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으로 살아가기, 또는 이성이 지나친 것
정말 좋은 책을 만나면 좋은 친구를 알게 된 것처럼 기분이 좋습니다. 작년에 읽은 <모스크바의 신사>가 그랬습니다. 책을 읽고 모스크바에 있는 메크로폴 호텔에 꼭 가보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올해는 <풍경에 대하여>가 정말 좋은 친구가 되었습니다. 나만 알고 싶은 책입니다.
<풍경에 대하여>는 프랑스 철학자 '프랑수아 줄리앙'이 쓴 철학서입니다. '프랑수아'는 동서양의 비교 철학으로 저명한 학자입니다. <풍경에 대하여> 역시 풍경을 바라보는 동서양의 철학적 관점을 비교하면서 매우 흥미로운 주제를 제시합니다.
르네상스 시대 회화와 함께 시작된 서양의 풍경 개념은 주체와 대상이라는 이분법적 분리 속에서 형성되었다. 지평선으로 구분되는 풍경은 '바라보기'와 '표현'의 대상으로서 감탄을 자아내는 웅장하고 아름다운 볼거리로 인식되었다. 반면 일찍부터 풍경에 대한 사유를 발전시킨 중국에서 풍경은 '산과 물', 즉 '산수'로 불려 왔는데, 이는 비단 산과 물뿐만 아니라 높은 것과 낮은 것, 움직이지 않는 것과 굽이치는 것, 불투명한 것과 투명한 것, 딱딱한 것과 유동적인 것,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을 한데 일컫는 개념이었다.
서양은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신을 죽이느라 2천 년을 보냈습니다. 풍경을 바라보는 관점 역시 존재론에 갇혀 있습니다. 동양은 풍경을 산수로 인식한다고 합니다. 산과 물, 즉 대응 관계를 이루면서 펼쳐지는 긴장과 변화가 경계를 허물고 세상으로 뻗어간다고 합니다. 임금과 백성, 부모와 자식, 선생과 제자라는 관계를 통해 세상을 이해한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통찰입니다. 프랑수아는 중국의 고전을 독파한 듯합니다. 프랑스인이 어떻게 어려운 한자를 다 읽고 연구했을까요? 서양 철학자가 제시하는 동양의 철학은 새롭게 느껴집니다. 등잔 밑이 어두워서일까요? 늘 곁에 둔 개념이지만, 우리는 풍경을 산수로, 아니 산수라는 개념을 관계 속에서 바라보고 살고 있음을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지적인 것에서 감정적인 것으로 이어짐을 끊어지지 않게 하고 세상과 나 사이에서 일어나는 상호 교환을 중단시키지 않으려면, 내 안에서 반응해 일어나는 이것을 세상에 속한 것인 양 이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풍경이다.
서양의 풍경은 회화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회화는 풍경을 화폭이라는 한계로 제한 하기도 하지만, 관찰자와 풍경을 분리하기도 합니다. 회하는 풍경을 고립된 공간으로, 절대적 공간으로 탄생시킵니다. 회화는 화폭에 풍경을 옮겨 놓음으로써 풍경을 말살시킵니다. 반면에 중국의 풍경은 풍경과 내가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 하나의 풍경으로 읽힌다고 합니다.
독일로 유학 간 한국 학생이 보름달 구경을 하자고 제안했다. 독일 친구는 흔쾌히 수락했고 수락했고, 저녁이 되어 둘은 약속 장소에서 만났다. 그런데 두 학생은 상대방이 들고 온 물건을 보고 서로 의아해했다. 한국 학생은 대금을, 독일 학생은 망원경을 손에 들고 있었던 것이다.
옮긴이 김설아님이 번역 후기에 남긴 에피소드입니다. 서양인은 풍경을 나와 단절한 대상으로 보고 있습니다. 반면에 동양인은 나와 대상의 관계를 중시합니다. 풍경을 대하는 서양인과 동양인의 관점이 뚜렷이 구별되는 대목입니다. 프랑수아 줄리앙은 동양의 관계 철학이 무너져가는 서양철학에 희망의 열쇠가 될 수 있다고 여깁니다. 정작 동양인들은 자신들의 철학을 깊이 사유하지 못하고 있는데 말이죠.
솔직히 저에게 <풍경에 대하여>는 어려운 책입니다. 온 힘을 다해 집중하지 않으면 번번이 내용을 놓치고 맙니다. 한 문장을 읽고 사색하고 다시 읽기를 반복해야 겨우 이해를 흉내 낼 수 있었습니다. 책을 읽다가 다른 생각(저녁 메뉴 따위)에 빠져 처음부터 다시 읽고 또다시 읽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내용을 이해하고 파악하는 게 어려워 집중하기도 힘들었습니다.
250페이지 내내 풍경에 대해서만 이야기합니다. 뭐, 세계의 좋은 풍경을 소개하는 내용도 없습니다. 그저 풍경에 대한 철학적 담론만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다 보면 안개가 걷히고 산봉우리가 솟아나면서 내게 달려와 말을 거는 것 같은 경험을 하게 됩니다. 안개가 잔뜩 낀 숲을 헤매다 정상에 오른 느낌이랄까요? (경우에 따라서는 토를 하는 경험을 할 수도 있습니다)
<풍경에 대하여>의 부제는 "풍경으로 살아가기, 또는 이성이 지나친 것"입니다. 풍경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은 여전히 세상에 발을 딛고 살지만, 동시에 성숙한 다른 차원에 발을 옮겨 놓는 것을 의미합니다.
책을 덮고 흔들리는 버드나무를 한참을 바라보았습니다. 더위가 한풀 꺾인 여름 저녁의 바람이 제 마음속으로 불어오는 듯했습니다. 눈을 감았습니다. 신영복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또 하나의 손'이 짐을 들어주는 손이 아니라 손을 잡아주는 손이기를 바랍니다. 다정한 '악수'이기를 바랍니다.
-고 신영복-
맞습니다. 우리는 관계를 중시해 왔습니다. 자본의 효율성이 인간성을 잠식해 들어갈 때, 풍경으로 살아가는 것은 바로 다정한 '악수'가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