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오스트리아의 가장 서쪽 지역인 포어아를베르그(Vorarlberg)에서 티롤(Tirol) 지역으로 넘어가는 관문인 아를베르그 패스(Arlberg pass)를 넘어 Prutz라는 마을까지 가야 한다. 해발 1791m의 쉽지 않은 언덕이지만 그나마 오스트리아의 서쪽에서 티롤 지역으로 넘어가는 길 중에는 쉬운 고개라고 한다. 아래 지도의 183번 도로는 해발 2020m, 그 아래 스위스 Chur에서 바로 오스트리아로 가는 180번 도로는 해발 2300m의 언덕을 넘어야 하니 아를베르그 패스를 넘기로 한 것이 천만다행이다.
조용한 아침, 조용한 식사를 한다. 다른 사람들도 식당 들어오면서 직원과 몰겐~(Morgen)하고 인사하는 것 외엔 조용하다.
늘 먹지만 그 다양함 때문에 질리지 않는 표준적인 호텔 아침식사다.나는 점점 야채를 먹는 양을 늘린다. 칼로리를 생각하면 빵을 먹어야 하지만 입과 뱃속을 생각하면 채소가 편하다.
짐이 많다 보니 안장 가방을 자전거에 단단하게 묶어놓았다. 그래서, 각각 지퍼백으로 모듈화 되어 있는 짐을 장바구니 가방에 옮겨서 숙소에 들어가는 게 편해졌다. 출발 전에 다시 안장 가방에 빡빡하게 채워 넣어야 한다. 조금이라도 느슨하면 안장 가방 밑바닥이 뒷바퀴에 닿는다. 알프스 고지대를 벗어나면 추울 때 입으려고 가져온 옷들은 다 버릴 예정인데 그전까지는 짐이 많다.
자전거 타기 좋은 날씨다. 마을 중심을 가로지르는 자전거길을 무시하고 그냥 내 마음 가는 대로 간다.
마을 출구에서 길이 둘로 나뉘는데 Arlberg pass로 쉽게(?) 넘어가는 길과 더 힘들게 해발 2020m의 Bielerhöhe pass를 넘어가는 길이 있다. Bielerhöhe pass로 가면 엄청난 헤어핀 코스를 올라갈 수 있지만 고생하는 건 Arlberg pass 만으로도 충분하다. 알프스 산맥에 의해 막혀서 Vorarlberg지역은 오스트리아의 다른 지역과 격리되다시피 살다 보니 좀 더 접근성이 좋은 스위스로의 편입을 원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스위스, 오스트리아, 독일 모두 반대해서 여전히 오스트리아로 남아있다고 한다.
기찻길과 함께 간다. 기본적으로 일반적인 기차는 언덕을 오르는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기찻길과 함께 가는 길은 다른 길보다 완만하다. 또한, 기차에 자전거를 실을 수 있으니 자전거 고장이나 내 몸에 이상이 있을 때 대처하기도 좋다. 혼자 여행할 때는 이렇게 안전장치를 갖춰두어야 한다.
길을 따라 약한 오르막을 계속 오르니 마을 옆으로 멋진 산봉우리들이 나타난다.
마을 입구에는 산봉우리나 마을 시설에 대한 안내판도 있다.
우리나라의 산들은 대부분 오랜 기간 풍화되어 반들반들하다 보니 큰 특징이 없는 산들이 많은데 여기 산들은 하나하나가 개성 있게 생겼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폭포도 꽤 흔하다. 저 높은 곳에 어디서 물이 저만큼 생기는 것일까.
당분간은 인스브루크 방향으로 가야 한다.
자동차 전용도로 옆으로 자전거도 다닐 수 있는 일반도로가 이어진다. 동네 사람들 말고는 대부분 자동차 도로로 다니니 일반도로는 한적한 편이다. 터널도 자동차 전용 터널 옆에 일반 도로용 터널이 있다.
터널을 지나가면 산 줄기 하나를 관통한 것이다. 이제 풍경이 바뀐다. 자전거 여행의 장점은 하나의 풍경을 충분히 즐겼다고 생각할 때쯤에 풍경이 바뀐다는 것이다.
여기서 도로를 따라갔어야 하는데 오른쪽 샛길로 자전거길 표시가 되어 있고 자전거들이 이리로 다닌다. 혹시나 해서 들어가 봤더니 역시나 MTB들이나 다닐만할 비포장길이다.
비포장길을 진행하다가 거친 노면을 못 참고 다시 도로로 빠져나가는 갈림길이 있어 후다닥 빠져나온다.
오스트리아의 도로는 정말 깔끔하게 포장되어 있고 이물질 하나 없이 청소도 잘 되어 있다. 오래된 포장도로 바닥에 쓰레기와 깨진 술병이 온통 널려있는 야만인의 나라 프랑스 하곤 다르다.
