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서울에서 생긴 일

by 여행사 작가 류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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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서울로 상경한 지 어느덧 3년째를 맞고 있다.
‘수도’라는 곳에서 지난 3년간 생활하며 나는 고향을 그리워한 적이 있었나 싶을 만큼 지나간 장소들을 잊은 채 살고 있다. 이따금씩 서울에서 고향 친구들을 만날 때면 그들은 언제나 서울 생활이 어떤지 묻는다. 그럴 때마다 나는 언제나 너무나도 좋다고 대답한다. 그럴 만큼 나조차도 지금의 서울 생활에 꽤 만족하고 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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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살며 꽤 많은 도시들을 거쳐 왔지만, 지금처럼 만족스러웠던 곳도 사실 없었다. 서울에 올라오기 전에는 늘 모종의 불안감이 내 안에 자리 잡고 있었다. 나의 앞가림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 어디에 자리 잡을지도 알 수 없었던 불확실성. 이 고민은 어딜 가나 나를 따라다녔다.

모든 것이 불안했던 학생 시절에는 거주 공간이건, 하는 일이건 모두 ‘임시’로 마련할 수밖에 없었고, 다양한 경험도 물론 좋았지만 확실한 나만의 ‘그 무엇’이 없다는 것에 언제나 조바심이 났었다.

하지만 서울에 직장을 잡았고, 별다른 일이 생기지 않는다면 나는 계속해서 나의 자리를 지킬 수 있게 되었다. 집 역시도 마찬가지이다. 아직 임대주택이긴 하지만 그래도 10년이라는 꽤 오랜 기간 동안 별 걱정 없이 거주할 수 있게 되어 조금이나마 ‘나의 공간’을 찾게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모든 세대가 다 그러하겠지만, 특히 청년의 입장에서 ‘일자리’와 ‘주거’에 대한 걱정을 덜어내니, 정말 많은 고민들이 체증 내려가듯 해소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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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로 말하면 내가 거쳐왔던 다른 장소들은 모두 ‘불만족’스러웠다고 도 이야기할 수 있겠다.
지나간 기억들을 되짚어보면, 할 수 있는 일이 몹시 제한된 환경에서 많은 불행감을 느꼈다. 그렇기에, 외국인으로 타국에서 살 때는 언제나 이러한 마음이 들었다. 이것저것 호기심은 많았지만, 타지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은 언제나 한정적이었다. 가령 스리랑카에서 볼링을 취미로 가진다 해도 내가 만족할만한 볼링장을 찾기도 어려웠고, 현지의 볼링 커뮤니티도 찾기가 어려워 늘 혼자서 깨작깨작 공놀이만 하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전부였다. 그래서인지 열정은 언제나 금방 사그라들었고, 그나마 장벽이 낮은 동네 맛집을 돌아다니거나 몇 없는 친구들과 수다를 떠는 것으로 외로움을 달랬다.

유학 생활 역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물론 ‘공부’라는 본업이 있긴 했지만, 이왕 해외에 간 김에 더 많은 경험을 하고 싶었기에 아르바이트도, 여행도 많이 하고 싶었다. 그리고 현지인들이 일상적으로 하는 일들도 많이 경험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현지인들의 삶을 많이 흉내 내보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매일 욕조에 몸을 담근다는 일본인들처럼, 밤이 되면 매번 욕조에 뜨거운 물을 잔뜩 담았고, 정말 현지인들만이 갈만한 바나 선술집에도 자주 드나들었다. 하지만 학생이라는 신분상 할 수 있는 것들이 꽤 많이 제한되어 있었다. 아르바이트를 할 때도 특별한 허가가 필요했고, 얼마큼 일했는지, 얼마를 벌었는지 등 수입 누계를 하나하나 정부에 보고해야 하는 등 완전히 자유롭게 생활하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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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나의 조국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국가의 ‘주류’로서 할 수 있는 것들이 확실히 많았다. 취미가 생긴다면 같이 즐길 수 있는 이들이 즐비하였고, 봉사도, 부업도, 심지어 원한다면 정치 활동까지도 이미 모든 생태계가 구출된 채 나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마치 폭식하듯 이 모든 것들은 누려보기 위해 그렇게나 바쁘게 움직였다.
가장 먼저 도전했던 것은 상대적으로 진입 장벽이 낮은 봉사 단체나 독서 모임 등에 가입하여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었다. 이렇게 일손을 돕거나, 책을 읽는 등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가벼운 활동들도 좋았지만, 더욱 좋았던 것은 무언가 배우고 싶은 것이 생겼을 때 그것을 ‘모국어’로 배울 수 있는 것이 정말 만족스러웠다. 하물며 원한다면 꽃꽂이를 배울 수도 있었고, 미장도 배울 수 있었고, 미용도 배울 수 있었다. 배움의 공급은 넘쳐났고, 나는 취사 선택하여 그저 누리면 되었다. 더욱 나아가, 능력이 닿는다면 정부 기관의 프로젝트에 참여할 기회 역시도 무수히 주어졌다.

참 시대를 잘 타고났다는 생각을 했다. 청년이 되는 시기에 맞추어 정부에서는 ‘청년들을 위한 정책’ 혹은 '청년의 목소리를 들으려는 기조’가 확산되었고, 그 덕분에 청년 정책의 수혜자가 되거나 청년의 입장을 대변하는 위치에 설 기회를 많이 얻을 수 있었다. 그렇게 청년 주택에 거주하게 되었고, 정부 기관에서 청년 정책 자문단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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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이 땅에서 다양한 사회 활동에 참여하게 되면서 조금씩 희망의 빛을 찾는다. 이렇게 한 발짝씩 나아가다 보면 정말 세상의 의미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해 본다.

이미 생태계가 갖춰진 곳에 오니 이렇게 업무의 외적으로 내 삶의 방향성을 향해 달려갈 수 있는 길이 많다는 것이 큰 의미로 다가온다. 이러한 것들이 서울에서의 나의 삶을 더욱 만족스럽게 만들어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많으면서도 모든 것이 많은, 이곳이 나는 정말 좋다. 그렇기 때문에 서울에서의 나의 삶이 만족스럽다며 늘 이야기하고 다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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