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본격적인 여행을 하는 첫날 아침이다.오늘은 취리히를 벗어나 취리히 호수(Zurichsee)와 봘른 호수(Walensee)를 따라서 85km를 달려 알프스로 들어간다.
하늘이 조금 흐리지만 비만 안 오면 된다. 파란 하늘이 좋은 게 당연하지만 산속으로 들어가면 날씨 변화를 종잡을 수 없으니 비만 안 와도 만족이다.
호텔 조식을 꾸역꾸역 먹는다. 자전거 탈 때 필요한 열량을 가득 채우면서 과식으로 속이 불편하지 않을 정도까지만 먹어야 한다.그래도 있는 음식들은 종류 별로 다 먹은 듯하다.
이번에는 짐이 많다 보니 자전거 가방에 짐을 정리해 채우는 것도 일이다. 짐을 싹 꺼내서 다시 정리한다. 안장 가방과 바퀴 사이의 간격이 좁다 보니 달릴 때 계속 닿을 것 같아서 신경 쓰인다.
어제 돌아다녀서 익숙해진 길을 따라서 출발한다.
출발하기 전에 여기 취리히에서부터 자전거 여행을 시작하는 의미로 취리히 호수를 배경으로 자전거 사진을 찍는다.
이제 저기 보이는 알프스를 향해서 출발!
일단은 취리히 호수를 따라가면 된다. 보도블록이든 뭐든 포장만 되어 있으면 된다.
시내를 따라 이어지던 수변공원이 끝나면 차도로 달려야 한다. 하지만, 자전거가 다닐 수 있도록 차도 한편에 공간이 있다.
호수 반대편도 가보고 싶었지만 호수가 워낙 크다 보니 엄두가 나지 않는다. 호수를 따라 한 바퀴 도는데만 70km가 넘는다.
여기도 포도철이다. 우리나라는 먹기 위한 포도를 주로 재배하지만 유럽은 대부분 포도주 만드는데 적합한 포도를 재배한다.
인도도 자전거길도 찻길도 깨끗하다. 스위스와 오스트리아의 차도는 이렇게 자전거길이 있는 구간이 많다.
저 산 사이의 움푹 꺼진 곳으로 가야 하나 보다.
열심히 달리다 보니 취리히를 벗어나 장크트갈렌 지역으로 넘어왔다. 여기서 계속 직진하면 빙 돌아가게 되니 Rapperswil-jona라는 곳의 큰 사거리에서 길을 한 번 확인한다.
17번 도로를 따라 가야 취리히 호수와 거의 연결된 오버제(Obersee)로 갈 수 있다. 기찻길 옆으로 자전거길이 있는 것은 이미 확인했는데 비포장이라 차도로 간다.
차도로 가도 문제는 없지만 차들이 내 뒤에서 계속 서행하다 추월하다를 반복하기 때문에 미안하다. 차도 옆에 자전거/보행자 도로가 깨끗해 보이길래 이쪽으로 간다. 물론 현지인들은 도로에서 자전거가 달리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데 난 도로에서 차들하고 힘들게 달리던 한국 사람이니까...
산이 보이고 초지가 보이고 소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는다. 도시를 벗어나니 내가 생각하던 알프스 농촌의 모습이 나타났다.
초지를 따라 난 깨끗한 길로 편안하게 달린다.
알프스에서 가장 발전한 대중교통은 기차다. 아무래도 기찻길 옆으로 따라가면 조금이라도 완만한 길로 갈 수 있다.
주말이다 보니 함께 자전거 타러 나온 커플들이 종종 보인다. 나도 지니님과 함께 달려야 하는데...
넋 놓고 달리다가 갈림길을 지나쳐 버렸다. Tamoil 주유소가 있는 로터리에서 9번 도로를 따라 잠깐 가다가 자전거길 표시를 따라 자전거길로 빠진다.
어디서 빠질지는 알기 쉽다. 어서 건너라고 손짓하는 듯한 목조 다리를 건너면 된다. 목조 다리 직전의 저 비포장 산책로 같은 것이 아까 기찻길을 따라 연결된 비포장 자전거길이다.
다리를 건너서 코너링을 하면...
알프스 산맥으로 바로 갈 수 있을 것 같은 직선 자전거도로가 나타난다.
