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 세계에 역병이 퍼지며 내게 일어났던 일들
-
나는 우리나라에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COVID-19)이 퍼지기 시작할 때 이역만리 외국에 있었다.
사실 나는 대한민국 언론에 코로나 바이러스의 존재가 보도되기 이전부터 그 존재를 미리 알고는 있었다. 당시 나는 스리랑카에 있었고, 현지에서 알고 지내던 중국인 친구가 춘절을 맞아 잠시 고향에 다녀온다며 비행기에 타기 전 나와 만났다. 나는 그녀와 식사하고, 잘 다녀오라며 공항까지 배웅해 주었다. 그녀가 살았던 곳은 우한시(武汉市) 근처의 언스시(恩施市)였는데, 그녀가 귀국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도시가 봉쇄되고 있다는 소식을 내게 전해 주었다. 중국의 우한시를 기준으로 역병이 번지고 있어 이동이 제한되었고, 이내 동네의 모든 아파트 입구를 공안이 지키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그녀가 보내 준 동영상 안에는 집 안에 갇힌 채 창 밖으로 소리 지르고 절규하는 중국인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래서 나는 중국, 특히 우한에서 병이 발병해 퍼지고 있다는 것을 미리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때는 그렇게 파급력이 커질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저 중국에서 일어난 자그마한 사건에 불과할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
그리고 그 병이 곧 한국으로 옮겨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하나, 둘 확진자가 늘어나기 시작하더니 한 종교 단체의 활동을 기점으로 우후죽순 퍼지기 시작했다. 실제로 한국에서 발생한 집단 감염 소식을 스리랑카 뉴스를 통해 보았다. 나와 같이 일하던 현지인 직원들도 내가 지금 스리랑카에 있으니 얼마나 행운이냐며 입을 모아 이야기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병에 걸린 이탈리아 사람이 스리랑카 전역을 관광하고서 자기 나라로 귀국했다는 소식이 들렸고, 당국은 아주 난리가 났다. 스리랑카에 첫 확진자 발생 보고가 이루어졌을 때는 대한민국에서는 이미 마스크 5부제를 시행하는 등 체계를 갖추어 나가고 있을 시기였다. 현지에는 마스크조차 구하기 어려운 실정이었으며, 사회는 그야말로 대혼란을 맞이했다. 그리고 언론에서는 중국에서 시작된 병을 매일같이 다루었고, 그로부터 현지인들은 무차별적인 동양인 혐오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길거리를 돌아다닐 때면 모르는 이가 “야, 코로나!”하고 부르고 지나가는 일은 다반사였고, 괜한 일로 일부러 시비를 거는 이도 많았다. 이에 발끈하여 반발하면 ‘청정한 스리랑카에서 썩 나가라’는 식으로 대답하니 외국인으로서 무어라 대꾸할 말이 없었다.
하루는 현지 택시인 툭툭이를 타고 현지어로 목적지를 이야기한 후 친구 집으로 향했는데, 도착 지점에서 내 얼굴을 본 툭툭이 기사가 화들짝 놀라보니 돈을 안 받고 도망치듯 달아난 적도 있었다. 아마, 동양인이 내미는 지폐에 코로나 바이러스가 묻어 있을까 봐 겁먹었을 확률이 커 보였다. 이외에도 자질구레한 혐오와 차별은 일상적으로 이어졌다.
-
스리랑카 내에 확진자가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자, 당국은 아예 통행금지령을 내렸다. 감염자 확산을 막기 위해 특단의 대책을 쓴 것이다. 저녁 6시부터는 아예 통행이 제한되었다. 실제로 저녁 6시가 지나면 무장한 경찰들만 가끔 거리를 순찰하였고, 고요한 동네 하늘에는 길 잃은 들개 무리의 울음소리만 가득하였다.
