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4일(토)
[21일 차] Gioia del Colle ~ Gioia del Colle 29km / 누적 거리 1,614km
숙소에는 아침을 알아서 챙겨 먹을 수 있도록 냉장고와 선반에 먹을 것들이 잔뜩 있었다. 호스트의 덩치에 맞춰서 알차게 보관된 음식을 양껏 먹었다. 사실은 2인분이었으려나... 9시에 아저씨가 키를 가지러 오기로 하면서 계단으로 자전거 내리는 것을 도와줬다. 급경사인데 계단면이 너무 짧아서 클릿이 몇 번이나 미끄러져 넘어질 뻔했다.
아직은 흐리지만 일단 출발해서 공항 뒤 샛길로 달려본다.
어제처럼 올리브 나무와 포도밭이 잔뜩이다. 농장의 울타리를 돌담으로 쌓아놓은 것이 제주도와 약간 닮은 느낌이다. 새벽까지 내린 비 때문에 생긴 물 웅덩이를 몇 개 지나가는데, 어제만큼의 난코스는 없다.
샛길이 끝나서 SP 도로로 나왔는데 포장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처럼 깨끗하다. 점점 맑아지는 하늘 아래 열심히 달리는데 이상한 소리가 난다. 가방이 뒷바퀴에 닿는가 싶어서 끈을 더 팽팽하게 조여 맸다. 다시 출발하는데 이상한 소리가 없어지지를 않는다. 이런, 뒷바퀴에 펑크가 났다. 이 좋은 도로에서..
그렇지 않아도 끼우기 힘든 마라톤 타이어를 달고 와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일단 가장자리 공터로 나와서 자전거를 뒤집어 놓고 뒷바퀴를 분리했다. 날카로운 작은 핀이 타이어에 박혀 있는 걸 힘들게 빼냈는데, 이것 때문에 펑크가 난 건지는 모르겠다. 튜브를 교체하느라 시간을 쓰느니 에어펌프로 바람을 대충 채워서 5km 남은 다음 마을의 자전거 가게로 가는 것이 나을 것 같다. 토요일이라 가게도 오전이면 닫을 테니 서둘러야 한다. 다시 바퀴를 끼우려는데, 이마저도 뭔가 잘 되지 않는다. 손은 엉망이 되어버렸고, 시간이 늦어질까 봐 마음은 급해졌다.
"너 여기서 뭐 해?"
자전거를 타고 가던 사람이 나를 보고 멈췄다.
'나 바퀴 펑크 났어..'
"(손을 만져보더니) 펑크 안 났는데?"
'그거 지금 공기 좀 채워서 그런 거야. 펑크가 맞는 것 같아. 힝..ㅠ'
"걱정 마, 내가 도와줄게. 우리 같이 고칠 수 있어!"
일단 아저씨가 가진 미니 펌프로 바람을 넣고, 다음 마을까지 같이 자전거를 타고 갔다.
마을에 도착했는데 자전거 수리점이 아닌 카페를 가자고 한다. 곧 가게가 닫을 텐데... 일단 은혜를 입었으니 커피라도 한 잔 사려고 들어갔는데, 아저씨가 계산한다고 빵까지 고르라고 했다. 고마워요.. 마침 오늘 출발한 마을에 살고 있는 웜샤워 호스트, 페페(Peppe)라고 했다.
"풀리아에서 웜샤워 호스트 나 혼잔데, 너는 왜 어제 Gioia del Colle에서 자면서도 나에게 연락을 안 했어? 나 옆 마을에 차 수리 맡겨놔서 그거 찾으러 가는 길이었는데 거기에 자전거 두 대 실어서 걍 우리 집으로 가자. 내가 자전거 고쳐줄게!"
커피를 마시면서 고민을 하다가 같이 가기로 했다. 일정에 여유가 좀 있어서 어쩌다 하룻밤 웜샤워 체험을 하게 됐다. 산발된 머리를 다시 동여매고 자동차 수리점으로 향했다.
