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자꾸 웃는다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제기를 찬다
제기가 하늘로 올라갈 때마다
아이들의 꿈도 올라간다
초등학교 때 썼던 동시이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약 4연 정도 되는 시였다. 기억을 더듬어 대충 요약한 것이다. 이 부끄러운 시는 무려 장려상을 받았다. 선생님은 최우수상부터 장려상까지 순서대로 수상작을 반 아이들에게 읽어주셨다. '십자가는 발 밑으로 흘러 나는 작은 빛을 보았네, 어쩌고 저쩌고' 최우수상을 받은 시의 내용이다. 그 시에 비하면 내 시는 그야말로 어린 내 티가 팍팍 나는 수준 미달의 시였다.
수준 높은 시들 뒤에 내 시가 읽히는 게 싫었다. 너무 유치했다. 부끄러워서 쥐구멍에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 시가 낭독되자 얼굴이 빨개졌다. 이제 난 웃음거리가 될 것이라 확신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지만, 나는 그 작은 빛을 보았다. 선생님이 웃으신 거다. 비웃으신 게 아니라 오히려 내 시를 읽고 유독 환하게 웃으셨다. 그게 착각이라도 좋다. 정말 잊지 못할 미소였다. 엄마 미소처럼 따뜻했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포근했다. 세상의 모든 악마들이 무릎을 꿇었다. 마음이 구름처럼 편안해지고 부끄러움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미소였다.
다른 아이들의 시를 읽을 때는 그런 미소가 아니었다. 선생님은 내 시를 읽고 나서 금니가 보일 정도로 환하게 웃으셨다. 나는 상보다 선생님의 미소가 좋았다. 나의 보잘것없는 동시가 선생님에게 그렇게 아름다운 미소를 짓게 할 수 있다니, 나는 기분이 너무 좋았다.
초등학교 4학년 어느 날 정민주라는 아이의 생일 초대를 받았다. 민주는 내 뒤에 앉은 여자 아이다. 얼굴도 예쁘고 공부도 잘하고 마음씨도 착했던 그야말로 엄친딸이었다.
반면에 우리 집은 가난했다. 어린 나는 그걸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이 부끄러웠다. 숨기고 싶었다. 생일 초대를 받자 기쁨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선물 살 돈이 없었다.
"친구 생일이라 선물 사게 돈 좀 주세요, 엄마아아아아아앙."
나는 500원을 들고 문방구에 갔다. 무엇을 살까 한참을 고민했다. 멋지게 연필 한 다스에 포장까지 해서 주고 싶었다. 하지만 연필 다섯 자루를 포장도 못하고 주머니에 넣었다.
친구네 집은 아파트였다. 넓었다. 우리 집보다 10배는 커 보였다. 그냥 딱 봐도 부자였다. 모든 게 고급스러웠다. 어머니도 예쁘고 고상하셨다. 무릎 나온 츄리닝으로 상징되는 우리 엄마와는 사뭇 달랐다. 한 상 가득 요리가 나왔다. 난생처음 보는 과일과 음식들이었다. 케이크에 초를 켜고 축하 노래도 불렀다. 모든 게 낯설었다. 그저 짜장면이 짱인 줄로만 알았던 나는 이런 격식을 갖춘 생일파티가 어색했다. 가난한 아이가 부잣집 아이들 노는 데 끼어 있는 기분이었다.
식사를 하고 민주의 방에 갔다. 책상과 침대가 있었다. 피아노도 있었다. 창 밖으로는 도시 전경이 훤히 내다 보였다. 내 방에는 침대는커녕 쌀통과 동생이 있었다. 창을 열면 윗집으로 올라가는 계단과 가끔 주인아저씨의 무성한 다리털을 볼 수 있을 뿐이다.