멀쩡히 도로로 달리다가 Sonnenkopf라는 마을을 지날 때쯤 또 자전거길 표시의 유혹을 못 참고 자전거길을 따라갔더니 케이블카 승강장이 있고 자전거길은 상태가 안 좋다. 그렇게 당하고도 자전거길 표시만 보면 정신을 못 차리다니...
뭐 그래도... 찾기 힘든 무료 화장실이 있으니 들렀다 간다.
케이블카 승강장에서 조금 올라가니 고속도로 휴게소가 있다. 슬슬 점심시간이니 여기서 쉬었다 간다.
양이 좀 많아 보이는 샌드위치와 콜라를 마신다. 콜라는 하루에 두 병 이상 마시는 것 같다. 이번 여행에서는 계속 콜라와 초코 우유만 마시고 있다. 이상하게 다른 음료수에는 손이 안 간다.특히, 칼로리가 없는 음료수나 음식은 나에겐 불량식품이다.
아무래도 비포장길이 계속 나올 것 같은 느낌에 다시 일반 도로로 빠져나왔다. 자전거길만 보면 대책 없이 들어가니 이게 뭔 고생인지...
위쪽 도로 상황을 알려주는 표지판이 있다. 날씨가 이렇게 좋으니 당연히 연결되는 도로가 모두 오픈되어 있다.
Landeck 방향으로 가야 하지만 자동차 전용도로로 들어가면 안 된다. 아를베르그 패스로 간다. 이정표가 많으니 길을 헷갈릴 위험은 없다.
자동차 전용도로는 저렇게 긴 터널을 통해 산 중턱을 뚫고 반대편으로 나가버린다.
여기도 터널이 종종 있는데 반대편 차선 전용이 많다.
내가 올라가는 방향은 터널이 아닌데 이게 오히려 경치가 보이니 좋은 것 같다. 길이 좁다보니 차들이 나를 추월하기가 힘들다. 대형 버스가 느릿느릿한 내 속도에 맞춰서 천천히 쫓아온다. 공터가 보이자마자 비켜줬더니 고맙다면서 손짓하며 경적을 울린다. 오스트리아에서도 스페인이나 이탈리아처럼 나를 위협하는 운전자는 없었다.
아침부터 계속 오르막길로 꽤 올라온 것 같은데 끝이 보이질 않는다. 슬슬 지쳐갈 때쯤 Stuben이 나타났다. 정상까지 마지막 구간의 시작점이다.
이 Stuben이란 마을 바로 뒤에 성벽 같아 보이는 꼬불꼬불한 언덕길이 있다.
저 언덕길을 오르기 전에 마을 입구의 호텔 카페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한다. 마침 자전거 여행을 하는 미국 할아버지가 있어 합석했는데 전공이 비슷한 분야라서 그런지 말이 잘 통한다.
근처의 풍경을 바라보면서 미국 할아버지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먼저 온 미국 할아버지 먼저 출발한다. 나는 느긋하게 조금 더 쉬고 화장실도 갔다가 출발한다.
이 마을은 예전부터 엄청 산골이었다. Vorarlberg와 Tirol의 경계이지만 고개가 험하다 보니 자동차가 발명된 이후에도 발전이 늦었다. Tirol 지역 사람들은 여기보다 쉽게 넘어 다닐 수 있는 북쪽 산맥 쪽으로 주로 교류를 하였다고 한다.
그럼 이제 이 언덕길의 마지막을 올라가 봐야겠다.
Stuben의 성벽 같은 꼬부랑길은 하도 길을 비틀어놔서 그런지 생각보다 완만하다. 완만한 만큼 거리가 길어지는지 계속 올라가도 위에 계속 길이 있다.
꼬부랑길의 정상에 올라왔다. 여기서 Landeck 방향으로 가야 한다. Zurs 방향은 겨울 스키 시즌에 오면 스키 타기 좋은 슬로프들이 잔뜩 있다. 스키 슬로프를 모두 합치면 무려 22km라고 한다.
발 밑에 Stuben이 보인다. 생각보다 높진 않다. 그도 그럴 것이 차들이 덜 힘들게 다닐 수 있어야 하니 엔진에 무리가 안 가는 정도로 길을 만들어 놨다.
고개 정상까지 가려면 좀 더 가야 한다.
그래도 상당히 완만하니 1700m 고산 지대의 풍경을 보면서 천천히 올라간다.
여기에도 케이블카 정거장이 있다. 이런 곳에서 스키나 보드를 타면 정말 재밌을 것 같다. 스노보드를 좀 더 잘 타게 되면 언젠가 다시 와봐야겠다.
드디어 Arlberg pass의 정상이 보인다.공기가 맑아서 보이는 풍경들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멀리 있으니 아직 좀 가야 하는 셈이다.
드디어 정상이 보인다. 오늘 고생은 이걸로 끝인가?
정상에서 마주친 자전거객과 인사를 한다. 세어부스! 오스트리아식으로 간단히 인사할 때는 세어부스(Serbus)라고 한다. 간단한 인사치고는 긴 편이다.