통행금지령은 시행되었지만 당장 생계가 급한 이들이 많았다. 하루 벌어 하루 살아가는 이들에게 통행 금지령은 그야말로 재앙이었다. 밥을 굶는 이들도 생겼다. 정부에서는 어쩔 수 없이 사흘에 한 번, 오전 시간에만 통행금지령을 해제하였다. 기껏해야 4시간 정도 주어진 짧은 시간 안에, 나는 수많은 인파를 뚫고 은행 업무와 행정 업무, 그리고 식료품 사재기까미 끝내야 했다. 주어진 시간 내에 모든 일을 완수해야 했기에 통행금지 해제 시간이 되자마자 부리나케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마스크를 구하지 못해 손수건으로 입을 가린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졌고, 그들은 식량을 구하기 위해 마트 주변으로 구름 떼처럼 몰려갔다. 마트 정문부터 몇 바퀴들 둘러싼 채 줄을 선 사람들을 보며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은행 업무를 다 보고 나올 때 즈음이면 식료품이 남아 있지 않을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애초에 포기하는 마음으로 해야 할 일을 느긋하게 처리했다. 마지막 일정으로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간 마트로 향했다. 당연히 모든 물건이 다 팔렸으리라 생각하고 마트 입구로 들어갔는데, 전혀 예상치도 못한 모습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모든 매대에 물건이 가득 차 있던 것이다. 나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카트를 끌고 와 잡히는 대로 물건을 담았다. 그리고 계산 줄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카트를 끌고 장을 본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대신, 다들 한 줌씩 무언가 손에 들고 있는 모습이 보였는데, 자세히 보니 현지인들은 계란 몇 알, 달 커리 한 줌, 그리고 비누 하나를 조촐하게 들고 있었다.
애초에 현지인들은 사재기를 할 형편이 안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계란 몇 알로 며칠을 겨우 버티며 다음 통행금지령 해제만을 손꼽아 기다려야 했다. 마땅히 먹어야 할 식료품을 카트에 가득 실은 나의 모습이 순간 부끄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도 이 땅에 온 김에 끝까지 봉사하고 귀국하고자 했으나, 귀국편 하늘길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결국 모국에서의 철수 권고가 나왔고, 공항이 폐쇄되기 전 거의 마지막 비행편으로 대한민국에 돌아왔다.
-
귀국 후에도 외국에서 온 나는 정말 살아 있는 병균처럼 다루어졌다. 혹시 모를 바이러스 검사를 위해 몇 번이나 콧방울을 찔렀고, 보름 이상 격리해야만 했다. 기차를 타고 움직일 때면 특별 격리된 칸에서만 있어야 했다. 경비는 삼엄했고, 나는 숨을 죽였다.
그래도 전 세계에 역병이 퍼지고 있더라도, 여행을 향한 내 열정은 식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터키에서 코로나 바이러스에 걸리고 말았다. 참 다행히도 귀국하는 날 약간 증상이 돋기 시작하더니 무사히 자취방에 도착하고 난 뒤에야 본격적인 증상이 시작되면서 그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고 조용히 감염병을 이겨낼 수 있었다.
백신이 보급되고 확산세가 점점 잦아들 때 즈음, 나는 일본으로 향했다. 혹시 모를 감염자 유입을 차단하기 위해 국경을 꽉 닫았던 일본에서는 외국인을 받는 조건으로 사흘간 지정 호텔에서 격리할 것을 명령했다. 그래서 나는 자그마한 비즈니스호텔에 격리될 것으로 예상했는데, 예상외로 침대가 두 개 딸린 커다란 특급 호텔 방을 제공받았다. 세 끼 식사도 시간에 맞추어 방 앞으로 배달해 주었고, 방에서 쉬다가 누군가가 전해 준 음식으로 먹고서 또 잠에 빠져들었다. 나는 격리라는 이름으로 완전한 휴양을 즐겼을지도 모른다. 격리 기간 동안 일상생활에서 부족했던 잠을 실컷 잘 수 있었고, 앞으로 펼쳐질 학기의 수강 과목을 고르는데 모든 시간을 할애했다. 격리 기간 동안 잘 먹고, 잘 쉬었기 때문에 격리가 끝날 때는 약간 아쉬운 마음까지 들 정도였다.
일본에서는 소수의 사업가와 유학생에게만 제한적으로 문호를 열어 주었기에 유명한 관광지에 가더라도 인파가 별로 없었다. 더해서 일본 정부에서 주는 외국인 장학금도 인원이 많지 않은 관계로 쉽게 받을 수 있었다. 오히려 '전 세계에 퍼지는 역병이 내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코로나 시국의 외국인으로서 많은 혜택을 누리고 나서 나는 다시 모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
이렇게, 코로나 바이러스는 내게 참 아픈 기억과 기쁜 추억을 잔뜩 선물해 준 존재이다. 그 시기에 어쩔 수 없는 외국인이었던 나는 누구보다도 외로웠고, 괴로웠으며, 즐겁고 행복했었다. 그래서 코로나 바이러스란 나에게 마냥 부정적이지도, 긍정적이지도 않은 독특한 추억으로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