페페가 안내해 주는 잘 다져진 비포장 자전거 도로로 다음 마을까지 같이 타고 갔는데 나 혼자였다면 아마 포장된 차도로 가지 않았을까 싶다. 덕분에 동네 주민들이 다니는 길로 달려서 자동차 수리점까지 무사히 도착했다. 차는 큰 다마스 느낌이라 바퀴를 빼지 않고도 자전거를 세워서 넣을 수 있었다.
차를 타고 페페의 집으로 가는 길에 구 철도를 개조해서 자전거 도로를 만든 것, 협곡의 모양새 등 이것저것 설명을 자세하게 해 줬다. 페페는 영어를 상당히 잘했는데 예전에 미국에서 몇 년 살았다고 한다. 해외 이곳저곳에서 동굴 탐험하는 일을 했다는데, 스페인어도 원어민 수준으로 하는 것이 참 대단하다. 집에는 83살의 어머니가 계시다고 했다. 페페는 50살.
집에 오자마자 1층 가라지로 가서 펑크 난 뒷바퀴에 실란트를 넣어줬다. 스페어 튜브가 두 개나 있다고 했는데, 일단 이걸 먼저 해보겠단다. 그러세요.. 어차피 내가 튜브 교체할 것도 아니니께..
게스트룸에 나를 안내해 줬는데, 개인 화장실까지 딸린 큰 방이 마음에 든다. 샤워를 하고, 오늘 입은 자전거 옷을 빨기 위해서 세탁기를 쓸 수 있냐고 물었다. 페페와 어무니도 옷을 빨아야 해서 같이 돌리면 된다고 했다.
아까 차에서 엄마한테 계속 전화하더니 사람 한 명 데려간다고 한 모양이다. 점심식사를 준비하는 내내 냄새가 예술이다. 세탁기를 돌려놓고 셋이서 같이 점심식사를 했다. 흰살생선으로 만든 스프에 밥을 넣고 같이 자작하게 끓인 음식이라 내 입맛에 넘모 맛있었다. 여기서 쌀밥을 먹게 되다니... 내 몫까지 한 솥을 했는데, 내가 거의 절반 넘게 퍼먹었다. 한국 사람들은 매운 걸 좋아하지 않냐면서 직접 올리브유에 담근 매운 고추 절임을 가져다줬다. 내가 하도 잘 먹으니 가지고 가라며 작은 병에 싸주기까지 했다. 반찬으로 나온 올리브도 맛있었다. 밥을 다 먹으니 프로볼로네 치즈를 잔뜩 잘라줬다. 처음 먹어보는데 짜지 않고 담백해서 큰 덩어리를 세 개나 먹었다. 그리고 레드와인에 담가둔 복숭아를 떠줘서 먹고, 월넛으로 만든 리큐어도 후식주로 한 잔 마셨더니 세탁기가 다 돌았다.
테라스에 가서 같이 빨래를 널어놓고 페페의 방에서 컴퓨터로 함께 지도를 봤다. 마테라(Matera)가 좋다고 자꾸 내일 같이 가자는데, 거긴 나의 루트와는 반대편이라 가고 싶지 않다. 가민에 유럽 지도를 미처 다운받지 못해서 이때 계속 시도했지만 결국엔 전용 젠더가 없어서 못했다. 기냥 가지, 뭐...
방에서 좀 쉬다 나오니 커피를 타주길래 그걸 먹고 혼자 시내 구경을 나섰다. 오늘은 사실 자전거 타기 좋은 맑은 날씨라 좀 아쉽지만 이탈리아 가정집에서 이렇게 대가 없이 대접을 받고 있다니 한편으로는 황송하기도 하다.
마을에는 성벽이 있어서 그걸 먼저 보고, 또 크게 한 바퀴 돌았다. 어제 비가 많이 와서 식당만 후다닥 가고 전혀 둘러보지 못했더니 오늘은 또 다른 느낌으로 새로웠다.
