된장찌개

상실의 시대를 읽고 라디오헤드를 듣던 시절에

by 방방이

상실의 시대를 읽고 라디오헤드를 듣던 시절이었다. 친구와 나는 팬티 바람에 선풍기를 틀어놓고 거실에 누워 그저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전국일주 할래?" 뜬금없이 내가 말했다. 어떤 계획이나 생각이 있어서 한 말은 아니다.

"언제?" 친구가 무심하게 말했다.

"내일"

"미친놈"


침낭과 코펠을 챙겼다. 쌀, 라면, 김치도 챙겼다. 동생 몰래 자전거도 빌렸다. 나중에 들으니 자전거 도둑맞았다고 난리 쳤다고 한다. 타이어 구멍날 것을 대비해서 바람 넣고 펑크 때우는 기구들도 챙겼다.


자전거 전국 일주다. 코스는 서울에서 강원도를 지나 부산으로 갔다가, 남해를 지나 광주, 그리고 다시 서울로 오는 일정이다.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다. 그저 지도 하나 들고 무작정 떠나는 여행이다.


"너 얼마 있냐?" 내가 물었다.

친구는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3천3백......"

"됐다."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과 친구의 돈을 합친 32만 3천3백 원이 우리의 총 여행 경비다.


우리는 6번 국도를 따라갔다. 비가 오는 날을 제외하면 대부분 노숙을 했다. 식사는 밥을 해 먹거나 라면을 먹었다. 취사와 노숙은 주로 학교에서 했다. 학교에는 물이 있기 때문이다. 수돗가에서 빨래도 하고, 밥도 해 먹고, 세수도 하고, 머리도 감고, 여차하면 목욕도 했다. 마을만 나오면 우리는 학교를 찾았다. 밤하늘의 별은 덤이다.


난 친구에게 아버지가 안 계신 것에 대해 일부러 묻지 않았다. 그날은 친구가 먼저 말을 꺼냈다. 아버지는 술을 드시면 엄마와 형제들을 그렇게 때렸다고. 우린 아버지를 피해 도망쳐 산다고. 난 아버지처럼 되지 않을 거라고.


우연히 하늘을 봤는데 밤하늘의 별이 유난히 빛났다.


“야, 하늘 봐봐. 별 진짜 많아.”

“와, 그러네.”


경기도를 벗어나자 전부 산이었다. 강원도는 그야말로 산 넘어 산이다. 저 산만 넘으면 되겠지 하면 또 산이고, 저 산만 넘으면 되겠지 하면 또 산이다. 그래도 다행인 건 내리막길이 있다는 것. 자전거로 내리막길을 내려가면 올라올 때 흘린 땀이 바람에 모두 식는다. 신난다.


이번에도 산을 오르는 데 너무 더웠다. 산 초입에 집 한 채가 보였다. 작은 집이었다. 마당에는 오아시스가 있었다. 주인을 불렀다.


"실례합니다. 계세요?"

"멍멍." 누렁이가 나왔다. 묶여 있었다.

"너무 더워서 그런데, 물 좀 써도 될까요?"

"멍멍." 써도 된단다. 역시 시골인심은 좋다.


우리는 바로 옷을 벗고 등목을 하기 시작했다. 머리를 감고, 물을 뿌려댔다. 완전 시원했다.


“어푸어푸, 하압, 하압, 아 시원해, 아 시원해.”


산을 넘고 또 산을 넘는데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아니 퍼붓기 시작했다. “소나기인가?” 산 중턱에 작은 집이 있길래 일단 처마 밑에 몸을 숨겼다. 비가 좀 그치면 산을 넘기로 했다. 그런데 30분이 지나도 비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하지?” 친구가 물었다.

“일단 넘자. 가서 마을 나오면 여인숙에서 자자.”


우리는 비를 쫄딱 맞고 산을 넘었다. 추웠다. 배도 고팠다. 점심도 못 먹었다. 산을 넘자 작은 마을이 나왔다. 집이 10채밖에 없었다. 버스 정류장에서 일단 비를 피했다. 여인숙은 물론 그 어떤 편의 시설도 없었다. 하다못해 작은 구멍가게도 없었다.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여름이지만 비가 온 데다 날이 어두워지니,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얼마나 가야 여인숙이 나올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우리는 "하룻밤만 재워주세요"를 하기로 했다. 시골 인심을 믿었다. 친구와 나는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지 정하기 위해, 가위바위보를 했다. “갈라쑝” 내가 이겼다. 친구는 삼 세 판이란다. “갈라쑝” 또 내가 이겼다.


