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과 휴식
2025년 9월 22일(월)
[9일 차] Melara 0km / 누적 거리 680km
조식을 7시에 달라고 말해놨던 터라 일어나자마자 거실로 내려갔다. 날씨가 좋으면 야외 정원에서 먹을 수 있다고 했는데, 오늘은 흐리고 바람이 많이 불어서 실내에 차려줬다. 이 대단한 상을 개인별로 다 세팅해 준다. 아이구, 황송해라..
옆방에서 잔 캐나다 자전거 커플도 7시에 내려와서 같이 먹었다. 갸들은 어제저녁 식당에서부터 음식 늦게 나온다고 꿍얼거리더니, 이 성대한 아침밥상에서도 에그스크램블을 굳이 굳이 해달라고 한다. 그래놓고 그것도 다 남겨버림.. B&B 운영 참 쉽지 않다.
큰일이다. 어제 다친 팔이 여전히 아프다. 아무래도 팔이 나아지지 않아서 오늘 이 숙소에서 하루 더 묵기로 했다. 내가 하루 더 머물 수 있도록 호스트가 부킹닷컴 앱에서 예약을 닫아놨던 것을 모르고, 캐나다 커플이 떠나고 남아있는 더 저렴한 방을 결제해 버렸다. 차액을 현금으로 주려고 했는데, 호스트가 괜찮다고 거절했다. 미안하네, 증말..
그리고 팔 상태를 보기 위해 병원을 가야겠다고 얘기했더니 기꺼이 차를 태워줬다. 시간이 지날수록 병원에 사람이 많아지면 대기가 더욱 길어진다고 해서 아침을 먹자마자 우리는 서둘러서 출발했다.
강 건너에 있는 큰 병원은 숙소에서 10km도 넘게 떨어진 곳이었는데 출퇴근 시간과 겹치면서 강을 넘어가야 하는 하나뿐인 다리에서 좀 막혔다. 스틱인데도 아주 터프한 운전으로다가 오로지 나를 위해 운전해 준 Federica가 고맙다.
그녀는 예전에 이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다가 애기 보느라고 관두고, 지금은 아부지와 함께 B&B를 하고 있다. 곧 종합병원에 도착했고 Federica는 이탈리아말을 못 하는 내가 접수할 수 있도록 옆에서 번역을 도와줬다. 그리고는 애기 유치원에 데려다줄 시간이라고 집으로 먼저 돌아갔다.
조금 기다리긴 했어도 내 앞에는 사람이 1-2명뿐이라 생각보다는 빨리 응급실로 들어갔다. 아픈 부위를 말하니까 x-ray실로 안내해 줬다.
찍고 돌아와서 또 기다렸더니 팔꿈치뼈에 작은 실금이 있다고 알려줬다. 외과로 연결해 주길래 직원들에게 물어물어 찾아가 또다시 기다렸다. 종합병원이라 넓어서 혼자 찾아가기가 쉽지 않다.
기다림의 연속 끝에 외과의사를 만났다. 아까 응급실 젊은 의사는 영어를 꽤 잘했는데, 지금 이 교수 같은 할배는 영어를 거의 못한다. 그래서 번역기로 거의 소통을 했다. 간호사랑 뭐라 뭐라 하더니 목에 거는 깁스를 해주려고 하길래 안 한다고 했다. 이거 지금 하고 가봐야 어차피 계속 차고 있지도 않을 거고, 나에겐 짐만 될 뿐이다. 그랬더니 진료확인서를 아래처럼 써줬다. 번역을 해보니 "좌측 요골두 골절, 환자는 전용 장치를 이용한 치료를 거부함"..ㅋㅋㅋ
결과지를 가지고 처음 접수한 응급실로 돌아갔다. 의사가 이름을 불러서 진료확인서와 같이 돌려주고는 가라고 한다.
'응? 결제 안 했는데?'
"ㅇㅇ, 끝났어. 걍 가."
나 외국인인데 무슨 일이지? 아무튼 개이득이니까 일단 간다.
