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스위스 알프스에 들어왔다. 오늘은 스위스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이라는 Chur에 가서 Arosa라는 산골마을로 오르막길을 올라갈 것이다. 사실 Arosa는 산꼭대기의 막다른 도로 끝자락이라 굳이 들르지 않아도 되지만 스위스의 알프스를 조금이라도 느끼고 싶어서 찾아간다. 오늘 가야 할 총 거리는 65km 정도지만 이 중에 28km가 Chur에서 해발 1750m의 Arosa까지 올라가야 하는 오르막길이기 때문에 결코 쉬운 길이 아니다.
조용한 시골인 Flums에서 잘 자고 아침이 되었는데... 하늘이 흐리고 비가 떨어진다. 일기예보로는 오전 9시쯤에는 비가 그친다고 하는데 날이 잔뜩 흐린 것이 과연 비가 그칠까...
일단은 아침 식사나 하면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려보자.
어제밤 손님이 나 혼자라 내가 원하는 시간에 조식을 차려준대서 아침을 8시에 먹는다고 했다. 3층 식당에 가보니 여관 주인이 아침을 잘 차려놓았다. 어지간해서는 배 부르게 먹지 않는데 최대한 칼로리를 뱃속에 욱여넣으려고 꾸역꾸역 열심히 먹는다.
이쪽 지역에서는 이렇게 과일잼을 종류별로 제공해준다. 미국이나 유럽 다른 곳에서도 딸기잼 포토잼이야 흔하게 나오지만 알프스에서는 살구잼을 내어줄 때가 많다. 은근히 쓴 맛도 나고 딱히 맛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다른 지역과는 다른 것이니 조금씩 손이 간다.
오전 9시지만 여전히 비가 온다. 오늘도 총 주행거리는 얼마 안 되지만 큰 오르막길을 올라가야 하니 갈 길이 멀다. 여관 주인 부부의 배웅을 받으며 출발한다.
어제 바라봤던 그 멋진 알프스의 멋진 산봉우리들이 구름에 묻혀 하나도 보이질 않는다.
그래도 알프스라 어딜 봐도 푸르른 들판이 펼쳐진다. 알파카 한 마리가 축사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면서 나를 바라본다. 알프스가 안데스와 기후가 비슷한지 알파카들이 종종 보인다.
Flums를 벗어나서 계속 수로 쪽의 농로를 따라가다가 Mels에서 Sargans로 건너가서 3번 일반 도로를 따라서 달린다.
비가 오면 두 바퀴는 항상 불안하다. 가능하면 도로를 피해 한적한 자전거길로 달린다. 길 옆으로 계속 목장이 펼쳐진다.
멀쩡히 3번 국도를 따라가면 빠르고 편하게 갔을 텐데 자꾸 눈에 띄는 자전거길 표시에 이끌려 샛길로 들어간다. 아침에 내리던 비는 이제야 슬슬 잦아든다.
여기에도 곤돌라 승강장이 있다. 구름에 싸여서 안 보이지만 저 위로 또 멋진 봉우리가 있겠지.
샛길로 와리가리 하면서 Bad Ragas라는 마을에 도착했다.
결국엔 다시 3번 도로를 따라 달린다.
개천을 하나 건넌다. 이 개천은 사실 그 유명한 라인강이다. 1200km가 넘는 라인강의 두 원류 중에 하나가 이쪽에서 이어진다.
라인강을 건너고 3번 고속도로도 건너면 자전거길은 3번 고속도로 옆으로 간다. 꽤 커보이는 아울렛도 지나가는데 스포츠 브랜드들이 많이 입점한 듯하다. 아직 여행 초반인데다가 물가가 비싼 스위스니 들러볼 생각도 하지 않는다.
중간에 만난 자전거길 표시를 보고 달렸더니 옥수수밭 사이로 난 농로다.
자전거 한 대가 저 다리 위로 가는 것을 보고 따라갔는데...
이 길이 아닌가벼...
