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벌은 마지막 교미를 위해 수백 마리의 벌들과 함께 비상한다. 여왕벌과 한번 하기 위한 경쟁이 시작된다. 그중 단 한 마리의 벌만 여왕벌과 교미할 수 있다. 성공하면 교미 중 여왕벌에 의해 성기가 잘리고 작렬하게 전사한다. 다른 모든 벌들은 성기가 잘려 추락하는 벌을 보며 부러워한다.
곤충계의 사자 사마귀는 어떠한가? 암 사마귀는 성교 중 숫 사마귀의 머리를 먹어버린다. 뇌에서 성행위를 방해하는 물질이 나오기 때문인데, 머리를 자르면, 배에 있는 신경절로 어느 것에도 방해받지 않고 오직 교미만을 위해 피스톤질을 더욱 가열하게 계속하게 된다.
성에 목숨까지 바치는 동물들의 보고는 너무나 많다. 그렇다면 성은 왜 발생했을까? 번식 때문일까? 쾌락 때문일까? 사실 성은 목적이 없다. 그것은 진화에 목적이 없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결과적으로 성은 유지되고 있으며, 그 이유는 성을 통해 번식도 하고, 모든 동물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성적 쾌락을 주기 때문이다.
암컷 코알라들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동성 간의 성행위를 한다. 황소, 염소, 양 등도 자위행위를 한다. 바다표범은 펭귄을 성폭행하고 잡아먹기도 한다. 오리과에 동물 대다수가 강간을 하며, 돌고래도 자위행위, 동성애, 강간을 한다. 심지어 인간에게도 성기를 꺼내 달려들기도 한다.
인간은 어떨까? 다음 글은 김애란 작가의 소설 <달려라 아비>의 한 장면이다. 성이 인간의 맨 얼굴이라면 사랑은 입술에 바르는 루즈이다.
나의 아버지는 그녀에게 있어 항상 달리는 사람이다. 하지만 정작 어머니를 위해서 달린 적은 없다. 어머니가 헤어지자고 했을 때도, 보고 싶다 했을 때도, 내가 태어났을 때도 뛰어오지 않은 사람이다. 그렇게 느렸던 아버지가 단 한 번 온 힘을 다해 뛴 적이 있다. 아버지의 며칠 동안 반복되는 구애, 애원과 짜증과 허세를 보다 못한 어머니가 '피임약을 사 온다는' 조건 하에 허락했던 그날, 아버지는 어머니를 안기 위해 달동네를 단숨에 뛰어 내려갔다. 달동네 맨 곡대기에서 시내 약국까지 전속력을 다해 입이 찢어져라 웃으며 뛰고 또 뛰었다. 허겁지겁 뛰어가다 연탄재에 발이 걸려 넘어져도 벌떡 일어나 "지금 달려가고 있는 곳이 어디를 향하게 될지도 모른 채 죽어라 뛰어갔다."
아버지가 달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사랑이었을까? 성이었을까? 아무도 풀 수 없는 문제이다. 사실 사랑에 대한 정의를 명확히 내리는 것도 어렵다. 영화 <새콤달콤>에서 채수빈이 집에 혼자 있으니 놀러 오라는 말에 뚱보 이장혁이 아버지 차를 훔쳐 달려가는 장면이 나온다. 괴성을 지르며 포효한다. 물론 채수빈이 부르는 데 어찌 달려가지 않을 수 있으리. 이장혁은 그 순간 채수빈을 사랑했다. 사랑은 그런 거다. 포효하는 거다. 우주의 법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