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창밖을 보던 아이, 그리고 그를 바라보던 나
임요한은 보통의 아이였다. 공부도 보통이고 키도 보통이고 체격도 보통이었다. 심지어 앉은 자리도 딱 중간이었다. 있는 듯 없는 듯 늘 존재하는 아이였다.
요한은 지극히 평범해 보였지만, 분명 특별한 구석이 있었다. 몸집은 나약해 보였으나 눈빛만은 살아 있었고, 늘 함께 있었지만 한 발짝 떨어져 지긋한 미소를 짓곤 했다. 요한은 종종 창밖을 봤고, 앳된 소년의 얼굴로 깊은 사유를 품고 있었다. 요한과 대화를 하고 있으면 정화되는 기분이 들었다.
언젠가 우연히 요한의 가방에서 <데미안>을 봤다. 우리 집 서재에 꽂혀있던 책이었다. 궁금했다. 나도 요한이를 따라 <데미안>을 읽어 봤다. 반도 못 읽고 집어던졌다. 대체 뭔 소리를 하는지 몰랐다. '개는 대체 왜 이따위 책을 읽는 거야.' 하며, 다시 <슬램덩크>를 집어 들었다.
"교생 떴어, 교생." 누군가 소리를 질렀다. 모든 아이들이 복도로 나갔다. 교생은 짧은 치마를 입고 있었다. 전교생이 그녀를 향해 휘파람을 불고 괴성을 질렀다. 교생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첫 수업을 마치고 교무실로 향하는 길이었다. 그때 어떤 아이가 교생 뒤에서 손거울로 치마 속을 훔쳐봤다. 잠시 후 한 아이가 아예 대놓고 슬라이딩을 하면서 그녀의 발 아래 누웠다. 계단을 내려갈 때는 계단 밑에서 치마 속을 보기 위해 안달 난 녀석들로 가득했다.
복도와 계단을 지나 교무실까지 가는 1~2분이 그녀에게는 지옥 같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벌거벗은 몸으로 늑대 소굴을 지나는 느낌. 얼마나 무섭고 치욕스러웠을까. 아마 정식 교사가 되기도 전에 잊을 수 없는 상처와 트라우마를 갖게 됐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군중 속에서 익명이라는 짐승의 가면을 쓰고 있었다. 짐승들은 여교생에게 큰 상처를 주었지만, 그 사실을 망각했거나 외면했다. 그저 놀이로 여겼다. 그 시절, 우리는 욕정이 들끓는, 개별적으로는 나약해도 군중 안에서는 괴물이 될 수도 있는 그런 종족이었다.
나는 친구들과 교생 다리와 치마 속에 대한 이야기로 깔깔대며 다시 교실에 들어왔다. 그때 요한이 홀로 창밖을 보고 있었다. '그 애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요한의 모습을 보자, 묘하게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마음 한 편에 붙어 있는 실오라기 같은 양심이 떠오른 것이다.
다른 아이들도 나와 같은 기분을 느꼈으리라. 집에 돌아가는 길이나, 샤워할 때, 혹은 잠들기 전에, 그것도 아니면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라도 마음 한편에 떠오르는 씁쓸한 기분 같은 것을 발견했을 것이라 믿는다.
그날 종례 시간에 담임 선생님은 이제 매주 학급회의 시간마다 '인민 투표'를 실시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인민 투표는 투표를 통해 한 주 동안 학습태도가 가장 안 좋은 사람을 선발해서 체벌을 가하는 제도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담임은 선발된 사람을 '종간나 새끼'라고 했고, 총 3명을 뽑아 득표수대로 20대, 10대, 5대를 때리겠다고 했다. 우리는 인민 투표에 대해 욕을 해댔다. "이게 뭔 개소리냐." 많은 아이들이 투표용지에 이름을 써내지 말자고 결의했다.