어찌어찌 마을로 들어왔는데... 오르막길이 나타나서 비적비적 올라간다. 여기서 놓친 자전거길은 내일 돌아오는 길에 따라 가게 되는데 1/3은 비포장길에 길찾기도 쉽지 않은 경로였다.
일단은 Chur가 1차 목적지니 Chur 방향으로 간다. 독일어 발음을 모르니 그냥 철자 그대로 쓰는데 자꾸 고양이 간식으로 유명한 츄르가 떠오른다.
자전거길 찾기도 힘들다. 이제 그냥 3번 일반 도로를 따라 쭉쭉 달린다. 알프스의 멋진 산봉우리들이 구름에 가려 있으니 혼자 힘차게 도는 풍력발전기의 존재감이 크다.
한참 달리다 보니 츄르... 아니 Chur의 경계 표지판이 나타났다.
근처에서는 꽤 큰 도시라 그런지 교통량이 점점 늘어난다.
무작정 3번 도로만 따라 달리다가 큰 로터리에서 멈추었다. Chur 대극장이 있는 것을 보니 시내 중심가이긴 한가보다.
원래 계획은 여기에서 숙박을 잡고 짐을 놔둔 후에 아로자(Arosa)에 다녀오는 것이었는데 어제저녁에 숙소를 검색하다가 아로자에 적당한 숙소를 발견하고 예약해두었다. 이제 무거운 짐을 달고 해발 1775m의 산골마을 아로자까지 올라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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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ur에서 아로자 가는 길은 동쪽에 있는데 이정표는 남쪽으로 향해서 무시하고 동쪽으로 간다.
아... 도보길이 있는데 짐을 단 자전거로 올라가기엔 경사가 심한 편이다. 이래서 이정표가 돌아가게 표시되어 있구나...
어쨌든 아로자로 출발한다. 여기가 아로자로 올라가는 길, 말 그대로 아로자 길(Arosastrasse)의 시작이다.
Chur에서 아로자 가는 오르막길의 총 거리는 대략 28km 정도다. 해발 700m 정도의 Chur에서 해발 1775m의 아로자까지 올라가려면 해발 1100m를 올라가야 하는데 우리나라에서 비슷한 상승 고도를 보여주는 제주시에서 1100 고지 가는 길이 18km 정도니 국내 어지간한 언덕길보다 훨씬 긴 오르막길이다. 그럼 좀더 완만하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는데 초반 경사는 그리 쉽지 않다.
계속 오르막길을 오른다. 계속 오르다 보면 작은 마을이 하나씩 나온다.
골짜기 건너편에도 마을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골짜기 아래에는 기찻길이 있다.
계속 올라간다. 알고 보니 이 아로자 길은 3등분을 해서 처음과 끝이 가파르고 중간은 매우 완만한 형태의 코스다. 아직 1/3 지점에 못 갔으니 계속 가파르다.
중간에 터널도 몇 번 지나가야 한다.
터널이 그리 길지는 않지만 내부가 어두우니 전조등과 후미등은 필수로 챙기는 것이 좋다.
오르막길을 8km 정도 올라왔더니 Castiel이라는 마을부터 길이 점차 완만해진다.
길이 완만해지니 살 것 같다. 완만하다고 속도 내지 않고 천천히 달린다. 날씨가 맑았다면 정말 멋진 경치였을 텐데 비가 그친 것만으로도 감사히 생각해야 한다.
아직 아로자까지 19km나 남았다. 평지 19km라면 금방이지만 오르막길 19km라니...
중간중간 도로 공사를 하는 곳은 이렇게 신호가 있다.
컴컴한 터널이 또 나타난다. 후미등을 켜느라 잠시 멈췄더니 지나가는 오토바이 할배들이 괜찮은지 묻는다. 당연히 괜찮지! 노 프라블럼!
그러고 보니 깜빡한 게 있다. 시간도 애매하고 먹을 것도 없어 보여서 점심을 건너뛰었더니 슬슬 힘이 빠진다. 지도에 식료품점이 근처에 있다고 해서 가보니 아침부터 정오까지만 여는 집이다.