일요일이라 자전거 타는 사람은 꽤 보이는데 대부분 가족이나 커플들이고 우리처럼 동호회 떼거지로 달리는 모임은 보이질 않는다.
우리나라 소들은 우리나라의 자연과 사람을 닮고 여기 알프스의 소들은 이곳의 자연과 사람을 닮았다. 우리나라 소들은 덩치는 커도 순딩순딩해 보이는데 여기 소들은 크고 징그러워 보이기만 한다.
아빠가 딸에게 횡단보도에서 자전거를 타고 건너는 방법을 설명해준다. 우리나라는 이런 기본적인 사회 규칙을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제대로 가르치질 않는다. 이 근처의 나라들은 집집마다 가족수만큼 자전거가 있고 어릴 때부터 자전거를 타고 다니니 어른이 되어 차를 몰고 다녀도 자전거에 우호적인 것 같다.
수로 위로 놓인 다리를 건너 자전거길로 가려하니 비포장이다. 근처의 포장된 농로로 들어가니 조금 돌아서 비포장 둑 자전거길 옆의 깨끗한 포장길을 달린다.
이정표가 없어도 내가 가야 할 방향을 알기는 쉽다. 근처에서 가장 멋지고 험해 보이는 산이 내가 가야 할 방향이다.
이 농로가 큰길과 합쳐지면 다리를 건너서 수로를 따라 올라가야 한다. 문제는 이 수로 옆 자전거길은 좀 심한 비포장길이고 나는 미리 봐 둔 대로 그 뒤쪽으로 돌아서 농로를 달린다.
이 농로에서 보이는 갈림길은 죄다 비포장이다. 포장길을 계속 따라 가면 Schanis라는 마을로 들어가게 된다.
여기서 다시 17번 도로와 만나서 달리면 되는데 이 자전거길 표시만 믿고 따라가다 보니 Bilten이라는 마을로 돌아가게 된다.
그래도 자전거길이라고 달리기에 나쁘지는 않다.
결국 원래 루트대로 갈려고 중간에 기찻길 쪽으로 가니...
아이고... 멀쩡하던 자전거길이 비포장길로 바뀐다. 유럽은 이런 자전거길이 상당히 많아서 무턱대고 자전거길을 따라 가면 이런 낭패를 자주 겪는다.
얼른 도로로 도망 나온다.
Weesen에서 다음 호수인 Walensee를 따라가기 위해서는 근처 캠핑장으로 가야 한다.
마을 남쪽으로 수로와 철길을 건너면 캠핑장으로 빠지는 길이 있다.
이 길을 쭉 따라가면...
낙서 같은 자전거길 표지가 있고 온통 비포장길만 있는 캠핑장이 나타난다.
이 동네는 전체적으로 생각보다 영어 표지판이 없다. 독일어를 쓸 수 없는 외지 관광객은 관광지에 설명이 적혀 있어도 알아먹을 수가 없다.
캠핑장이다 보니 상당히 귀한 개방 화장실이 있어서 다녀왔다. 유럽은 특히나 여행 중에 무료로 개방된 화장실을 찾기가 쉽지 않다.
캠핑장에서 보니 Walensee가 잘 보인다. 나도 여기서 캠핑을 하루 하고 싶어 질 만큼 아름다운 호수다. 사진 찍는 근처에서는 가족들이 캠핑 와서 아이들이 물가에서 놀고 있다.
비포장길을 따라서 캠핑장을 벗어나면 포장길과 비포장길이 반복되는데 비포장이라도 그럭저럭 자전거를 타고 갈 만하다.
사전조사를 하면서 첫날 여기서 비포장을 갈 것인지, 뒤쪽의 언덕 위로 3번 도로를 따라갈 것인지 고민했는데 로드바이크들이 이리로 다니는 정보를 보고 이 길을 선택했다.
바로 옆은 자동차 전용인 3번 '고속' 도로다.
고속도로 옆으로 어떻게든 자전거길을 이어놓았다.
호수 건너편은 절벽인데 절벽 위로 민가가 있고 그 민가들 사이에 꼬불꼬불한 차도들이 연결되어 있다.
터널을 두 번 지나면 자전거길이 고속도로를 넘어가게 된다.