당시 담임의 교육 철학은 체벌을 통한 철저한 교육 질서 확립과 무조건 반 평균 1등이었다. 모든 교육을 매로 다스렸다. 정말 악명 높은 미친개였다. 그러나 아쉽고 공교롭게도 체벌은 분명 효과가 있긴 있었다. 우리 반은 단 한 번도 반 평균 1등을 놓친 적이 없으니 말이다. 물론 담임의 몽둥이가 정말로 우리를 위한 사랑의 매였는지, 아니면 자신의 인사 고과를 위한 채찍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우리는 매를 맞는 데에는 이골이 나 있었다. 매를 맞는 게 하루 일과 중 하나였다. 하루라도 안 맞고 넘어가면 뭔가 허전하기도 했다. 어떤 날은 지각해서 10대, 숙제 안 해서 10대, 가정통신문에 사인 안 받아 와서 10대, 성적이 떨어져서 10대를 포함해 하루에 총 40대를 맞은 아이도 있었다. 그 아이는 쉬는 시간에 바지를 벗어서 엉덩이를 보여줬다. 엉덩이부터 허벅지까지 무지개가 피었다. 빨주노초파남보. 없는 색깔이 없었다. 엄청 아파 보였지만, 우리는 깔깔 대고 웃었다. 웃으면서도 가슴 한편에는 분명 씁쓸한 것이 있었다.
첫 번째 인민 투표가 시작됐다. 담임은 투표용지를 나눠줬다. 우선 본인의 이름을 적으란다. 자신의 이름을 적으라는 말에 아이들은 동요했다. 익명이 보장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게 부담이었다. 개표는 공정하게 모두가 보는 앞에서 담임이 직접 했다. 정말 잔인하게 공정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누가 누구의 이름을 적었는지는 오직 담임만 알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표가 하나하나 개표될 때마다 굴욕감과 상실감과 저열함 같은 것들이 우리들의 마음을 훑고 같다. 동시에 자신의 이름이 불리지 않을 경우 묘한 안도감도 느꼈다.
개표 결과 절반 이상의 아이들이 이름을 적어 내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담임은 이름 안 쓴 아이들 모두 책상 위로 올라가라고 했다. 허벅지를 3대씩 때렸다. 그러면서 이번에는 이 정도로 넘어가는데, 다음에도 이름을 안 적어내면 20대라고 했다.
담임 앞에서 아무 말도 못 했던 우리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담임을 욕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몇 무리는 다음번에도 이름을 적지 말자고도 했다. 우리는 친구의 이름을 적어내는 게 비열한 짓이라고 본능적으로 느꼈던 것 같다.
다음 인민 투표 시간이 됐고, 나를 포함한 열댓 명이 용지에 이름을 적지 않았다. 담임은 약속대로 이름을 적지 않은 아이들을 교실 앞으로 불러 20대씩 때렸다. 20대 정도는 버틸 수 있었다. 그런데 다음에는 40대, 그리고 그다음은 80대라는 것이다.
사실 대부분의 학생이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떠들고 학습태도가 안 좋았다. 그걸 투표로 결정하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개인감정이 들어갈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이건 친구끼리 서로 감시해야 하는 일이 아닌가. 그러나 우리는 이 제도를 이해해서 우리 삶에 적용하기에는 너무 어렸다. 좋은 말로 순진했다. 그만큼 영악하지도 못했다. 우리는 감시는 물론 떠드는 걸 멈추지도 못했다.
그러나 우리들의 저열함은 투표 결과로 드러났다. 우선 의리 상 나와 친한 친구의 이름을 적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아이들이 가장 마음 편하게 적어 낼 수 있는 친구, 바로 왕따들이었다. 그러면 죄책감을 조금 덜 수 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결국 종간나 새끼들은 왕따들이 차지했다.
다음 주가 되어 또 투표용지를 받았다. 이번에는 고민됐다. 저번 주까지의 완고했던 결의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한 방에 40대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무서웠다. 폭력으로부터의 굴복. 하지만 난 친구들과의 약속을 생각해 이름을 적지 않기로 했다. 이왕 적지 않기로 한 것, 끝까지 가보자고 다짐한 것이다.
이름을 적지 않은 아이들은 총 7명이었다. 각자 40대씩 맞았다. 7명의 아이들 대부분이 반에서 소위 논다는 애들이었다. 평소 공부도 안 하고 담배 피우고 사고 치는 애들.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대학생이 돼서 광주 민주항쟁 때 끝까지 남아 총칼을 들고 싸운 사람들 대부분이 밑바닥에서 생활하던 사람들이라는 말을 들었다. 구두닦이, 건달, 공장 노동자 등. 지금도 그 시절을 생각하면 묘하게 겹치는 부분이 있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드디어 우리 7명의 엉덩이에도 무지개가 피었다. 빨주노초파남보. 우리는 쉬는 시간에 담임을 욕하며 웃고 떠들었다. 한편으로는 두려움도 있었다. 왜냐하면 소위 '졸라' 아팠기 때문이다. 다음 80대를 감당할 자신은 없었다. 우리는 다음에는 그냥 이름 쓰자라는 말을 직접적으로는 안 했지만, 분위기 상 담임의 몽둥이에 굴복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도저히 저 인민 투표에 동조하고 싶지는 않아서, 몇몇은 그냥 서로의 이름을 적기로 합의했다.