진료가 아닌 진찰이 2시간 만에 끝났다. Federica에게 왓츠앱으로 메시지를 보냈는데, 자긴 바빠서 아부지가 데리러 갈 거라고 했다. 비가 많이 오는 이 날씨에 아부지가 차로 데리러 오셨다. 넘모 감솨해요..
방에 돌아왔는데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있다. 아침에 급하게 나가느라 엉망이었는데.. 민망하고 고맙다.
할 일도 없고 해서 방에 누워 꼼지락 대다가 낮잠을 잤다. 그동안 피곤했는지 일어나 보니 4시간이 훌쩍 지났고 그 사이 날씨도 쨍하게 개었다.
점심을 먹지 않고 잠만 잤더니 오후 4시다. 배는 별로 고프지 않은데 일단 밖으로 나가본다. 여기는 식당 하나, 카페 하나, 바 하나가 있는 아주 작은 동네다. 식당은 지금 브레이크 타임이고 바는 오늘 쉬는 날인 듯해서 카페로 가본다. 직접 만든 생면 파스타와 다양한 디저트를 파는 곳인데, 밥종류가 보여서 주문해 본다.
접시에 원하는 양을 담아 따뜻하게 데워주고, 위에 치즈도 뿌려주니 그럭저럭 먹을만하다.
숙소로 다시 돌아와서 왔다 갔다 했더니, 아부지가 문을 똑똑 하고는 마실거랑 간식을 좀 가져다준다고 했다.
'오늘은 논알코올로 부탁드려요~'
쥬스와 과일, 과자를 방으로 올려주셨다. 넘모 따뜻한 가족.. 당분간 팔 때문에 술을 먹으면 안 될 것 같다.
뒹굴뒹굴 오늘은 완전한 휴식의 날이다. 진행이 좀 이상하긴 해도 지금쯤 쉴 타이밍이 되긴 했다. 다치지 않았으면 나는 매일 자전거를 타고 있었을 것 같다.
쉬다가 하나 있는 어제 그 식당으로 저녁을 먹으러 간다. 짜증나게 노을이 너무 예쁘다.
내가 가야 할 뚝방길 자전거 도로가 코앞에 있다. 내일은 자전거를 다시 탈 수 있을까?
식당 테라스의 어제 그 자리에 다시 앉았다. 그리고 어제의 메뉴가 정말 맛있었던지라 그대로 똑같이 주문했는데, 자전거 타는 고생을 안 해서 그런지 어제만치는 맛이 안 난다.
배는 고프지 않지만 아플수록 잘 먹어야 할 것 같아서 어찌어찌 먹어본다. 팔 걱정하느라고 스테이크 사진도 안 찍었네.. 어제와 같은 비주얼이긴 하다.
다 먹고 나오려는데, 옆 테이블의 영국 아저씨가 말을 건다.
"이 동네에 식당 여기 말고는 다 닫은 거야?"
'닫은 게 아니라 그냥 여기 하나야.."
2025년 9월 23일(화)
[10일 차] Melara ~ Ferrara 0km / 누적 거리 680km (차량 이동)
오늘도 7시에 아침을 먹기로 해서 일어나서 거실로 내려갔더니 비즈니스 맨으로 보이는 아저씨 게스트가 4명은 더 있다. 어제보다 느긋하게 조식을 즐겼다. 그렇지만 팔이 나아진 것은 아니다. 아무래도 뼈에 이상이 있으니 금방 괜찮아지지가 않는다. 시간을 가지고 조금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이 숙소에서 하루 더 쉬고 싶었지만 오늘은 예약이 이미 다 차 있어서 이동해야 한다. 페라라(Ferrara)까지 50km 강변 뚝방길만 따라가면 되니 조금 자전거를 타볼까도 싶다. Federica에게 팔꿈치 보호대를 구할 수 있는지 물어봤다. 마침 남편이 자전거 타는 것을 취미로 하고 있어서, 집에 한 번도 안 쓴 게 있으니 찾아본다고 했다. 하지만 곧 돌아와서는 이사하면서 잃어버린 것 같다고, 보호대를 사거나 맞출 수 있는 곳(Sanitaria?)으로 데려다준다고 했다. 고마운 세뇨라..