식료품점 앞 벤치에 앉아서 챙겨온 초코바나 먹으면서 잠시 쉰다.
경치는 좋은데 힘들다...
다시 힘을 내서 달린다. Peist라는 마을에 도착했다.
Piest에서 저 멀리 독특한 다리가 보인다. 1914년에 건설된 Langwieser Viaduct라는 철교다. 아로자까지 올라가는 기찻길인 아로자 라인을 만들기 위해서 100년 전에 세계 최초의 철근 콘크리트 철교를 여기에 세웠다고 한다. 저 가느다란 다리가 이 험한 알프스 산골짜기에서 100년을 버텼다니 대단하다.
이 마을에는 좀 독특한 사람이 사나 보다. 고목나무 뿌리를 기괴하게 조각해놓은 것들이 보인다. 밤에 보면 으스스할 것 같다.
Langwieser Viaduct가 계속 언뜻언뜻 보인다. 내가 철길을 볼 때마다 기차가 지나가던데 이번에는 기차는 안 지나가려나?
뭔가 다른 마을보다 쬐끔 번화해 보이는 마을이 나타났다. 그래 봐야 여관 겸 식당이 두어 군데 더 있는 정도다. 여기가 Langwieser Viaduct가 있는 Langwieser라는 마을이다.
폭포가 나타났다. 항상 흐르는 폭포라기보단 위쪽 초지에 모이는 빗물이 흘러내리는 곳인 것 같다.
잠시 쉬는데 기차 소리가 들려서 Langwieser Viaduct 쪽을 보았다.
기차가 지나간다. 이것이 아로자 라인(Arosa-line; 독일어로는 Arosa-bahn)을 다니는 기차인 Allegra이다. 이 기차길은 스위스의 다른 고산 기차길인 Albula 라인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자전거도 실을 수 있으니 편하게 기차를 타고 올라갈까 하다가 최대한 내 힘으로 가보자고 생각한 것 때문에 이 고생이다. 기찻길은 거의 골짜기로 이어져서 차도에서는 거의 안 보이다가 여기서부터나 차도와 종종 만난다.
잠깐 내리막길로 내려가다가 다시 경사가 심해지더니 헤어핀 커브길에 레이싱팀 간판이 나타났다. 아까 Langwieser 마을 출구에 스타트 라인 플래카드가 있었는데 거기서부터 출발해서 아로자까지 달리는 클래식카 힐 클라이밍 대회가 어제 열렸다고 한다. 그러니까... 차들이 오르막길 경주하던 길을 나는 짐 달린 자전거로 오르고 있다.
이제 다시 경사를 느끼며 오르막길을 올라가야 한다. 뒤를 돌아보니 생각보다 구불구불하다.
심한 경사를 계속 올라가다 잠시 쉬었다. 표지석을 보니 Chur에서 24.5km 온 듯하다. 차들도 계속되는 오르막길을 힘겹게 올라가는데 종종 지나가는 성능 좋은 스포츠카들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인다.
중간중간 소화전이 있다. 이렇게 소화전을 아이 모양으로 꾸며놓은 것을 종종 만나는데 유럽 감성치고는 귀엽다.
아까 Chur에서 24.5km 왔다고 해서 이제 아로자까지 3.5km 남았구나~ 했는데 오르막을 올라가다 보니 또 3.5km 남았다는 표지판이 있다. 왠지 1 km 정도 손해 본 것 같은 느낌이다. 찻길 옆으로 철길이 보이는데 여기는 기차에게도 버거운지 기찻길이 이리저리 꼬여있다. 저 위의 고가도로 같은 것도 기찻길이다.
헤어핀 코너를 한 번 더 돌아 올라가니 대략 해발 1500미터쯤 온 것 같다. 철판으로 만든 산양 모양의 조형물이 있다. 비도 조금 내리는데 뭔가 구름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느낌이다.
뿌연 시야 속에 또 산양 조형물이 나타난다. 이 오르막길은 대체 언제 끝나는 것일까...