“갔다 와.”


나는 친구가 집집마다 돌면서 “하룻밤만 재워주세요.” 하는 동안 정류장에서 팔짱을 끼고 추위에 떨면서 기다렸다. 빗줄기가 약해졌다. 20분 정도 지나자 친구가 저쪽에서 터덜터덜 걸어온다.


"실패, 다 안된대."

“뭐? 시골 인심, 왜 이래?”

”이제 어떻게 하냐, 여기서 밤 새울 수도 없고.”


우리는 다시 한번 마을을 돌기로 했다.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 구석진 작은 집을 발견했다. 밖에서는 잘 안 보이는 집이었다.


“이 집도 갔었냐?”

“아니, 안 갔어.”


마을의 끝 집. 마지막 집이었다. 여기마저 안되면 우린 굶어 죽거나, 객사를 해야 할 운명이었다.


“저, 실례합니다. 계세요?” 잠시 후 할아버지 한 분이 문턱에 앉아, “누구요?” 하셨다. 거동이 불편하실 정도로 연로하셨다. 80세는 족히 돼 보였다. 아니면 90세? “저 여행하는 학생인데요, 산을 넘는데 날도 어둡고 비도 오고 해서요. 너무 추워서 그러는데 혹시 하룻밤만 재워줄 수 있으실까요?” 나는 최대한 불쌍한 고양이 눈망울을 하고 공손히 여쭤봤다. 할아버지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들어와요.” 했다. 역시 시골 인심, 안 죽었다. 친구의 실패는 아무래도 녀석의 인상 때문이었으리라.


할아버지는 혼자 계셨다. "이쪽으로 앉아요." 우리는 약간 쭈삣 거리며 앉았다. "감사합니다." 배가 고팠다. 할아버지가 바가지에 담긴 옥수수를 내주셨다. 그런데 먹을 수가 없었다. 너무 오래된 옥수수였다. 약간 썩기까지 했다. 느낌 상 벌레도 있었다. 할아버지는 계속 옥수수를 권하셨다. “좀 들어요.” 눈이 안 좋으셔서 옥수수가 썩은 것도 모르시는 것 같았다. 우리는 그저 예의 상 “아, 예, 감사합니다.” 했다. 차마 먹진 못했다. 방에 앉아서 할아버지와 얘기를 나눴다. 할머니는 동사무소에서 하는 ‘공공근로’를 하러 나가셨다고 했다.


"어디서 왔어요?"

"서울이요. 자전거로 전국일주 중이거든요."

"아휴, 젊은 사람들이 대단하네. 우리 큰 아들도 서울에 살아."


할아버지에게 자식은 넷이 있었다. 아들 셋에 막내딸 하나. 큰 아들은 동대문에 살고 둘째는 수원에 살고, 셋째는 큰 형과 함께 서울, 그리고 막내는 대구에 산다고 했다. 아들들은 모두 결혼했는데, 막내만 결혼을 안 했단다. 이런저런 자식들에 대한 얘기와 자랑을 끊임없이 늘어놓으셨다. 정말 무한 반복하셨다. 자식들이 많이 보고 싶은 것 같았다.


"아드님 하고 따님은 자주 내려오세요?"

"바빠서 못 내려와. 얼마나 바쁜데."

"그렇죠? 서울에서 멀기도 하고. 아, 그럼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에만 오시겠네요?"

"멀고 바쁘니까, 명절에도 잘 못 와."


할머니가 오셨다. 우리는 깍듯하게 인사를 드리고, 사정을 말씀드렸다. 할머니는 환하게 웃으며 따뜻하게 맞아주셨다.


"밥 먹어야지?"


할머니는 상을 차려 주셨다. 반찬은 많지 않았다. 감자가 들어간 된장찌개와 보리가 섞인 밥, 그리고 크게 썰은 깍두기가 전부였다. 천국의 맛이었다. 지금까지 먹어본 음식 중 최고였다. 지인들에게 이 이야기를 할 때마다 침을 튀기며 열변을 토하게 되는데, 좀처럼 그 맛의 느낌을 제대로 전달할 수가 없어 늘 답답하다.


