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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방이 Feb 27. 2020

이제 어떻게 될까, 응?

앤서니 버지스 <시계태엽 오렌지>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도시 전체가 범죄의 온상이라면. 약탈과 강간, 폭력과 살인이 난무하고, 약에 쩐 10대들과 무책임한 어른들의 도시라면. 사람들의 정신을 개조할 수 있는 시계태엽을 발명했다면. 당신이 대통령이라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시계태엽 오렌지>는 최악의 상황에서는 전체주의가 정당화될 수 있는가 하는 심도 깊은 질문을 던지는 소설이다. 작가 앤서니 버지스는 세계대전을 겪은 세대로 전체주의를 비판한다. 조지 오웰의 영향을 받아 <1984>처럼 디스토피아를 그리고 있다. 디스토피아 시대에 한 인간의 삶을 통해 전체주의의 오류와 모순, 그리고 인간의 실존 문제를 다룬다. 다만, <1984>는 이미 전체주의가 되어버린 시대를 그렸다면, <시계태엽 오렌지>는 극단의 상황을 연출해 전체주의로 가는 이행을 보여준다.


소설은 주인공 알렉스의 시선을 따라 크게 세 파트로 구성된다. 첫째, 암흑의 도시에서 늘 범죄를 일삼는 알렉스. 둘째, 감옥에 갇혀 루드비코 실험을 받는 알렉스. 셋째, 석방 후 자신의 의도와 달리 루드비코 요법 때문에 더 이상 범죄를 저지르지 못하는 알렉스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시대 배경이 특정되어 있지는 않지만, 세계대전 이후의 보헤미안이 들끓었던 허무와 세기말을 보여준다. 도시 전체가 범죄에 노출되어 있어, 경찰도 속수무책이다.


알렉스는 친구들과 함께 약을 하고 온갖 범죄를 저지른다. 다정한 연인을 보면 아니꼽다는 이유로 대갈통을 날리고, 적선하는 거지에게 발길질을 한다. 여자를 두들겨 팬 뒤 윤간하고, 가게를 털고 살인을 한다. 이 정도의 범죄를 매일 밤마다 저지른다. 알렉스에게 죄의식이란 없다. 다만 가슴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폭력을 저지르고 싶은 욕구뿐이다.


<시계태엽 오렌지>는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로도 제작됐다. 당시 폭력과 선정성 때문에 상영 중지를 당했다. 모방 범죄가 극심해 비난 여론 또한 대단했다. 영화의 마지막은 소설과 달리 알렉스가 교화되는 장면을 삭제하고 자살로 끝내버린다. 원작이 작가의 생각을 분명히 했다면, 영화는 열린 결말로 예술적 매력에 무게를 실었다.


알렉스는 친구들에게 조차 불친절하다. 평소 거슬리던 친구 딤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고, 자신이 우두머리임을 강요한다. 결국 친구들에게 미움을 산 알렉스는 함정에 빠지고, 감옥에 가게 된다.


알렉스는 살인 등의 혐의로 14년 형을 선고받는다. 유치장에서 2년 즈음 지날 무렵 '루드비코'라는 실험을 자처한다. 루드비코 실험을 받으면 바로 석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더 이상 범죄를 저지를 수 없게 된다. 루드비코 요법은 일종의 '파블로의 개'와 같은 실험이다. 범죄 영상을 보면 즉시 구토를 유발하는 약물을 투여해, 나중에는 약물이 없어도 범죄를 상상하거나 목격하면 즉시 속이 메스꺼워진다.


루드비코 실험에 대해 소설은 계속 의심하고 질문한다. 스스로가 아닌 시계태엽과 같은 강제성으로 선의를 추구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혹은 강제로 만든 이데아에서 사람들은 정말 행복할 수 있는지에 대해 질문한다. 범죄가 없는 도시, 누구나 열심히 일하고 공정한 대가를 받는 사회. 모두가 꿈꾸는 세상이, 사람들 스스로의 의지가 아닌 강제로 만든 결과라면, 과연 사람들은 행복할까?