이제 와서 드는 생각이지만, 만약 우리 중에 머리 좋은 선동가가 있었다면 서로 짝의 이름을 써서 담임의 의도를 무력화시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모두가 하나 되어 끝까지 이름을 쓰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게 중에는 인민 투표를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애들도 있었다.
결국 우리는 폭력에 굴복했다. 그걸 이겨낼 힘도 의지도 명분도 없었다. 인민 투표의 폭정 속에서도 우리의 고교시절이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도 않았고, 덜 떠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도 아니다. 단, 언제나처럼 몽둥이는 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한 주가 지나고 어김없이 인민 투표 시간이 됐다. 우리 모두는 체념했다. 이제 순순히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누가 과연 미친개의 80대를 감당하겠는가? 그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투표가 끝나고 개표가 시작됐다. 이름이 하나하나 불렸다. 엉뚱한 이름이 불릴 때 아이들은 웃기도 하고 재밌어했다. 공부 1등의 이름이 불리기도 하고, 반에서 가장 웃긴 아이의 이름이 불리기도 했다.
그런데 개표를 한참 하던 담임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하기 시작했다. "임요한 나와." 담임이 말했다. "뭐? 친구의 이름을 쓰지 않겠습니다, 엎드려."
나는 놀랐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요한이는 정말 눈에 띄지 않는 아이였다. 평소 너무나 조용해서 있는 듯 없는 듯했던 아이, 몸도 연약해서 언제나 아이들 틈에서 조용히 웃는 아이. 심지어 요한이는 20대와 40대 대열에 끼지도 않았던 아이였다.
그런 요한이가 이름을 쓰지 않았다. 아니 이름을 쓰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분명한 메시지를 담임에게 전했다.
"친구의 이름을 쓰지 않겠습니다."
그래서였을까, 평소 매질을 할 때 감정을 싣지 않던 담임은 이번에는 몽둥이에 감정을 실어 때렸다.
우리 모두는 조용히 80대를 때리고 맞는 광경을 지켜봤다. 요한이는 맞는 동안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게 담임을 더 자극했는지도 모른다. 대걸레 나무 자루 4개가 부러졌다. 담임에게 자비란 없었다. 나는, 아니 우리 모두는 그런 요한이를 보며 경외감 같은 것을 느꼈다.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같았다. 우리는 그런 예수를 지켜보며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나자렛의 백성들이었다.
생각해보니 개표 때마다 요한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동안 요한은 자신의 이름을 썼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요한이가 80대를 맞는 동안 분명 그를 존경했다. 아니 존경을 넘은 공포가 교실 안을 유령처럼 떠다녔다. 그 순간만큼 요한이는 우리에게 신이었다. 만질 수도, 다가갈 수도 없는 신. 같은 교실에 앉아 있지만 요한이는 다른 세계의 사람이었다. 우리는 그저 요한이가 맞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었다. 각자의 자리에 앉아 자신의 안위에 안도하며 그저 공포를 느끼고 겁을 먹는 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얼마 후 학교에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다른 선생님들의 귀에도 들어간 모양이다. 그래서였을까?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인민 투표는 흐지부지 사라졌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로 남을 수밖에 없었던 그날에, 변명이 필요했다. 아이들 사이에서 이런 말이 오가기도 했다. "이렇게 끝날 거였는데, 미친놈 왜 쓸데없이 쳐 맞았냐."
우리가 그 시절 배운 것은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아마 담임 덕분에 말 잘 듣는 소시민적 기질과 소시민으로 살아갈 때 느낄 수 있는 안락함에 대해 배웠다. 어쩌면 삶에 필요한 덕목과 요령이 인민 투표 안에 모두 담겨 있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걸 17살이라는 빠른 나이에 배울 수 있었다. '종간나 새끼'가 되지 않고 대부분의 다른 친구들과 함께 여기 이 교실 의자에 남아 있는 게 얼마나 안락하고 행복한 일인지 배웠다. 미친개에게 정말이지 감사를 표한다.
그러나 가끔 요한이가 떠오를 때면 어쩐지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만약 그때 의자를 박차고 그의 옆에 엎드렸다면. 나도 요한이처럼 알을 깨고 나왔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