오! 아로자가 웰컴 한다. 드디어 아로자 입구에 도착했다. 햇빛이 쨍한 그림인데 지금 날씨는 왜 이럴까...
아로자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것은 대형 슈퍼마켓 체인이다. 비도 오고 숙소에서 나오기 귀찮으니 여기서 뭐든 사서 가자.
배가 고프니 이것저것 샀다. 초코슈, 야채샐러드, 초코우유, 타르타르... 저 50% 짜리 과일팩은 나중에 열어보니 상한 냄새가 나서 그냥 버렸다. 다음부턴 확실한 것만 사야지. 여행하다가 괜히 식중독에 걸리거나 몸이 다치면 안된다.
나는 별로 안 좋아하는 푸라면이 있다. 스위스 산꼭대기에서 배고플 때 먹으면 그렇게 맛있다고 하니 정말인지 시험해보기 위해서 하나 샀다. 놀랍게도 김치도 판다. 김치는 맛도 왠지 두렵고 다 먹을 자신이 없으니 패스.
이것저것 샀더니 들고 가려면 장바구니를 사야 한다. 여기도 우리나라 대형 마트와 마찬가지로 비닐봉지를 안 주고 장바구니를 2유로에 판다.
드디어 오늘 예약해둔 호텔에 도착했다. 1층은 바가 있고 2층에 로비가 있어서 자전거를 아래에 두고 가자니 불안하다. 뭐 이 산골짜기에 이렇게 비 오는 날 누가 수고롭게 자전거를 가져갈까. 그래도 혹시 모르니 간단한 자물쇠로라도 묶어두고 올라간다.
스위스와 오스트리아의 호텔들은 기본적으로 스키룸이 있어서 스키 시즌에 손님들의 스키 장비를 보관해준다. 이 스키룸을 스키 시즌이 아닐 때는 자전거를 두도록 해준다. 체크인하면서 자전거를 스키룸에 넣어두고 객실에 올라간다. 심플하고 아늑한 방이다.
테라스까지 있으니 좋긴 한데 이 한치 앞도 안 보이는 구름 속의 추운 날씨에는 무용지물이다.
테라스에서 보는 풍경은 사일런트 힐이다. 아주 고요한 마을이다. 묶여있는 보트들이 여기가 호수임을 알려주지만 이미 호수와 안개 사이에 구별이 전혀 안된다.
컵라면을 먹을까 했더니 방 안에 먹을 수 있는 설비가 전혀 없다. 커피 포트라도 얻으러 로비에 내려가다 만난 젊은 직원 아가씨에게 물어보니 커피포트에 숟가락, 포크, 냅킨까지 다 챙겨준다. 심지어, 잠시 후에는 방으로 생수까지 가져다주었다. 엄청 고맙다.
어차피 구름 때문에 나가도 보이는 게 없고 먹을 것도 충분하니 그냥 방에서 잠시 눈을 붙인다. 일어나 보니 구름이 조금 걷혔다.
이렇게 보니 나쁘지 않은 야경인데... 테라스는 춥다.
객실에 냉장고가 없어서 테라스에 놔둔 맥주가 시원해졌다. 맥주와 타르타르를 중심으로 이것저것 먹는다. 과일은 살짝 상한 냄새가 나서 먹지 않고 버려버리고, 우리나라 육회와는 다르게 살짝 시큼한 맛이 나는 유럽식 육회인 타르타르도 지난 여행들에서 안 먹어봤으면 상한 줄 알고 버렸을 듯하다. 아니, 얼핏 보기에는 수상한 다진 고기라 아예 사질 않았겠지...
친절한 호텔 직원 덕분에 기분이 나아지긴 했는데 날씨만큼이나 기분이 꿀꿀하다. 내가 이런 사일런트 힐스러운 풍경을 보려고 30km의 오르막길을 올라서 해발 1750미터의 시골 구석까지 온 것인가... 그래도, 올라가는 길에는 나름 대단한 경치를 볼 수 있었으니 반절은 성공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