포장된 구간의 끝에는 망한 레스토랑 휴게소가 있고 그 뒤로 급경사 언덕길을 올라가면 떠 비포장길이다.
언덕을 올라왔으니 호수가 더 잘 보인다. 둥실 떠있는 하얀 돛단배가 더더욱 그림 같은 풍경을 보여준다. 저 건너편 산 뒤쪽으로는 스키 슬로프가 있다.
자전거길이 한 번 깊게 굽이돌면 이 비포장 자전거길도 끝이다. 비포장 구간이 비교적 깨끗해서 타고 갈 만한 데다가 곧 포장길이 나오니 로드바이크들도 이리로 다니는 것 같다.
언덕 꼭대기의 말이 나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이제 오늘의 제일 걱정되던 구간을 벗어났다.
이제 마을들이 계속 도로로 연결된다. 마을마다 교회나 성당이 있어서 매시간마다 종을 치니 시끄럽다.
고속도로 옆으로 마을길을 따라 달린다.
기찻길과 나란히 달리기도 하면서 쭉쭉 달린다.
마을에 뭔가 코끼리나 사자 같은 조형물이 보인다면 초등학교가 있는 것이다.
Unterterzen이란 곳에서 언덕을 넘어온 3번 지방도와 만나게 되고 여기서부터 이 지방도를 따라 달린다. 여기에는 스키 케이블카가 있는데 스키장이 개장하지 않아도 산악자전거를 싣고 올라가는 사람들이 이용한다. 여기서 케이블카를 한 번 갈아타면 해발 955m인 Flumserberg라는 마을까지 올라가서 오늘의 목적지인 Flums까지 다운힐을 할 수 있지만 로드바이크니 그냥 온전히 평지 도로로 가야지...
잘 가고 있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진다.
비가 심해지니 일단 보이는 가게에 멈춰서 조금 늦은 점심을 먹기로 한다. 아침에 조식을 엄청 먹어댄 덕분에 아직까지 보급 없이 달릴 수 있었던 듯하다.
메뉴판을 받았는데... 영어로 쓰여있긴 하다. 스위스라 음식값도 비싸긴 비싸네... 별거 아닌 음식도 2만 원이 넘는다.
송로버섯이 든 버섯 팬 파스타를 시켰다. 소다를 달랬더니 완벽한 탄산수가 나왔다.
어쨌거나 말린 토마토도 살짝 들어있고 진득하니 맛은 있다. 옆 테이블의 오토바이 할배들도 비슷한 걸 먹고 있다. 여기는 로드바이크 떼 라이딩은 없는데 오토바이 할배 떼 라이딩은 흔하게 볼 수 있다.
점심을 먹는 동안에 다행히 비가 그쳤다. 신발이 젖기 전에 멈춰서 다행이다.
비가 그치니 더더욱 선명한 모습을 볼 수 있으니 기분도 좋아진다.
팬 파스타에 탄산수 하나 먹은 게 3만 원이 넘는 것 같다. 비싸구먼...
비도 그쳤으니 슬슬 출발한다. 조금만 더 가면 될 것 같다.
맑아진 하늘 아래 기막히게 멋진 산봉우리들을 바라보면서 달린다.
Walenstadt? 어찌 읽어야 하는지 감도 안 잡히는 기차역에서 경사로를 따라서 철길 반대편으로 넘어갈 수 있다. 계속 달리면 3번 지방도와 3번 고속도로가 합쳐지진 않아서 계속 도로를 따라갈 수 있지만 좀 더 한적한 길로 가고 싶다.
철길 건너에는 이런 낡은 농로가 있는데 달릴만하다.
유럽에는 낙서에 미친놈들이 많아서 여기저기에 낙서들이 많다. 낙서 쟁이들만 없어도 3배는 깨끗해질 것 같다.
뒤로 보이는 산 봉우리는 급경사의 커브 풀밭이 있다. 저기서 눈썰매를 타다간 바로 아래 절벽으로 다이렉트 황천길일 것 같다.
가끔 지나가는 기차들이 심심한 분위기를 조금 누그러트려 준다. 기차들도 참 이쁘게 생겼다.
어딜 보아도 멋진 풍경이다.
