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한 장만 찍어도 될까요?
<7년의 밤>, <종의 기원> 등으로 유명한 정유정 작가는 가슴에 불이 붙으면 글쓰기를 멈출 수 없다고 한다. 나 역시 한번 꽂히면 무조건 달려가 셔터를 눌러야 직성이 풀린다.
나는 사진을 한다. 사람을 찍는 걸 좋아한다. 2011년 어느 날 '서울역 노숙자 강제 퇴거'라는 기사를 봤다. 꽂혔고 나는 달렸다. 노숙자들은 어떤 사람들이며, 어떻게 사는지에 대해 공부했다. 아예 퇴근을 서울역으로 했다. 몇 주 간 그들을 관찰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카메라를 들었다. 초상권이 있기에 동의를 구해야 했지만 용기가 안 났다. 천성적으로 남에게 뭔가를 부탁하는 것을 잘 못하는 데다가, 노숙자라 더 말을 못 했다. 몰래 찍었다.
얼마 후 동호회 사이트에 사진을 올렸다. 물론 개인 식별이 가능한 사진은 제외했다. 그러나 동호회 내에서 엄청난 논란이 됐다. 사진 욕심에 그분들을 소재로 삼았다는 게 이유다. 동정심이라면 너무 싸구려고, 정의감이라면 너무 교조적이고, 진심이라면 너무 얕다는 것이다. 노숙자와 함께 하지도 않았으면서 그분들의 동의 없이 사진을 찍고 웹에 게시한 나의 행위는 비도덕적인 것은 물론, 그저 어쭙잖은 낭만주의로 치부됐다.
교조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싸구려 동정도 아니었다. 그저 도심 속 노숙자를 사진에 담고 싶었다. 의미는 그 이후의 일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나의 욕심만은 인정했다. 모든 사진을 웹에서 내렸다.
얼마 후 용산역 앞이 곧 개발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제 곧 집창촌도 사라진단다. 모든 사람이 떠나가고 빈집만 남았을 때였다. 과거의 청산. 또 꽂혔다. 사진을 찍었다. 집창촌 창틀에 놓인 인형을 찍었다. 인형은 많은 걸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을 찍고 싶은 욕망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4대 강 사업으로 사라지는 마을'이라는 기사를 봤다. 바로 이거다. 또 한 번 불꽃이 타올랐다. 그곳에 가서 그분들의 생생한 얼굴을 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번에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우선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분류해서 공부를 했다. 사진은 지식보다는 본능과 무의식의 작용이다. 사진적으로 볼 때 지식은 지식으로 기능한다기보다 무의식을 훈련하기 위함이다.
동의서를 챙기고 경상북도 영주로 갔다. 나는 계획을 세웠다. 첫째, 마을을 돌며 익숙해진다. 둘째, 마을 사람들과 친해진다. 셋째, 친해지면 '사진 한 장 찍어도 될까요' 하고 부탁한다.
철길에 이름 모를 잡풀이 무성히 피었다. 철길을 건너자 금강마을이 나왔다. 10여 가구가 사는 작은 마을이었다. 내성천이 S자로 둥글게 감아 흐르고 있어, 마치 수줍은 여인 같기도 하고 포근한 할머니의 품 같기도 했다. 강가의 고운 모래는 고즈넉함을 더했다. 왜 금강이라 불리는지 알 것 같았다.
400년이라는 전통을 가진 마을답게 한옥집이 많았다. 나는 마을을 돌다, 어느 고택 앞에 섰다. 고택 옆에는 '장 씨 고택, 문화재'라는 해설문이 있었다. 문 앞에 서서 조선시대의 풍미를 감상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나무 문을 밀었다. '끼이익'하는 소리가 났다. 마당에는 텃밭이 있었고, 오른편에는 항아리가 가득했다. 정면의 툇마루 아래는 신발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사람이 사는 집이었다. "계세요? 아무도 안 계세요?" 잠시 후 할머니 한 분이 나오셨다. 왠지 태곳적부터 고택을 지켜오신 것 같았다.
