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1일(수)
[18일 차] Campomarino ~ Zapponeta 122km / 누적 거리 1,438km
벌써 10월이라니... 여행의 절반이 지나갔다. 오늘 숙소도 카페에서 아침을 먹는 시스템이라 준비를 끝낸 뒤 어제 받은 쿠폰을 챙겨서 체크아웃을 했다. 라떼마끼야또와 크로아상을 먹고 출발한다.
SR(Strada Regionale) 도로는 처음 보는 것이라 한국에 있을 때 검색해 봤는데, SS(Strada Statale)와 SP(Strada Provincial)의 중간쯤인 듯하다. 시작할 때 구글은 SP 도로를 타라고 알려줬지만 나는 그냥 SR 도로를 타봤다. 어렵게 올라온 언덕인데, 다시 내려갈 수는 없으니까..
관광객이 없는 동네라 그런가 생각보다 차가 많지 않아서 탈만하다. 그러다가 다들 어디로 빠져버렸는지 차가 아주 없어졌다. 가끔 다니는 농기계만 보일 뿐이다. 큰 산을 끼고 있는 갈가노(Gargano) 국립공원을 우회하기 위해 내륙으로 들어왔는데, 해안만큼은 아니지만 업다운이 꽤 있다.
달리다 보니 길이 좀 안 좋아졌는데 그만큼 차가 다니지 않는다. 차가 안 다니니 도로 보수를 잘 안 하는 이상한 악순환이지만 나에겐 오히려 좋다. 오늘은 비 소식이 있어서 선크림을 얼굴에만 바르고, 가까운 곳에서 자려고 숙소도 몇 군데 봐뒀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날씨가 좋다. 맑은 하늘에 뭉게구름이 해를 가려줘서 오르막을 가기에 아주 좋은 날씨! 간만의 업힐은 좀 힘들었지만 차가 거의 없어서 나름 괜찮았다.
시원한 내리막을 달려서 마을에 들어왔다. 요즘 아침식사가 계속 부실해서 뭘 좀 먹어야 할 것 같다. 카페에 들어가서 크로아상과 라떼마끼야또, 레몬소다를 먹었다. as usual..ㅎㅎ // 원래 자려고 했던 동네는 15km 뒤에 있는데, 날씨도 좋고 아직 오전이라 포자(Foggia)까지 가볼까 한다.
산세베로(Sansevero)로 달리는 길에 계속 고민했다. 포자(Foggia)로 들어갈지, 좀 더 달려서 해안으로 나갈지.. 이탈리아에서 손꼽히는 관광지인 갈가노 국립공원의 일일 버스투어를 포자에서 갈 수 있지 않으려나? 하는 기대감에 간만에 큰 도시로 들어갈까 고민을 했지만 나는 역시 한적한 곳이 좋으니 복잡한 포자를 거치지 않고 해안으로 질러가는 길을 택했다. 나중에라도 갈가노 투어를 가려고 따로 알아봤는데, 그곳은 매우 큰 규모를 자랑하는 곳이라 렌터카로도 1주일 정도 둘러봐야 하는 대단한 곳이었다. 그래서 갈가노는 이번 여행에서 포기하기로 했다. 이탈리아에 다시 와야만 하는 이유가 생겼다.
정신없는 산세베로(Sansevero)를 지나서 SP 도로로 빠지니 올리브 나무와 포도밭이 잔뜩이다. 저 멀리 풍력발전기가 보이고, 초록색 무(?) 같은 채소를 잔뜩 심어놓은 게 또 예쁘다.
저 멀리 갈가노 국립공원의 웅장한 산세가 보인다. 그대로 통과했다면 정말 힘들었을 길이다. 국립공원이라 통제된 도로가 많을 테니 보급은 더더욱 어려울 것이 분명하다. 멋진 배경으로 남겨두길 잘했다.
노면이 슬슬 안 좋아지다가 곧 엉망이 되기 시작했다. 겨우겨우 자전거를 탈 수 있을 정도의 길이 10km 넘게 이어져서 속도가 안 났다. 솔직히 오늘 도로는 좀 너무했다. 차라리 비포장이면 오지 않았거나 포기하고 달렸을 텐데, 이건 비포장보다 더 심한 수준이다. 이렇게 한적하고 고즈넉한 곳에서 바닥만 보고 달리는 이 상황이 어이가 없다. 잊을 수 없는 SP25 도로..
어찌어찌 달려서 누더기 도로가 겨우 끝나갈 무렵, 아드리안 자전거길 6번 표지판이 나왔다. 이게 내가 계속 타고 있던 그 길이라고? 말도 안 돼..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서 길이 엄청나게 좋아졌다. 막 새로 깔아놓은 듯한 진짜 검정색 아스팔트가 펼쳐졌다. 그때부터 자전거 경로 표지판이 아주 꼬박꼬박 나오는 게 너무 킹 받았다. 도로는 좋아졌다가 나빠졌다가를 계속 반복했지만 다행히 아까와 같은 길은 더 이상 없었다.