시골 된장찌개를 밥에 비벼서 깍두기를 얹어 먹는데 정말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생각했다. 친구와 나는 밥 한 공기를 '게 눈 감추듯' 순식간에 '뚝딱' 먹어 치웠다. 30초 걸렸나? 하지만 차마 밥을 더 달라는 말을 못 했다. 왠지 밥이 더 없을 것 같았다. 게다가 너무 가난해 보여서 어린 마음에 밥을 더 달라고 하기가 미안했다. 밥이 없는지 할머니도 ‘밥 더 들어요’란 말을 안 하셨다.


"잘 먹었습니다. 밥이 너무 맛있어요."

"정말 꿀 맛이에요, 고맙습니다."


친구와 나는 합장을 했다. 밤에 잠을 자는데 여전히 배가 고팠다. 하지만 마음은 이상하게 따뜻하고 기분 좋은 기운들로 가득했다. 배는 고팠지만, 마음은 불렀다. 그날 밤 꿈도 안 꾸고 깊이 잤다. 행복했다.


우리는 염치 불고하고 아침까지 얻어먹었다. 떠나는 길에 너무 죄송하고 감사해서, 5만 원을 드리려 했는데 한사코 안 받으셨다.


"어젯밤 재워 주시고, 맛있는 밥도 해 주셔서 너무 감사한데 딱히 드릴 게 없어서요."

"아이고 됐어. 학생이 돈이 어딨어. 됐으니까 여행하면서 굶지 말고 밥이나 사 잡숴.”


자전거를 끌고 저만치 가다 뒤돌아 보니 할아버지, 할머니가 마루에 앉아 우리를 보고 계셨다. 우리는 다시 한번 허리 숙여 인사를 드렸다.


“또 올게요.” 큰 소리로 말을 했다.


친구와 나는 나중에 꼭 다시 찾아뵙자고 다짐했다. 우리는 '된장찌개'의 힘으로 동해를 지나 부산까지, 그리고 남해를 지나 광주까지 왔다. 광주에 큰아버지가 계셔서 며칠 묵었다. 긴장이 풀리고 몸이 편해지자 더 이상 여행할 의욕이 사라졌다. 자전거를 버리고 기차를 탔다.


정말 많은 일이 있었고 힘들기도 했지만, 지금은 모두 추억이 됐다. 일회용 카메라로 찍은 당시의 사진들을 보면 새까만 애들 둘은 완전 원시인 같다. 자전거 없이 올라 온 걸 보자 동생이 화를 내고 짜증을 냈다. 난 전국을 유랑한 사람으로서 “세상만사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거야.” 했다. 그랬더니 더 짜증을 부렸다. 역시 도시 인심이란. 나는 다시 아르바이트를 해서 더 좋은 자전거를 사줬다.


이후 할아버지, 할머니를 몇 번 찾아뵙고 인사도 드리고 밥도 얻어먹곤 했다. 할머니가 민화투를 좋아하셔서 함께 민화투도 쳤다. 한 번은 녀석의 여자 친구도 함께 갔다. 그녀가 엄마에게 전수받았다며 돼지고기가 들어간 김치찌개를 끓여 줬는데, 그 맛이 실로 일품이었다.

“와, 맛있다.”

“오 제대로인데.”

“할아버지 어떠세요?”

아무리 그래도 할머니의 된장찌개를 따라가지는 못했다. 그건 천상계의 음식이니까.


그러다 나는 군대를 갔다. 제대를 하고 여름이 4번 정도 지날 무렵이었다. 나는 <상실의 시대>의 나가사와 선배처럼 성공을 위해 ‘괄태충’을 먹으려 했고, 라디오헤드의 <Creep>처럼 찌질했다. 취업도 안되고 슬픈 일들로 가득했던 시절이었다.


어느 날 혼자 거실에 누워 있는데 문득 할아버지, 할머니가 떠올랐다. 나는 다음날 바로 강원도 숲 속 마을로 향했다. 그런데 집이 비어 있었다. 아무도 살고 있지 않았다. 동네 어르신 말씀이 몇 년 새 두 분 다 돌아가셨단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얼마 안 있어 할머니도 돌아가셨단다.


돌아오는 휴게소에서 된장찌개를 시켰다. 된장찌개를 한 숟가락 떴는데, 자꾸 눈물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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