나는 할머니께 인사를 드리고 자연스럽게 툇마루에 앉았다.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우선 할머니와 친해지고자 했다. 할머니에게 간단히 내 소개를 하고 이야기를 나눴다. 할머니는 시집와서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끝없이 말씀하셨다. 18살에 시집와서 평생 이 집에서 사셨고, 자식들은 모두 출가하고 영감은 수년 전에 돌아가셨다며, 평소에는 텃밭도 가꾸고 그냥 이렇게 앉아 시간을 보내신단다.
"댐 다 지어지면 여기 다 잠긴다는데, 어떻게 하실 거예요?" 내가 여쭤봤다.
"시집와서 여직껏 여서 살았는디 어짤란가 모르겄어.허허." 할머니는 안타까워하시면서도 수줍게 웃으셨다.
2시간 정도 대화를 했다. '사진 한 장만 찍어도 될까요?'가 입에서 맴돌았다. 그러나 도저히 말을 못 했다. 부탁을 하려니, 뭔가 자꾸 마음에 걸렸다. 보험을 팔기 위해 일부러 친한 척하는 영업사원 같았다. 왠지 할머니와 나눈 순수한 대화가 더럽혀지는 것 같았다. 결국 인사만 드리고 나왔다. "할머니, 덕분에 대화도 나누고 감사드려요.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세요."
다시 마을을 돌았다. 골목을 지나 야트막한 언덕에 오르자, 노부부가 밭일을 하고 계셨다. 순간, 밭일을 도와드리고 사진을 찍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르신 제가 일 좀 거들어 드릴까요?" 나는 대답도 듣지 않고 두 팔을 걷어붙였다.
땅콩 밭은 처음이었다. 땅콩이 어디서 나는지 생각조차 안 해본 터라, ‘땅콩은 땅에서 나서 땅콩이구나’ 했다. 너무나 당연한 것이어서 몰랐었다기보다 그저 잊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밑동을 잡고 쭉 뽑아 올리자 땅콩이 쉽게 따라 나왔다.
"여기 오래 사셨어요?" 땅콩을 캐며 내가 물었다.
"그럼, 여기서 애들 학교도 보내고, 시집, 장가보내고 다 했지." 노동이 지루한 지 할아버지는 이런저런 말씀을 하셨다. 할아버지의 이야기보따리는 무궁무진했다.
"여기 댐 다 지면 잠긴다는데 괜찮으세요?"
"아이고, 그것 때문에 걱정이 많아. 근데 뭐 어쩌겠어, 나라에서 하는 건데."
2시간을 쪼그리고 앉아 땅콩을 캤다. 기회가 왔다. 지금 얘기하지 않으면 영영 기회는 없다. “저......” 입을 떼려는 데, 할머니가 땅콩이 든 봉지를 건네주셨다.
"가져가서 볶아 먹어요."
"아, 저 이러려고 도와드린 거 아니에요."
나는 사양했지만, 너무 사양하면 오히려 예의에 어긋나는 것 같아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하고 마지못해 받았다. 땅콩을 받는 바람에, '사진 한 장 찍어도 될까요'를 못했다. 역시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어르신들께 인사를 드리고 마을 아래로 내려왔다. '댐이 완성되면 저 고택도, 땅콩 밭도, 내성천의 모래도 모두 사라지겠지.' 하는 생각이 들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내성천을 따라 길을 걸었다. 초 가을바람이 강을 따라 불어왔다. 20분쯤 걷자, 공사장이 나왔다. 영주댐 건설 현장이었다. 사진을 찍으려 카메라를 들었다. 공사장 인부가 달려왔다.
"사진 찍으면 안 되나요?" 예상한 상황과는 많이 다르지만, 어쨌든 처음으로 계획한 말을 했다.
"여기 외부 사람 들어오면 안 되는 곳이에요. 나가세요." 인부는 단호하게 말했다.
"아......" 또 실패했다.
목이 탔다. 음료수나 살 겸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작은 구멍가게에 갔다. 50세 정도 돼 보이는 주인아저씨가 계셨다. 이 마을에서 처음으로 만난 청년(?)이다. 나는 음료수를 사면서 이것저것 여쭤봤다.