드디어 해발 1791m Arlberg pass에 도착했다. 정복? 나는 정복이라는 말을 잘 쓰지 않는다. 잠깐 왔다가 떠나는 여행객에게 정복이란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언덕 꼭대기지만 은근히 평평하고 경치라 할만한 것이 없는 곳이다. 얼른 숙소에 가서 쉬고 싶다. 아까 stuben에서 만났던 미국인 할아버지가 터널 앞에서 멈춰있길래 큰 손짓으로 인사하면서 쭉 내려간다.
정밀 한참을 내려간다. 브레이크 레버를 놓으면 끝도 없이 가속하니 내가 제어하기 좋은 속도인 시속 55km를 넘지 않도록 주의해서 내려간다.
내려가는 길에도 양 옆으로 멋진 산봉우리들이 보인다. 눈 덮인 산은 높은 산, 눈 안 덮인 산은 낮은 산....
뭔가 판타지 영화에 나올 것 같은 건물이 보인다. 성 같아 보였는데 그냥 교회라고 한다.
언덕을 끝까지 내려가면 Landeck이 나온다. 여기까지 한참을 내려왔다. 계곡 길이 모이는 교통의 요지라 그런지 그나마 큰 도시다.
규모 있는 동네니 당연히 대형 슈퍼마켓이 보인다. 적당히 보급을 해야겠다. 그래 봐야 늘 먹는 쵸코우유랑 콜라다.
여기서... 인스브루크 방향의 루트대로라면 안 가도 되는 Prutz 방향으로 가야 한다. Prutz에서 내일 하루 쉬면서 Kaunertal이라는 지역에 가보려고 한다.
자전거길이 있는 듯 없는 듯한 길이다. 길도 좁은데 스위스 Chur 지역과 인스브루크를 연결하는 길이라 차량 통행이 많다.
오는 길에 밑에 자전거길이 언뜻 보였는데 내려갈 방법이 없었다. 그 자전거길은 여기서 다리를 건너 이어지는데... 조금 돌아가야 하는 길이다. 나는 힘들고 이미 차에 있는 대로 시달렸으니 그냥 차들과 함께 달린다.
드디어 Kaunertal 이정표와 Prutz 경계표지가 나왔다. 오늘의 일정은 여기서 끝이다.
Prutz의 입구에 취소 불가로 예약해놓은 호텔이 있다. 아마 취소 가능이었다면 취소했을지도 모르만, 어쨌든 길 건너편 호텔 자전거 창고에 자전거를 보관하고 오늘도 혼자 쓰는 더블룸으로 체크인하였다. 수건과 침구로 무슨 모양을 만들어놨는데... 난 고대로 내 몫만 풀어서 쓴다.
해가 저물어간다. 산 중턱에 허연 건물도 식당이라는데 저기까지 가기 싫다.
그럼 호텔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때워야지. 씻고 내려와서 레스토랑에 앉았다. 영어 메뉴판을 주니 좋다. 여기 독일 문화권은 영어 쓰는 사람이 많이 안 오는지, 혹은 일부러 그러는지, 관광지 설명이나 식당 메뉴판을 영어 병기하거나 따로 준비해두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일단은 맥주, 큰 잔으로!
오늘은 고기가 먹고 싶어서 스테이크와 샐러드를 주문했다. 맛은... 그럭저럭 무난하다.
저녁 먹고 방에서 쉬다가 어둑해지고 나서야 동네 구경을 좀 해보려고 나왔다.
사람은 별로 안 보이고 고양이만 돌아다닌다.
마을 사람들이 어디로 갔나 했더니 마을 뒤쪽의 어느 큰집 마당에서 음악회를 열고 있다. 뜻하지 않은 마을 음악회에서 영어로 부르는 노래를 몇 곡 감상한다. 외지인, 그것도 보기 힘든 동양인이 와서 뒤에서 보고 있으니 다른 사람들이 날 신기한 듯 쳐다보며 미소를 지어준다.
그저께 스위스의 Arosa에 올라갔다 온 후로 이틀 만에 또 해발 1700m가 넘는 언덕길을 올라갔다. 생각보다 경사가 완만하지만 출발 전부터 살짝 느껴지던 대둔근의 염증이 다시 도지는 느낌에 간신히 올라갔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고갯길인 만항재가 1300m도 안 되고 가장 높이 올라가야 하는 고개가 제주도 1100 고지인데 Arlberg pass는 1791m에 상승 고도도 1200m다. 그런데, 여기 알프스에서는 꽤 낮은 고개라고 한다. 알프스에서 높은 고개라 하려면 해발 2500m는 되어야 한다.
Prutz에 도착하고 일기 예보를 보니 예상대로 내일은 흐리고 비가 온다고 한다. Kaunertal에 가려고 하는데 날씨 때문에 제대로 즐길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