석방된 알렉스는 과거에 자신이 괴롭혔던 사람들을 만난다. 그들은 알렉스를 보고 린치 하거나 똑같이 괴롭히고 폭력을 행사한다. 알렉스는 화가 나지만, 속이 메스꺼워 화를 낼 수 없다. 등장인물 중 그 누구도 선의를 가진 자는 없다. 모두 각자의 계산 속에서, 속물근성을 보이거나 자신의 이득과 욕구에 따라 움직일 뿐이다.


알렉스는 결국 자살을 시도한다. 알렉스가 자살을 시도하는 이유는 세상과 어른들, 그리고 친구들에게 실망해서가 아니다. 자신의 의지가 차단된 삶이 너무나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루드비코 때문에 알렉스가 좋아하던 음악조차 이제는 고통으로 기억된다.


자살을 시도했으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알렉스는 루드비코로부터 벗어난다. 이제 다시 마음껏 약 탄 우유를 먹고 범죄를 저지르며 마음껏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실제로 얼마간은 16살 때처럼 다시 새로운 친구들과 온갖 범죄를 저지르며 살아간다. 그러나 예전만큼 재미가 없다. 지루하다.


우연히 옛 친구 피트를 만난다. 철부지 같던 피트가 곧 결혼을 한단다. 취직도 했다. 딤 역시 경찰이 됐다. 제법 어른이 된 친구들을 보며 알렉스는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본다.


<시계태엽 오렌지>는 성장 소설이라는 측면에서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과도 비견된다. 알을 깨고 나와 압락사스를 만나는 <데미안>의 싱클레어처럼 알렉스 역시 루드비코를 거쳐 스스로 깨우치는 정반합의 성장을 한다. 다만 <데미안>이 인물의 심리 묘사에 더 세밀하게 치중했다면, <시계태엽 오렌지>는 설정된 환경 속에서 반응하는 인간의 모습을 거칠게 그리고 있다.


<시계태엽 오렌지>는 매 장마다 "이제 어떻게 될까?"라는 알렉스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왜 알렉스는 '이제 어떻게 할까'가 아닌 '될까'라고 했을까? 매 순간 제멋대로 사는 알렉스의 성격과는 다소 대조되는 부분이다. 그러나 자신을 세상에 맡겨 본능이 흐르는 대로 짐승처럼 살아가니, '이제 어떻게 될까?'라는 독백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소설을 읽다 보면 음악이 끊임없이 흐른다. 책을 읽고 있으면 클래식을 배경으로 한 뮤직비디오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특히 격정적이고 웅장한 베토벤 9번 교향곡은 소설 전체를 지배한다. 음악은 이 소설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베토벤 교향곡과 폭력의 장면은 매우 이질적이면서도, 어쩔 수 없는 하모니 같은 것을 연출한다. 복잡한 인간의 심리가 심층적으로 묘사되는 효과가 돋보인다.


버지슨은 분명 전체주의를 배격하고 있다. '전체주의'라는 표현을 쓰면 누구나 당장 거부감을 느끼지만, 강간범의 등짝에 태엽을 꽂는 일에는 찬성할지도 모른다는 점을 간과하지 않는다. 소설 초반에 누구나 인정하는 인류 최악의 범죄자를 설정한다. 자비도 인정도 없는 인물을 설정해 모든 독자가 알렉스를 인간쓰레기로 바라보게 만든다.

전체주의를 반대하는 독자들도 알렉스에게 루드비코 실험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찬성할지도 모른다. 극악무도한 소수의 자유를 억압해 다수가 행복할 수 있다면 그것은 옳은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전체주의는 그렇게 우리들 내부로 천천히, 그리고 분명하게 침투한다.


어쩌면 우리는 아직도 무엇이 더 옳은 것인지에 대한 완전한 합의를 이루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시계태엽 오렌지>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그저 어느 누구도 인간의 자유를 완전히 억압할 수 없다는 사실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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