"영주댐 지면 문화재 건물도 사라지고 내성천 모래도 사라진다는 데, 주민들 반응은 어때요?"
아저씨는 내 얼굴을 한참을 보다가, "기자예요?" 하셨다.
"아, 아니요, 기자는 아니고, 그냥 기사 보고 안타까워서 찾아왔습니다." 하고 말씀드렸다.
아저씨는 그제야 경계를 푸셨다. 댐이 건설되면 고택이 사라지는 것도 안타깝고,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강가의 모래밭이 사라지는 것도 안타깝고, 400년 넘게 이어온 마을의 명맥이 사라지는 것도 안타깝다고 했다. 그런데 우리가 댐을 반대하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며, 지금까지 기자들이 오고 단체가 와도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진짜 이유를 말해주겠다며 입을 뗐다.
"그건 바로 사람이에요."
'사람'이라는 말을 듣는데, 죽비로 등짝을 맞는 것 같았다. 찰싹. 정신이 번쩍 들었다. 땅콩이 땅에서 난다는 당연한 진리를 망각하고 있었던 것처럼, 잊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에 대한 존중’ 임을. 아저씨는 영주댐 건설은 그저 사람이 쫓겨나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고 했다.
"삶 자체가 없어지는 거예요. 하나의 공동체, 하나의 역사가 없어지는 거라고요. 그런데 사람들이 그게 뭘 의미하는지 잘 몰라요. 귀를 기울이지 않아."
그렇다. 그것은 수십 년을 가꾸어 온 삶이 땅콩처럼 쉽게 뽑혀버리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수백 년을 이어온 삶은 땅콩이 아니다. 뽑으면 다시 자라는 땅콩이 아니란 말이다. 그것은 그저 파괴에 불과하다. 삶을 파괴하는 일이며, 역사를 파괴하는 일이다. 다시는 자라지 않을 파괴, 완전한 말살이다. 이제 금강마을의 영혼은 사라질 것이다. 그것은 바로 고택을 지키던 할머니의 수줍은 미소가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할아버지의 이야기보따리가 사라지는 일이며, 땅콩을 건네던 할머니의 따뜻한 손길이 사라지는 일이다.
이제 어르신들은 상실이 담긴 눈으로 물에 잠긴 금강마을을 하염없이 멍하니 바라보며 여생을 보낼 것이다. 인류가 남기고자 하는 것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누가 영혼을 훔칠 권리를 가졌단 말인가? 영혼을 해체시키고 우리가 세우려는 것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신 대륙을 말살했던 저들과 뭐가 다르냔 말이다. 우리는 이제 따뜻함을 어디서 배워야 할까? 또 인터넷인가?
나는 다시 마을을 돌았다. 물론 마을이 사라진다는 소식에 가슴이 아파 이곳에 왔지만, 역시 외지 사람의 걱정은 문화재와 모래밭이었다. 사람의 소중함, 삶의 이야기, 그로 인한 문화와 풍습. 댐이 앗아가는 것이 문화재만이 아님을, 보이지 않지만 더 소중한 것들에 대해, 나는 왜 기억하지 못했을까?
도시의 어쭙잖은 낭만주의자는 어리석은 정의감으로 카메라를 들고 사진이나 찍어볼까 하고 마을을 기웃거렸던 것에 불과했다. 한심했다. 나의 계획은 댐을 지으려는 저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나는 마을 어귀에서 죽어가는 해바라기를 만났다. 사람의 얼굴 같기도 하고, 왠지 사라질 금강마을의 모습 같기도 했다. 애처로웠다. 나는 드디어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사진 한 장 찍어도 될까요?" 해바라기가 끄덕거리고 바람이 불었다. 사진을 찍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우울한 기분으로 집으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덜컹거리는 창에 얼굴이 비쳤다. 한 사내가 보였다. 사내의 얼굴과 해바라기 얼굴이 교차됐다. 윤동주의 시구가 떠올랐다.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