괜히 카페에 가서 라떼마끼야또와 작은 코르넷 빵도 먹었다. 직원이 잘생긴 청년이라 아주 흐뭇했다. 건물은 거의 3층 이상인데, 좁은 일방통행 도로가 많으니 오후 늦은 시간에는 길가에 햇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는다. 그늘은 꽤 서늘해져서 해가 저물기 전에 집으로 돌아왔다.
벨을 누르니 페페가 가라지에서 나와 날 불렀다. 아주 노는 줄 알았더니 목공일을 하는지 작업실을 보여줬다. 이 집과 작업실은 성의 일부분이고, 밑에 와인 창고로 쓰는 곳은 성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머물던 장소라고 한다. 그곳에는 어무니가 담가둔 토마토소스병이 잔뜩 있었다. 음, 김치냉장고..ㅋ
내 자전거를 다시 봐주겠다며 앞바퀴에도 실란트를 투입하고, 부족한 체인오일을 더 뿌려줬다. 가다가 쓰라면서 뜯지도 않은 작은 오일을 챙겨줬다.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이미 가져온 오일은 다 썼고, 페달질을 할 때마다 체인 갈리는 소리가 나서 나에겐 꼭 필요한 물건이었다. 그리고 작은 어댑터를 잃어버리지 않게 끈에 끼워서 줬는데, 이게 있으면 주유소에서 차바퀴를 위한 펌프로 공기를 주입할 수 있다고 했다. 아까 조치한 뒷바퀴는 펑크가 해결된 것 같았다. 진심으로 고마워여..
저녁은 페페가 외식하자고 해서 9시쯤 나갔다. 풀리아는 저녁식사를 아주 늦게 한다고 했다. 이르면 8시, 보통 9시나 10시쯤. 특히 여름은 해가 길어서 더 늦게 먹는다고.. 아까 쪼매난 빵 하나 먹길 잘 한 듯. 가는 길에 시청에서 하는 무료 개방 음악공연을 잠시 보다가 식당으로 갔다.
마첼레리아(Macelleria)라고 불리는 정육점에 들어가서 고기를 직접 골라 원하는 요리방식을 선택하면 그걸 옆의 공간으로 가져다주는 식육식당 같은 시스템이다. 알아서 이것저것 시키더니 테이블에 앉아서 맥주도 주문했다.
생고기, 모짜렐라 치즈 덩어리, 버거 두 개, 양파볶음 등이 나와서 집에서 싸 온 매운 소스를 곁들여 먹었다. 생고기는 육사시미처럼 얇게 떠놓은 건데, 올리브오일과 약간의 치즈&루꼴라를 얹어놔서 아주 맛있었다.
버거는 딱딱한 빵에 소세지가 들어간 것과 소고기말이가 들어간 것이 나와서 반으로 잘라 각각 먹었다.
소세지를 별로 안 좋아해서 좀 걱정됐는데, 다행히 냄새 안 나게 맛있어서 그것도 잘 먹었다.
후식주로 리몬첼로와 그라빠를 시켜서 같이 나온 비스코티를 담가서 먹기도 했다. 하룻밤 신세를 지는 대가로 저녁은 내가 계산했는데, 여기에 맥주도 총 4병을 먹었는데 꼴랑 30유로라니.. 로컬 물가 진짜 남다르긴 하다.
그라빠는 처음 먹어본다고 했더니 집에 많다고 가서 더 먹자고 했다. 빈 병에 술을 따라서 근처의 여동생네 집으로 갔다. 거긴 저녁식사를 막 마치고 디저트를 먹으려고 해서, 우리도 그라빠를 따라 슈와 함께 먹었다. 그러다가 거기에서 뜨뜻한 새 스웨터를 하나 줘서 얻어 입고, 저녁 다 드신 어무이를 모시고 셋이 집으로 돌아왔다. 얼마 안 마셨는데, 페페는 완존히 맛이 간 것 같다.