Flums로 가는 자전거길 표지판이 있다. 앞바퀴 든 표시는 산악자전거길 표지이니 산악자전거길 표지만 있는 곳으로는 절대 가면 안된다.
오늘의 목적지인 Flums에 도착했다.
숙소에 가봤더니 오후 5시부터 체크인이다. 지금은 오후 3시도 안되었으니 근처 카페라도 가야겠다.
마을 중앙로에 카페가 있다. 일요일이니 여기 말고는 죄다 문 닫았다.
나는 독일어라고는 구텐 탁하고 당케 쉔 밖에 모른다. 여기서 맥주를 주문했는데 330ml과 500ml의 가격 차이가 얼마 안 난다. 그래서, 큰 잔으로 주세요! Gross glas, bitte (그로스 그라스, 비떼)라는 말이 세 번째로 아는 독일어가 되었다. 아주 중요한 말이니 꼭 기억해야 한다.
맥주도 마시고 콜라도 마시니 단맛에 이끌려 벌들도 찾아온다. 동네 할머니 한 분이 내 맞은편 자리에 합석했다. 나는 독일어를 못하고 할머니는 영어를 못하니 구글 번역기로 말을 하고 할머니는 손짓 발짓으로 얘기를 하는데 한 30% 정도 이해가 된다.
맥주와 콜라를 몇 잔 마시다 보니 또 카페에서 지출이 꽤 나간다. 여긴 스위스라 뭘 조금만 먹어도 비싸다. 하지만, 일요일이라 슈퍼도 문을 닫았으니 다른 방법이 없다. 아직 체크인 시간이 조금 남았으니 뒷동산 벤치에 앉아서 여유를 부려본다.
참 아담한 마을이다. 갑자기 옆 등산로에서 산악자전거 한 대가 툭 튀어나온다. 윗동네에서 이어지는 산악자전거 코스를 내려왔나 보다. 재밌겠다.
근처에는 양들이 풀을 뜯다가 내가 다가가니 경계한다. 양은 생각보다 사납고 성질 있는 동물이다.
오후 5시가 조금 안되어 숙소에 가서 체크인했다. 자전거는 차고에 둘 수 있게 해 주는데 차고에 있는 자전거 6대가 다 이 집 자전거라고 한다. 젊은 여관 주인 부부도 자전거를 즐기는 사람이다. 오늘 손님은 나뿐이라고 한다. 화장실이 공용인데 나 혼자 쓴다니 아주 편하다.
3층은 지붕 밑 다락방인데 휴게실 겸 식당이다. 내일 아침 식사는 여기로 오라고 한다.
여관 주인이 자전거를 좋아하다 보니 나에게 근처 자전거 코스 가이드를 주면서 근처 자전거 코스 설명을 해준다. 산악자전거 타기 정말 좋은 곳이라고 한다.
샤워하고 잠깐 눈 좀 붙인다는 게 일어나 보니 컴컴하다. 저녁을 먹어야 하는데 일요일인 데다가 저녁 8시가 넘었으니 문 연 곳이 있으려나 모르겠다. 천상 굶게 생겼는데...
다행히 식당 하나가 영업 중이다. 물론 손님은 나 하나뿐이다. 샐러드와 맥주, 그리고 코돈부르를 주문한다. 당연히 맥주는 그로스~그라스~
코돈부르는 간단히 말해서 치즈 돈가스다. 감자튀김과 익힌 야채도 나왔는데 큼직하고 양이 많다.
맛은 있었는데... 이렇게 먹으니 5만 원 가까이 나왔다. 살인적인 스위스 물가... 그래도 이 시간에 맛있게 배 채웠다는 사실에 만족한다.
식당에서 나오니 비가 쏟아진다. 숙소에 들어가니 딱히 할 것도 없다. 오랜만에 혼자 달리는 외로운 장거리 여행이다. 길 찾는 것부터 길 잘못 들어서 고생한 것까지 생각하니 85km라는 주행거리에 비해서 엄청 피곤하다.
어쨌든 알프스에 들어왔다. 엄청난 기암절벽 봉우리와 변화무쌍한 날씨가 벌써부터 알프스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것 같다.
이제 내일은 스위스의 산골 마을인 아로자로 간다. 해발 1700m 위에 있는 산골마을은 알프스의 어떤 모습을 내게 보여줄런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