아침을 다 먹은 다음에 방에 들어가 씻었다. 그리고 다음 손님을 위해 내 짐을 모두 싸서 1층 거실에 내려놓고 기다렸더니 아부지가 태워준다고 데리러 오셨다. 차를 타고 한참을 간다. 동쪽으로 10km 넘게.. 내가 이 집에 낸 숙박비는 나를 태워다 주는 기름값으로 거의 쓰이는 것 같다.
도착했더니 할무이가 가게에 있는 걸 죄다 꺼내 내 팔 사이즈에 맞는 것을 찾아줬다. 별거 아닌 이게 무려 30유로나 한다. 그렇지만 지금은 이거라도 해야 할 것 같다. 나한테 맞는 사이즈가 없었으면 더 비싼 돈과 긴 시간을 들여 제작하는 걸 기다려야 했는데, 그나마 다행인 것 같다. 이탈리아 여행 기념품이 하필 이런 거라니..
Melara 전까지는 롬바르디아였고 이곳은 지금 베네토 지역이다. 그리고 오늘 Ferrara가 속한 에밀리아 로마냐로 넘어간다. 나 오늘 Ferrara고 간다고 하니 Federica의 남편이 나와 자전거를 같이 차에 실어서 데려다준다고 했다. 오늘 B&B 예약이 다 차버려서 내가 떠나야만 하는 것을 굉장히 미안해했다. 사실 이 가족이 나에게 미안할 이유는 없는데.. 호의와 배려에 눈물이 났다.
아저씨는 오전에 일을 하고 11시 반쯤 집으로 왔다. BMW 3시리즈 해치백인데, 뒷좌석에 애기들 카시트가 있어서 자전거를 실을 수 없어 보인다. 잠시 기다리니 번호판이 달린 자전거 캐리어를 가져와서 뒤쪽에 연결하고, 그 위에 내 자전거를 올려서 튼튼하게 고정시켜 줬다.
가는 길에 알게 된 건데 아저씨의 자전거 사랑은 보통이 아니었다. 카본 로드 자전거와 산악자전거, 가족들과 같이 타는 생활 자전거와 전기 자전거도 있다고 했다. 쉬는 날 가족들과 같이 차에 자전거를 실어서 타러 다니느라고 캐리어가 있었던 것이다.
다행인 건 Federica와 남편 모두 영어를 꽤 잘하는 편이라 나에게 더욱 적극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었다. 가는 길에 심심하지 않게 아저씨가 이런저런 얘기를 해줬다.
"여기 되게 낮은 다리가 있는데, 이탈리아에 홍수 났다고 하면 뉴스에 저 다리가 무조건 나올 거야ㅋㅋ / 강 건너편은 계단식 논처럼 돼있어서 비 오면 소들이 2층으로 올라가더라니까? / 헐, 지금 라디오에서 서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어. 이제껏 처음 있는 일이야. 진짜 신기해!! / 강변 둑길이 자전거 타기 참 좋거든. 그 길에서 운전해 볼 테니 잘 봐봐. 차 막히는 시간엔 오히려 그 길이 빠르기도 해~"
Federica만큼이나 따뜻한 사람이었따.
나를 정확히 숙소 앞 주차장에 내려주고 건물 앞까지 가방을 들어주겠다는 걸 내가 말렸다. 정말 정말 고마워요, 조심히 돌아가요..
오늘 숙소는 3시부터 체크인이 가능하지만 미리 호스트에게 연락해서 1시쯤 쳌인 할 수 있는지 물어봤다. 가능하다고 말한 호스트는 시간에 맞춰 앞에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1층 창고에 자전거를 보관하고, 계단을 올라 4층에 있는 방으로 안내해 줬다. 다리는 멀쩡하니까 괜찮다. 호스트가 영어를 잘 못해서 우린 서로 번역기를 보여주며 대화를 했고, 그녀는 곧 떠났다.