해안으로 가는 이 길에는 마을이 없어서 보급할 수 있는 곳도 전혀 없다. 그래서 아무도 없을 때 큰 나무 뒤에서 볼일을 살짝 보고 출발하려는데, 이런.. 자전거가 이상하다. 자전거를 기대서 세워놓다가 뭔가에 걸렸는지 체인이 빠졌다. 나뭇가지로 이래저래 하다가 불편해서 그냥 존이 챙겨준 라텍스 장갑을 끼고 손으로 한 번에 해결했다. 왼팔이 아프니 자전거를 들고 페달을 돌리는 것도 지금은 힘든 일이다.
비구름은 나보다 앞서 갔는지 하늘은 맑은데 바닥은 젖어있다. 다시 달리기 시작하는데 이제는 맞바람이 분다. 산과 바다에서 불어오는 어마어마한 바람 때문에 길가의 풀들이 거의 누워있었다. 그래도 가야만 한다. 이곳엔 마을이 없다.
힘들게 달려서 숙소가 있는 마을에 도착했다. 부킹닷컴에서 후기가 하나도 없는 아주 신규 숙소를 예약했는데, 초심자의 마음으로 잘해줄 수도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그런데 숙소는 정확한 주소도 나와있지 않고 메시지도 무응답, 전화도 무응답이었다. 전화를 한 3번쯤 하니 누군가 받았는데 이탈리아말로 화를 내면서 끊어버렸다. 다시 전화하니 이번에는 영어로 화를 내며 또 끊었다. 이제 비가 오기 시작하는데...
마을의 다른 숙소로 갈까 했는데, 열린 식당이나 카페가 전혀 없는 죽은 도시 같아서 9km 떨어진 다음 마을까지 더 달리기로 했다. 마을 입구로 되돌아 나오는 길에 조용한 바가 보여서 콜라를 주문하고 숙소를 다시 예약했다. 비가 와서 자켓을 꺼내고 있는데, 숙소 주인은 평점 9점대답게 바로 메시지를 보내왔다. 그래도 그 동네는 사람 사는 곳 같으니 좀 더 가보지, 뭐. 이곳에서 잤다면 식당도 못 갔을 것 같다.
* 아까 체크인하지 못한 숙소는 부킹닷컴에 민원을 넣었으나 환불을 받지 못했다. 이놈의 게으름 때문에 한국에 돌아와서 신청을 했는데 적어도 해당 숙소의 체크아웃 시간 전에는 앱/유선 등으로 요청을 해야 한다고 했다. 이런 경우가 처음이라 몰랐네..=_=
비구름으로 흐려진 하늘 아래, 후미등을 켜고 축축이 젖은 도로 위를 달렸다. 숙소 앞에 도착해서 호스트에게 연락하니 금세 와서 문을 열어줬다. 여기 숙소 진짜 넓고 아주 좋은데, 특히 세탁기라는 신문물이 대단히 마음에 든다. 급하게 예약하느라 시설은 살펴보지도 못했는데, 뜻밖의 선물에 기분이 좋아졌다.
짐만 풀어놓고 나가서 근처 바에 갔다. 생맥주가 없다고 해서 페로니 큰 병을 하나 시켜서 먹고 계산을 하려니 현금만 받는다고 한다. 하필 오늘 다 두고 나왔는데.. 좀 기다려달라고 하고선 숙소에 돌아와서 돈을 챙겨가 결제했다.
일단 평상복을 세탁기에 돌려놓고, 자전거 복장 그대로 좀 쉬다가 저녁을 먹으러 갈 참이다. 풀리아주에 입성했으니 문어랑 오르키에테랑 해산물 많이 먹어야지! 그러나.. 30분 넘게 이 동네를 돌아다닌 결과 문을 연 식당은 없었다. 몇 군데 있는 바와 카페에 전부 들어가서 먹을 만한 음식이 있냐고 물으니 다들 없다고 한다. 그래서 또또또! 크로아상과 라떼마끼야또를 먹었다. 오늘 세끼 다 빵이라니.. 믿을 수 없어..ㅠㅠ
숙소에 돌아와서 내일 아침으로 먹으라고 준 토스트 비스켓에 누텔라를 발라서 주스와 먹었더니 허기는 조금 면했다. 호스트는 날씬한 젊은 여자였는데, 양도 자기 허리 사이즈마냥 콩알만치 줬다. 어제 숙소는 간식으로만 이곳의 3배 넘는 양을 줬는데 말이다.
자전거 옷과 장갑까지 전부 세탁기에 돌려놓고, 뜨듯한 물로 늦은 샤워를 한다. 밖은 비가 오면서 많이 추워져버렸다. 빨래 건조대에 야무지게 널어놓으니 오늘의 모든 고생이 잊혀진다. 그리고 나는 내일 아침까지 입을 옷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