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조차 써지지 않는 날

권태는 살아 있음의 동의어

by 소진


머릿속에 생각은 많고

하고싶은 이야기는 많은데 왠지 글조차 써지지 않는 날이 있다.


고민들이 각자 자기의 영역에서 마음을 단단하게 짓누르지만,

그렇다고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도 아니고 그저 마음속의 무게로만 존재하는 날.

이보다 더 나은 어딘가를 위해서 걸어가고 싶지만,

오늘 하루가 무겁고 지치고 피곤해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하루.


무기력한 일주일이 지나갔으니 이전처럼 글을 써보자,

오늘 하루 힘들었으니 머리를 쥐어짜내면 뭐가 나오겠지,

기대감에 키보드를 두드려보지만, 왠지 굳어버린 머리.


그래도 괜찮아,

글을 쓰고 싶지만 글이 써지지 않는 이 순간도 정화작용의 일종이겠지.


스스로를 믿고 달래본다.


어쩌면 행복하고 만족해야만 인생일 필요는 없지 않을까.

이토록 지치고 무기력한 하루도 내 인생의 일부로서 기록할만한 것이지 않을까.

영화에서도 어느 경지에 오른 대가들은 어떤 멋진 내용보다도

사람들의 일상을 담으며 그것의 아름다움을 표현한다고 하잖아.


어쩌면 글조차 써지지 않는 이 날,

눈 뜬 순간부터 눈을 감기 직전까지 아무것도 특별할 것이 없었던 하루,

오전내 흐린 머리로 업무를 보고,

점심에 회사 지하에서 밥을 먹고,

회사 직원들과 쓸데없는 농담을 하고,

상사 눈치를 보며 퇴근한 하루,

이 하루조차도 나의 일상이니까 아름답게 봐줄 수 있는 거 아닐까.


내가 최고가 되지 않아도,

특별한 사람이 되지 못했어도,

누구에게 칭찬을 받지는 못했어도,

이렇게 지나가버린 하루를 아쉬워하고 더 나은 삶을 꿈꾸는 나의 모습이,

권태의 물 속에서 발버둥치며 시시푸스의 돌멩이를 굴리는 나의 하루가,

살아있는 인간의 것이기에 그 자체로 생동하는 것이라는 점을 깨닫는다.


내일도 아무 변화 없는,

특이할 것 없는,

오늘과 같은 하루겠지만,

오히려 권태롭기에 살아있음을 느끼는 하루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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