이 도시에 중국인이 운영하는 한식당이 있다는 사실을 며칠 전에 알게 됐다. 점심식사가 3시까지인데 30분 넘게 걸어가야 하는 거리라 부지런히 가본다. 후덥지근한 날씨지만 구름이 살짝 껴서 그나마 좀 낫다. 어차피 해가 쨍해도 난 갔을 거야..
2시에 도착해서 고민고민하다가 매운 라면과 오징어볶음을 주문했다. 라면을 아주아주아주아주 맵게 해달라고 말했더니 이탈리아 직원이 웃었다. '소노 꼬레아노!!'
제로콕을 주문했는데 팔이 아파서 캔을 제대로 못 따니까 중국인 사장이 와서 해줬다. 고마워요, 대륙..
라면은 신라면 정도의 맵기로 나왔는데, 스프는 뭔가 100% 농심의 맛이 안 난다. MSG가 부족한가.. 오징어볶음은 유럽에서 튀김용으로 많이 쓰는 미니미니한 한치가 나왔는데, 고춧가루 맛이 영 안 난다. 맛이 없는 건 아닌데, 뭔가 한식은 아닌 것 같은 느낌? 열심히 먹어보지만 조금 남겼다.
여긴 꽤 큰 도시지만 나는 복잡한 게 싫기도 하고 언제 자전거를 다시 탈지 몰라서 강에서 멀지 않은 도심으로부터 외곽의 숙소를 선택했다.(사실 한식당이 가까운 이유가 컸음..) 그런데 숙소로 걸어가는 길에 보니 사람들 분위기가 묘하고 낙서도 많은 것이 딱히 잘 사는 지역은 아닌 것 같다. 심지어 어떤 남색 SUV가 계속 나를 따라왔다. 일부러 길을 반대로 가면 차를 돌려서 오고, 건물 뒤를 지나는 척하면서 뒤로 돌아가더라도 어떻게 또 보고는 졸졸 따라와서 계속 나를 주시하는 것이다. 이곳에 나를 도와줄 사람은 없다.
겁이 나던 찰나에 약국을 발견했다. 약국의 브레이크 타임이 끝날 시간이 다 되니 문 앞에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다. 사람들 틈으로 가서 약국 오픈과 동시에 안으로 들어가서 줄을 섰다. 약사는 3명이 있었는데, 다행히 나를 맡은 약사는 영어를 조금 할 줄 알았다. 진단서와 팔꿈치를 보여주고는 진통제를 알약!!으로 달라고 했다. 또 유리병 시럽을 주면 곤란해.. 이제야 다 먹고 버렸다고..ㅠㅠ 알러지를 체크하고는 약을 하나 줬는데, 한국에서는 그 흔한 이부프로펜이다. 무려 7유로를 주고 샀지만 지금은 빨리 낫기 위해 뭐든 다 해보고 싶다.
약국에서 나오니 나를 따라다니던 남색 차는 사라졌다. 이제는 비슷한 차만 봐도 흠칫 놀라고 있다. 숙소에 돌아오니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잠이 쏟아졌다.
1시간을 기절한 듯 자다가 일어나서 해가 저물기 전, 근처의 큰 마트로 갔다. 식당을 가봐야 특별한 것도 없고 이젠 사 먹기도 지친다. 게다가 이 동네에서 어두울 때 돌아다니고 싶지가 않다. 마트가 이렇게 큰데, 왜 한국라면 하나 안 파는지 모르겠다.
고민하다가 사온 샐러드와 구이통닭을 숙소에서 먹었다. 입맛이 없어서 잘 안 들어가지만 빨리 낫기 위해 먹어본다. 배가 점점 나온다. 입맛이 없는데 배는 왜 점점 나오는 것일까..
씻고 나서 거울을 보니 왼쪽 눈가에 멍이 들었다. 단순한 거면 좋겠는데, 넘어지면서 머리에 받은 충격으로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닌지 조금 걱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