한 친구가 선물을 건넸다. 선물 주는 시간이다. 모든 선물은 포장이 되어 있었다. 민주는 그 자리에서 포장을 뜯었다. 포장을 뜯을 때마다 아이들은 탄성을 질렀다. "우와" 민주도 연신 고맙다며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와, 정말 고마워, 이거 내가 갖고 싶었던 건데. 어떻게 알았어? 호호호"
선물에는 예쁜 필통도 있었고, 인형도 있었고, 다이어리도 있었고, 만화책도 있었다. 생일 선물에 만화책이라니 생각도 못했다. 연필 다섯 자루는 얼마나 고루하고 초라한 선물인가. 모두 3천 원에서 1만 원이 넘는 선물들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연필은 없었다. 그리고 그곳엔 나도 없었다.
여기는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었다. 선물을 줘야 하는데, 도저히 연필을 꺼낼 수가 없었다. 연필을 꺼내는 순간 아이들이 비웃을 것만 같았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연필을 꽉 쥐었다. 혹시라도 연필이 보일까 불안했다. 난 아이들의 대화에 낄 수가 없었다. 이방인일 뿐이다. 아이들이 웃고 떠들 때, 그저 어색한 웃음을 띄고 구석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길고 길었던 파티가 끝났다. 나오는 길에 아무도 몰래 연필 다섯 자루를 민주의 책상 위에 슬쩍 놓고 나왔다. 내가 준 선물이라는 걸 알리고 싶지 않았다. 차마 써 온 편지는 두고 오지 못했다. 집에 와서 내가 쓴 편지를 읽었다.
너의 11번째 생일 축하해. 초대해 줘서 고마워.
너와 같은 반이 돼서 함께 공부도 하고 함께 놀 수 있어서 좋아.
우리 앞으로 더 친하게 잘 지내자.
그러나 이제 더 이상 좋을 수도, 앞으로 잘 지낼 수도 없다는 걸 알았다. 그 아이와 나는 다르니까. 어린 나는 너무도 빨리 두 개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걸 알아버렸다. 상심했다.
다음 날 학교에 갔다. 민주는 이미 와 있었다. 난 인사도 안 하고 자리에 앉았다. 민주가 톡톡 치며 나를 불렀다. 돌아보기 싫었다. 민주는 한 번 더 불렀다. 난 굴욕적인 기분이 들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뒤돌아 봤다. 민주는 웃고 있었다.
"이거 네가 준 연필이야. 글씨 되게 잘 써진다. 너무 고마워."
민주는 천사였다. 몰래 두고 왔는데 내 연필이라는 걸 어떻게 알았지? 아니 그보다 하찮은 연필에 대해 이렇게 진심 어린 인사를 하다니. 그녀의 미소는 나를 운명의 구렁텅이에서 끌어올려줬다. 먹구름으로 가득했던 나의 삶에 태양을 비춰준 여인. 나는 알 수 없는 기분에 휩싸였다.
민주의 미소는 분명 진심이었다. 그건 입에 발린 소리나, 형식적인 말이 아니었다. 나는 그게 너무 고마웠다. 나의 부끄러운 연필을 진심으로 고마워해 줬다는 사실이 어린 나를 너무나 행복하게 만들었다. 난 이제 민주를 위해 살기로 결심했다. 그녀를 위해 목숨도 바칠 것이다.
그렇게 마음을 먹자, 순식간에 모든 아이들이 배경처럼 느껴졌다. 민주의 방에서 존재하지 않았던 나는 민주의 미소로 다시 부활한 것이다. 이제 세상에는 나와 민주만이 존재했다. 우리는 서로를 보고 환하게 웃었고, 커튼은 바람에 살랑거렸다.
30년이 흐른 지금 민주는 아마 그날을 기억조차 못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민주의 미소를 기억한다. 삶이 힘들고 가끔 엇나갈 때마다 민주의 미소를 떠올린다. 난 민주의 미소로 삶의 진실을 배웠다. '민주를 지켜주겠다'는 11살 소년의 맹세는 여전히 유효하다.
덧붙이는 말로 내가 글쓰기를 좋아하게 만들어준 이명화 선생님의 미소에도 감사드린다. 선생님의 미소도 죽는 날까지 지켜드릴 것이다.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제기를 찬다
제기가 하늘로 올라갈 때마다
아이들이 자꾸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