 먹고 싶은 음식들을 마음껏 먹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온몸을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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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약 2년간 이렇게 생존 요리를 배워 놓으니 유용하게 활용할 일이 많았다. 일본에서 유학했을 때 현지인 친구들에게 잡채를 만들어 주며 한식의 맛을 보여주었고, 전 세계를 여행하면서도 한식을 만들 줄 아는 것만으로도 많은 여행객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게스트하우스에서 여행객들과 각자 만든 요리를 함께 즐기며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본격적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요리 실력이 빛을 발한다. 매일같이 이어지는 외식에 사 먹는 것조차 지치는 날이면 스리랑카에서 익혔던 음식을 금방 만들어서 한 끼를 해치운다. 익숙한 식재료가 있고, 별다른 기술 없이도 원하는 음식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너무나도 좋다. 알게 모르게 쌓아 올린 커다란 자산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가끔은 요리 교실에 나갈 때도 있다. 또한, 오직 내가 먹을 요리를 하기에 음식을 만드는 시간은 오롯이 나를 위한 시간이다. 그렇기에 생선을 정성스레 굽고 지지다 보면 내 영혼도 살찌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조금이라도 요리를 할 줄 안다는 것이 30대 총각에겐 참 커다란 자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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